항일 변호사가 전쟁 중 대전형무소 학살 방조 두 얼굴 [뉴스]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3권을 펼쳤다. 원택연(元澤淵, 1907~1966) 항목의 첫 문장이 눈에 박혔다.
원택연은 한국전쟁 시기 전국 교도소를 지휘 감독하는 법무부 형정국장으로 재소자 학살사건의 책임자 중 한 명이다.
그런데 그 바로 아래 문장이 또 눈에 박혔다.
1907년 항일운동 가문에서 태어난 원택연은 1931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해 적색노조사건이나 공산당 재건운동 등을 적극 변호한 2세대 민족변호사로 활동했다.
같은 사람이다. 독립운동가의 아들이 적색노조 변호사가 됐고, 그 적색노조 변호사가 재소자 학살을 명령한 법무부 형정국장이 됐다. 한국현대사에서 이렇게 극적인 변신의 궤적을 가진 인물이 또 있을까.
원택연(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1907년 함경남도 정평 출생, 독립운동 가문의 장남
원택연은 1907년 6월 24일 함경남도 정평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원종집은 1919년 정평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됐다. 동생 원주연은 광주학생운동과 정평농민조합운동에 참여해 두 차례 옥고를 치르다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해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이 집안에서 태어난 장남 원택연은 가난 때문에 학교를 여러 번 옮겨 다녔다. 함흥영생학교, 중앙고보, 경신학교 어느 곳도 졸업하지 못했다. 1926년 사립학교 교원시험에 합격해 보통학교 교원으로 일하다가, 절에 들어가 2년간 독학으로 법률을 공부해 1931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응시자 241명 중 합격자가 6명이었고, 조선인은 3명뿐이었다. 중학교 2학년을 마친 후 독학으로 시험에 합격한 그의 이야기를 조선일보가 크게 보도했다. 민중의 권리 옹호를 위해 성심껏 노력하겠다 는 포부를 밝혔다.
세계사 속의 동류, 전향 의 비극을 보여준 법률가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유형의 인물이 떠오른다. 소련에서 1930년대 이상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이 혁명 이후 스탈린(1878~1953) 체제의 폭력을 목도하면서 전향하거나 체제에 복무하게 된 법률가들이 있었다. 아르투르 쾨슬러(Arthur Koestler, 1905~1983)는 이 현상을 소설로 기록했다.
원택연은 다른 방향으로 전향했다. 항일 민족변호사에서 친미 공안검사로. 그 전향의 경로에는 1935년 사기사건으로 변호사 자격을 잃은 것, 조선일보에서 10년을 보낸 것, 해방 후 미군정이 검사로 임용한 것이 있었다. 체제가 바뀔 때마다 다른 권력의 편에 선 것이 그의 패턴이었다.
1945년 1월, 아인 하쇼펫 키부츠에서. 쾨슬러는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다.(위키피디아)
1931~1935년, 민족 변호사의 황금기
원택연이 변호사로 활동한 4년은 짧았지만 빛났다. 경성제대 반제동맹 사건, 정평농민조합 사건, 간도공산당 사건,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사건, 적색노동조합 사건. 이름만 들어도 서늘한 사건들의 변론을 맡아 피의자들을 변호했다. 일본경찰이 독립운동가를 고문치사한 사건에서도 법정싸움을 벌여 고문 경관을 처벌받게 했다. 총독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 소송까지 제기했다.
그런데 1935년, 유산상속 사기사건의 피의자가 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변호사 등록이 취소됐다. 『반헌법행위자열전』은 이것이 일제의 민족인권변호사 탄압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이유였든, 원택연은 여기서 변호사로서의 삶이 끝났다.
경성제대 반제동맹 사건을 전한 조선일보 1931년 11월 4일자 호외. 일제 경찰은 보도금지 조치를 내려 대규모 체포 두 달 후에야 보도할 수 있었다.
방응모의 배려로 조선일보에서 10년
변호사 자격을 잃은 원택연은 1938년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의 영입으로 서무부장과 판매부장을 지냈다. 조선일보가 1940년 강제 폐간되자 조광사 전무이사로 옮겼다. 항일 변호사가 독립운동과 거리가 먼 언론·출판계에서 10년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1945년 해방이 왔다. 미군정이 그를 검사로 임용했다. 새로운 체제, 새로운 권력, 새로운 역할이 시작됐다.
방응모(위키백과)
해방 후 검사 원택연, 보수화된 법조인
해방 후 원택연의 첫 번째 큰 사건은 1946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었다. 정판사 사건의 담당 변호사 윤학기를 취조하고, 판결의 부당함을 지적한 성명서를 낸 신문기자들을 문초했다. 과거 비슷한 좌익사건에서 변호인으로 싸우던 원택연이 이제는 그 반대편에서 검사로 활동한 것이다.
1948년 제주 4·3 사건을 조사하러 현지를 다녀온 원택연은 적색분자의 책동보다 일반 관공리들의 부패가 더 큰 원인 이라는 비교적 균형 잡힌 담화를 발표했다. 이 시점까지는 아직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 대한 미군정청 제1관구경찰청 진상보고 내용을 발표한 조선일보 1946년 5월 16일자 기사
1950년, 대전형무소 학살을 명령했다
원택연의 반헌법 행위의 절정은 1950년 한국전쟁이다. 당시 법무부 형정국장으로 전국 교도소를 감독하던 원택연은 대전으로 피난 가 있던 시기에 상부의 대전형무소 정치·사상범 처단 명령을 받고 형무소장 직권으로 임의 처리하라 고 지시하여 사실상 형무소 재소자의 학살을 방조했다.
대전형무소에서 1700~1800명의 재소자가 총살됐다. 현장을 목격한 외국기자들의 사진이 나중에 국제적으로 공개돼 커다란 충격을 줬다. 그 학살의 법적 책임자 중 한 명이 원택연이었다.
형무소장 직권으로 임의 처리하라.
이 한 마디가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1931년 고문 피해 독립운동가를 위해 일본경찰을 법정에 세웠던 변호사가, 1950년 재소자 학살을 임의 처리 하라고 지시했다.
대전광역시 월간일류도시대전
제주지검장으로 3·15부정선거에 눈 감아
1955년 10월 제주지방검찰청 검사장이 된 원택연은 1960년 3·15부정선거가 자행될 때 그 자리에 있었다. 제주에서 부정선거에 눈을 감고 있다가,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자 검찰의 자가 숙청작업 대상이 돼 검사복을 벗었다.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65년에는 둘째 동생 원충연의 반혁명사건 변호를 맡았다. 원충연은 5·16 이후 유일하게 실병력을 동원하려 했던 반혁명사건의 주역이었다. 항일 집안의 피가 형제에게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발현된 것이다.
바로 아래 동생 원주연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복역해 1934년 만기 출옥하자 맏형 원택연의 집에서 요양하다 1936년 3월 15일 숨을 거뒀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것을 보면 형제애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택연은 1966년 12월 4일 급환으로 서울 용산구 효창동 자택에서 59년 삶을 마쳤다.
제10대 제주지검장 원택연(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학살 문제를 다룬 역사서들이 있다. 그 책들은 공통적으로 이 점을 지적한다. 전쟁 중에 학살을 가능하게 한 것은 총을 든 병사만이 아니었다. 명령을 내린 관료들, 그 명령을 집행한 행정체계가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
원택연은 형무소장 직권으로 임의 처리하라 는 말로 학살을 명령했다. 법무부 형정국장으로서 그가 한 이 말은, 일본경찰이 독립운동가를 고문할 때 법정에서 싸우던 사람의 말이었다. 그 변신의 거리가 한국현대사의 비극이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 )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원택연을 떠올렸다. 체제가 바뀔 때마다 그 체제의 편에 선 법률가. 그 패턴이 지금도 어딘가에서 반복되고 있지 않은지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그는 1966년 12월 4일 급환으로 세상을 떠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