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의 한글철학 ㊲] ᄒᆞ고ᄌᆞᆸ(欲), 고픔의 뿌리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석 류영모는 ‘욕(欲)’을 ‘ᄒᆞ고ᄌᆞᆸ’이라 했다. ‘ᄒᆞ고’를 ‘ᄌᆞᆸ’은 꼴이다. 게다가 ‘하늘아(․)’를 넣었으니 끊이지 않는다. 마음에 ‘하고픔’으로 뒤범벅이다. ‘고픔’, ‘시픔(싶음)’이 꼬였다. 죄는 이 ‘ᄒᆞ고ᄌᆞᆸ’보다 큰 것이 없다. 제 뜻대로 하려는 억누름이기 때문이다. 이 ‘ᄒᆞ고ᄌᆞᆸ’을 끊어내야 마음 눈이 맑아진다. 그래야 야믊(妙)의 참올(眞理)을 볼 수 있다.
늘 뒤흔들리고 괴로운 까닭은 모자라서가 아니다. 속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쥐려 하고, 제 뜻대로 세상을 잡고 누르려는 이 ‘ᄒᆞ고ᄌᆞᆸ’의 지나침 때문이다. ‘ᄒᆞ고ᄌᆞᆸ’에 사로잡히면 눈앞의 화려한 껍데기와 쓸몬(財貨)에 홀려 정작 속이 꽉 찬 산알의 알맹이인 ‘얼’을 놓치고 만다. 하고픔의 안개를 걷어내고 제 뜻을 내려놓아야만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참꼴을 볼 수 있다. 다석은 이렇게 짚어냈다.
진리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내 뜻 없이(無意) 보는 것이 바로 보는(正見) 것이다. … 이는 내 뜻이 없어지고(無意), 내 고집이 없어지고(無固), 나라는 것이 없어지고(無我), ‘반드시’가 없어진(無必) 세계다. 진리와 나가 하나가 되는 세계다.”
곧, ‘ᄒᆞ고ᄌᆞᆸ’이라는 헛된 뜻과 헛꼴(我相)조차 오롯이 사라질 때, 비로소 참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정견(正見)의 눈을 뜨게 된다는 뜻이다. 정견은 바로 봄이다. ‘기어코 하고야 말겠다’는 매임이 끊어질 때 드러난다. ‘ᄒᆞ고ᄌᆞᆸ’의 ‘고’를 끊어내야 한다. 저절로에 몸을 맡겨 그저 묵묵히 가오는 ‘ᄒᆞᄌᆞᆸ’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삶은 우주 숨돌림에 맞닿아서 여물어 간 ‘야믊(妙)’을 열맺게 되리라.
[다석의 한글철학]에 가져다 쓴 노자 늙은이 풀이는 다석 류영모의 것이다. 있는 그대로 가져왔기에 띄어쓰기, 하늘아(), 이어쓰기를 그대로 두었다. 또한 이 글에 가져다 쓴 다석어록”은 1993년 홍익재에서 펴낸 『씨ᄋᆞᆯ의 메아리 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이 온통이다. 여기서 가져왔다.
열쇳말: ᄒᆞ고ᄌᆞᆸ - ᄒᆞᄌᆞᆸ - 좋이 - 쓸몬 – 야믊
그림1) 제주 ‘문자도(文字圖)’이다. 육지의 문자도가 유교 규범에 갇혀 있다면, 제주 문자도는 바닷물고기, 새, 꽃 등이 뒤섞여 문자 형식을 해체하고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제주 문자도는 글자라는 형상에 매이지 않고 그 속의 ‘얼’을 드러냈다. 하고픔의 안개를 걷어낸 정견의 눈에만 보이는 파격의 참꼴이다.
#1. ᄒᆞ고ᄌᆞᆸ(欲): 제 뜻대로
얼빠진 놈
하루가 다할 때까지 무언가를 갈구한다. 돈 벌고 싶고, 여김을 받고 싶고,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 다석은 이 욕(欲)을 ‘ᄒᆞ고ᄌᆞᆸ’이라 풀었다. ‘ᄒᆞ고ᄌᆞᆸ’은 ‘하고 싶다’와 ‘잡다’ 혹은 ‘잡히다’가 더해진 말이다. 욕을 잡은 것 같지만, 실상은 욕이 나를 잡고 놔주지 않는 꼴이다. 세상은 ᄒᆞ고ᄌᆞᆸ이 넘쳐 나고 ᄒᆞ고ᄌᆞᆸ이 들끓는다. 마음에 무언가 ‘하고 싶다’는 불이 치솟으면, 사람은 제 줏대를 잃는다. 콩깍지가 씌고 귀가 먼다. 다석은 몸뚱이만 가지고 맘을 내면 견물생심(見物生心)이 된다. 몸뚱이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죄악이다. 무슨 맛을 그리워하는 것은 못쓴다. 무엇을 좀 갖겠다든지, 좋은 소식을 좀 듣겠다고 하는 것은 실제 마음이 거기에 머뭇거리는 증거이다. 이런 생각은 하나의 ‘우상’이니 삼가야 한다.”라고 했다. 제나는 이 ‘ᄒᆞ고ᄌᆞᆸ’을 먹고 사는 굶주린 넋(餓鬼)이다. 이거 하고 싶어, 저거 갖고 싶어” 하며 끊임없이 보채는 얼빠진 놈, 그것이 바로 ‘ᄒᆞ고ᄌᆞᆸ’의 헛꼴이다.
갇힌 꼴
늙은이(老子)는 3월에 ᄒᆞ고ᄌᆞᆸ만 ᄒᆞᆫ건 보질 말아서, ᄆᆞᆷ이 어지럽지 않게, 하오라”라고 했다. 이것은 하고 싶어 하는 것만 하는 걸 보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이것이 가려 먹고 가려 보는 외톨박이다. ‘ᄒᆞ고ᄌᆞᆸ’이 마음에 들어차면 참꼴 마음이 ‘어지럽게’ 된다. 하고픔이 밑도 끝도 없이 커서, 그 마음 한복판이 어지럽게 돌아 옴짝달싹 못 하고 갇힌 꼴이다. 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가온을 잃고 비틀거린다. 고요한 마음을 잃고 허둥지둥한다. 불안하고 초조한 까닭은 세상 때문이 아니라, 속에 날뛰는 이 ‘ᄒᆞ고ᄌᆞᆸ’ 때문이다. 다석은 맘은 자유로운데 그 본질이 있다. 매여 사는 것은 내려가는 것이다. 매이는 것이 우상이다. 매어놓지 말아야 할 것을 매어놓고 모이는 것이 아닌데도 모으려고 하는 것이 우상이다.”라고 말했다.
변장술
것을 바라는 것만 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석은 좋이” 여기는 마음조차도 ‘ᄒᆞ고ᄌᆞᆸ’이라고 저어했다. 3월 풀이에 닦아남을 좋이지 말아서”라고 했다. 훌륭한 사람, 어진 사람을 좋아하고 높이는 것도 실은 ‘ᄒᆞ고ᄌᆞᆸ’이다. 왜일까? ‘ᄒᆞ고ᄌᆞᆸ’을 숨기고 ‘어진 이’ 가면을 쓰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걸 쓰니 좋고 걸 모른다. 다석은 이름을 좋아하는 사람은 허수아비를 좋아하는 도깨비 장난이다. 서로 이름이라는 가면을 쓰고 가면극을 벌이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이다.”라고 했다. 모르면서 무조건 차지하려고 한다. 겉으로는 마땅한 사람을 좋아하고, 참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 속에는 나도 저렇게 대접받고 싶다”, 저 훌륭함을 내 것으로 삼고 싶다”는 약삭빠른 시픔(싶음)이 숨어 있다. 마음에 들도록 제 헛바람이 꽉 들어찬 사람들이다. 이는 허깨비 헛꼴(我相)이다. 착함조차 욕의 도구로 삼는 것, 이것이 ‘ᄒᆞ고ᄌᆞᆸ’의 무서운 변장술이다.
갇집
46월에 죄는 ᄒᆞ고자ᄒᆞᆯ만 ᄒᆞ단거보다 큰것이 없고”라 했다. 살인이나 강도가 큰 죄지만, 더 근원적인 죄는 바로 이 ‘ᄒᆞ고ᄌᆞᆸ’이다. 어리석음(我痴)은 첫 뿌리 올을 깨닫지 못하는 ‘밝없(無明)’인데, 하고픔이 싸잡아 돌고 속에 불이 치솟아 얼이 썩은 놈이다. 다석은 신업의 근본은 의업(意業)인 삼독(三毒)이다. 탐냄(貪), 미워함(瞋), 치정(痴), 이 세 가지가 독(毒)으로 뱃속 밑에서 꿈틀거리는데 삼악을 저지른다.”라고 하지 않았나. 모든 죄는 ‘더 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싹튼다. 남의 것을 훔치는 훔침질도, 남을 짓밟는 권력욕도, 자연을 파괴하는 탐욕도 모두 이 ‘ᄒᆞ고ᄌᆞᆸ’에서 나온다. ᄒᆞ고ᄌᆞᆸ이 차서 속알이 어지럽다. 속알이 빈 것은 ᄒᆞ고ᄌᆞᆸ이 차서다. 욕으로 꽉 찬 배는 하느님의 뜻(얼)을 담을 수 없다. 그러니 ᄒᆞ고ᄌᆞᆸ을 품고 사는 한, 죄의 ‘갇집(監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쓸몬
ᄒᆞ고ᄌᆞᆸ은 무엇을 바랄까? 바로 ‘몬(物)’이다. 몬(物)을 채우고 채워서 채움을 끝없이 바라는 ‘ᄒᆞ고ᄌᆞᆸ’이 병이다. 몬에 꽂히고 홀려서 정신줄 놓아 버린 ‘ᄒᆞ고ᄌᆞᆸ’의 욕이다. 눈에 보이는 몬에 꽂히면 정신줄 놓는다. 다석은 속이 어두워질까 맘에 몬(物)이 살아나는 것을 제일 두려워한다. 몬(物)에 맘이 살면 맘의 자격을 잃고 만다. 이 광명 세계는 사이비 광명이다. 그러한 가운데 물질에 맘이 살아나면 안 된다. 이 광명 속에 맘이 살아나면(生心) 안 된다.”라고 했다. 쓸몬(財貨)은 ‘ᄒᆞ고ᄌᆞᆸ’을 일으키는 마음이요 바람이다. 귀한 몬을 높여 쓰지 말라고 했다. 몬이 나쁜 게 아니라, 몬에 혼을 빼앗기는 마음이 병이다. ᄒᆞ고ᄌᆞᆸ을 말끔히 걷어내고 길을 뚫어야 한다. 다석의 처방은 확실하다. ‘ᄒᆞ고ᄌᆞᆸ’을 걷어내야 한다. 제 뜻대로 하려는 억지를 버리고, 몬에 꽂힌 눈길을 거두어들여야 한다. 그때 비로소 막혀 있던 숨통이 트이고, 시원하게 뚫린 ‘길’이 보이리라. ‘ᄒᆞ고ᄌᆞᆸ이’ 죽어야 내가 산다.
그림2) 분청사기 ‘귀얄문(刷毛目)’이다. 억지 없는 시원한 짓거리를 본다. ‘ᄒᆞᄌᆞᆸ’은 억지로 하려는 뜻이나 바람이 섞이지 않은 시원한 짓거리라고 했다. 귀얄 기법은 백토를 솔(귀얄)에 묻혀 ‘쓱쓱’ 문지르면 끝이다. 훌륭한 도자기를 만들겠다는 ‘고집’ 없이 붓 가는 대로 몸을 맡긴 결과다.
#2. ᄒᆞᄌᆞᆸ: 그저 함
그저 해
무엇을 하든 이걸 해서 뭘 얻을까?”를 먼저 헤아린다. 이것이 ‘ᄒᆞ고ᄌᆞᆸ’이다. 다석은 사람은 이용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이용이니 소용이니 하는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정말 사는 것이다. 이것을 존재라고 한다.”라고 했다. 참 ‘있꼴’이다. ‘ᄒᆞ고ᄌᆞᆸ’이 없다. 다석은 가운데 글자 ‘고’를 쏙 빼버리고 ‘ᄒᆞᄌᆞᆸ’이라는 말을 썼다. ‘ᄒᆞ고ᄌᆞᆸ’은 뭘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런데 ‘ᄒᆞᄌᆞᆸ’은 ‘그저 하는’을 뜻한다. ‘ᄒᆞᄌᆞᆸ’은 ‘ᄒᆞ’와 ‘ᄌᆞᆸ’이 더해진 말로 볼 수 있다. 그저 잡다”, 그저 하다”는 뜻. 억지로 하려는 뜻이나 바람이 섞이지 않은 시원한 짓거리다.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고, 때가 되면 일하는 것. 거기에 맛있는 걸 먹고 싶다”거나 더 자고 싶다”는 군더더기가 붙지 않은 꼴, 이것이 바로 ‘ᄒᆞᄌᆞᆸ’이다.
일이 저절로
(老子)는 이를 일러 ᄒᆞᆷ없 ᄒᆞᆷ(爲無爲)”(63월)이라 했다. 이를 ᄒᆞᄌᆞᆸ 없이 일을 봐 내고”라고 풀었다. 보통 사람은 ‘ᄒᆞ고ᄌᆞᆸ’으로 일을 한다. 욕이 동력이 되어 일을 추진한다. 그러나 씻어난이(聖人)는 ‘ᄒᆞᄌᆞᆸ’으로 일을 한다. 욕 없이도 일이 저절로 되게 만든다. 다석은 일나면 하고 되어지니 되게 하면 일이 쉽다. 자연에 따라 하면 일이 쉽게 저절로 된다.”라고 했다. ‘ᄒᆞᄌᆞᆸ’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게으름이 아니다. ᄒᆞᆷ 없이 ᄒᆞ매, 못다시림이 없오라.”(3월)고 했다. 딴짓(욕심부리는 짓)을 안 할 뿐,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빈틈없이 해낸다. 여름아비(農夫)가 때맞춰 씨 뿌리고 김매듯, 그저 할 일을 묵묵히 할 뿐이다. 농사를 잘 지어서 부자가 돼야지” 하는 마음조차 내려놓고, 그저 땀 흘려 일하는 그 짓에 파고드는 것, 이것이 ‘ᄒᆞᄌᆞᆸ’의 저절로다.
붙어있지 않
ᄒᆞᄌᆞᆸ’의 가온꼭지는 뒤끝이 없다. 늙은이 2월에 하고, 절 믿거라 아니ᄒᆞ며.”, 일이룬데 붙어있지 않으오라.”라고 했다. ‘ᄒᆞ고ᄌᆞᆸ’으로 한 일은 저를 치켜세운다.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나를 알아달라!” 하며 공에 집착한다. 그러나 ‘ᄒᆞᄌᆞᆸ’으로 한 사람은 일을 마치면 훌훌 털어버린다. 마치 새가 하늘을 날아간 뒤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과 같다. 다석은 쌀을 되는 되(升)는 될 것을 되고는 곧 비워야 다음에 될 것을 또 될 수 있다. … 우리의 마음(心)이란 됫박이다. 됫박은 될 것을 되고는 금방 비우는 것이 석가가 말한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의 자리다.”라고 했다. 다석은 그저 붙어있지 않을라 만에, 그래서 떠러져가지를 않으오라”(2월)고 풀었다. 제가 했다는 생각(我相)에 붙어있지 않으니, 오히려 그 공이 늘 남는다. 이것이 ‘씻어난이’가 사는 법이다.
저절로 흐름
‘ᄒᆞᄌᆞᆸ’은 억지가 섞이지 않은 저절로다. 그이가 하는 일이란 자연이 저절로 돌아가는 그 올 다스림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 되면 잎이 진다. 자연은 꽃을 피우고 싶어!” 하고 안달하지 않는다. 다석은 봄이 여름으로 바뀌고, 여름이 가을로 바뀌고, 가을이 겨울로 바뀌는 것이 자연이다. 하늘 땅 펼친 자리에 계속 바뀌어 가는 것이 자연이요, 인생이다. 이러한 발전과 변화의 대법칙을 따라 세상에 나타나 하나의 현실이 된 것이 나요, 내가 해야 할 사명을 받아 나의 할 일을 하는 것이 나다.”라고 했다. 때가 되면 그저 피우고, 때가 되면 그저 진다. 삶도 그래야 한다. 억지로 부자가 되려 하거나, 억지로 높아지려 하지 말고, 주어진 삶에 몸을 맡기고 오늘 하루 해야 할 일을 ‘그저’ 하면 된다. 걸을 때는 걷기만 하라. 딴생각하지 말고, 지금 하는 짓에 하나가 돼라.
심심해
세상은 열정(ᄒᆞ고ᄌᆞᆸ)을 찬양한다. 야망을 가져라!”, 목표를 향해 달려라!”라고 부추긴다. 하지만 그 끝에는 넋 놓음과 빈 쓸쓸함이 있다. 반면 ‘ᄒᆞᄌᆞᆸ’은 심심해 보이지만 지치지 않는다. 욕이라는 땔감을 쓰지 않고, 우주의 얼을 받아쓰기 때문이다. 다석은 마음 놓이는 것처럼 좋은 것이 없다. 마음에 괴롬이 없고 평안하면 심심치 않겠는가 하고 걱정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몰라서 하는 말이다. 마음이 놓이면 그때는 바탈(性)을 타고 나가게 된다.”라고 했다. 쓰는데 힘들지 않음”(6월)이라 했다. 아침마다 일어나 마당을 쓰는 수행자처럼, 바라는 바 없이 ‘그저’ 하루를 살자. 그 브들므릇한 하루하루가 쌓여 아주 훌륭한 ‘솟난이’의 삶을 이룬다.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마다 그 ‘고’를 싹둑 잘라버리자. 그리고 그냥 하자. 그저 할 뿐이다. 이 오롯한 ‘ᄒᆞᄌᆞᆸ’ 속에, 스스로를 말미암는 숨은 뜻이 있다.
그림3) 19세기 굿그림 ‘대감신’이다. 대감신(또는 장군)은 재물·권세 기원의 대상이다. ‘좋이’가 우상화되는 지점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또한 욕이 어떻게 신격화되는지도 보여준다. 더불어 붉은 얼굴과 부릅뜬 눈은 불의를 꿰뚫어보고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강력한 위웜과 벽사(辟邪)의 뜻도 담고 있다.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3. 좋이: 더, 더
‘좋이’가 ᄒᆞ고ᄌᆞᆸ
흔히 이거 좋다”, 저거 좋다” 하며 좋고 나쁨을 따진다. 다석은 이 마음을 우리말 ‘좋이’로 표현했다. 3월에 나오는 ‘좋이’를 두고 ‘좋이’는 ‘마음에 들게’를 뜻한다”라고 풀었다. ‘좋이 여기다’, ‘마음에 들다’ 할 때의 그 ‘좋이’다. 언뜻 보면 좋은 말 같다. 하지만 길(道)로 따지면, 콕 집어 이것이 좋다”라고 마음에 두는 순간, 마음은 바름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좋아하는 것을 잡으려 하고, 싫어하는 것을 밀어내려는 ‘ᄒᆞ고ᄌᆞᆸ’이 일어난다. 그래서 ‘좋이’가 ‘ᄒᆞ고ᄌᆞᆸ’”이라고 꿰뚫어 보았다. ‘좋아함’은 곧 ‘욕’의 다른 이름이다. 다석은 저 좋으면 좋다는 말은 악마에 복종하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실컷’ ‘좋으면 좋다’는 말은 틀림없이 심판을 받을 말들이다.”라고 했다.
우상
3월에 닦아남을 좋이지 말아서, 씨알이 다투지 않게.” 하라고 했다. ‘닦아남(현, 賢)’은 갈고닦아서 훌륭해진 사람, 즉 어진 이를 뜻한다. 훌륭한 사람을 존경하는 건 마땅한 일인데, 왜 늙은이는 그것을 ‘좋이지(숭상하지)’ 말라고 했을까? 씨알이 다투는 까닭은 ‘닦아남’을 차지하고픈 ‘ᄒᆞ고ᄌᆞᆸ’ 때문이다. 사회가 남다른 값어치(쓸몬, 이름값, 배곧기둥…)를 ‘좋은 것’으로 떠받들면,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려고 피 터지게 싸운다. 순수한 높임이 아니라, 저 자리에 올라 대접받고 싶다”는 욕(ᄒᆞ고ᄌᆞᆸ)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다석은 이 세상에서 큰 것은 이미 우상이지 생명이 아니다. 커야 대접받는 줄 알지만 겸손한 사람이 대접받지 교만한 사람은 옥바가지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좋이지 말라’는 것은, 특정 가치를 우상화하여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지 말라는 경고다.
자꾸 자꾸
‘좋이’의 무서움은 중독성에 있다. 처음에는 가볍게 좋아하지만, 곧 쏠려 매인다. 그 디딤은 이렇게 보인다. 좋이, 좋이, 좋이, 더, 더, 더.” 그 마음에 ‘ᄒᆞ고ᄌᆞᆸ’의 ‘제나’가 들어찬다. 좋은 것은 자꾸 보고 싶고, 자꾸 갖고 싶다.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갖고 싶고, 더, 더, 더”를 외치게 된다. 이것이 욕의 속성이다. 다석은 욕심이란 끝이 없다. 그것은 밑빠진 항아리와 같다. 물을 아무리 부어도 소용이 없다. 그것은 죽음이요, 손실뿐이다. 욕(欲)은 손(損)이다. 욕을 버리면 의롭고 욕을 가지면 해롭다.”라고 했다. 마음에 들도록 자기의 헛꼴이 꽉 들어찬 사람들, 허깨비 헛꼴(我相)이다. ‘좋이’를 좇다가 결국 자기 욕(제나)이라는 허깨비에 씌어, 진짜 중요한 산알(얼)을 잃어버리는 꼴이다. ‘좋아하는 것’에 매달려 더!”를 외치는 순간, 이미 ‘ᄒᆞ고ᄌᆞᆸ’의 노예다.
옥돌
무언가를 ‘좋이’ 여기면 눈이 먼다. 갈홍(葛洪, 283~343년)은 흰 돌이 옥 같네”라고 했다. 욕(ᄒᆞ고ᄌᆞᆸ)이 마음에 가득 차면 눈이 뒤집혀서, 길가에 굴러다니는 흰 돌조차 귀한 옥으로 보인다.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은 바보라서 당하는 게 아니다. 돈을 벌고 싶다.”는 ‘좋이’에 눈이 멀어 가짜를 진짜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다석은 눈이 멀어서 빛이 곱게 보일 때, 요망한 것들이 좋게 보일 때 미혹으로 색(色)을 사랑하게 된다. 좋은 것은 많은 값을 치러서라도 사려고 한다.”라고 했다. 눈이 있어도 제 눈을 뜨지 못한 것이다. 마음에 ‘ᄒᆞ고ᄌᆞᆸ’이 가득 섰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려면(正見), 내 마음속의 ‘좋이’를 내려놓아야 한다. 좋고 싫음의 색안경을 벗어야 세상의 참이 보인다.
그냥 두라
어떻게 살아야 할까? 좋은 것도 좋아하지 말고 메마르게 살아야 할까? 아니다. 매이지 말라는 뜻이다. 심지어 ‘닦아남’조차도 그러지 말라(좋이지 말라)고 했다. 훌륭한 인격조차 내가 훌륭해져야지” 하고 욕심내면 가짜(僞善)가 된다. 꽃이 예쁘면 그냥 예쁘구나” 하고 지나가야 한다. 꺾어서 방에 꽂으려(좋이) 하지 말아야 한다. 다석은 사물을 보는 데는 두 가지가 있다. 꽃을 보고 곱다면서 그냥 보는 선천관물(先天觀物)이 있고 그 꽃을 꺾는 견물생심(見物生心)이 있다. 앞에 것은 천당으로 올라가는 것이고 뒤에 것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라고 했다. 꺾는 순간 꽃은 죽고 욕만 남는다. 마음에 들게 하려 애쓰지 말고, 입맛에 맞추려 하지 말아야 하리라. 세상 잘몬을 제 생긴 대로, 제 흐름 대로 그냥 두어야 하리라(ᄒᆞᄌᆞᆸ). ‘좋이’를 버릴 때, 모든 것을 좋아할 수 있게 된다. 잘몬을 있는 그대로가 옳다는 ‘큰 사랑(온통)’으로 나아가는 길, ‘ᄒᆞ고ᄌᆞᆸ’이 가르쳐주는 슬기다.
그림4) 무속화 ‘바리공주(鉢里公主)’이다. 바리공주는 부모의 생명수를 구하기 위해 왕실의 ‘쓸몬’을 버리고 험난한 저승길을 뚫어낸 이다. 귀한 몬을 높쓰지 말고 오직 얼의 생명수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난 여정은, 고집이라는 헛된 뜻을 버리고 참을 찾아가는 구도의 디딤이다.
#4. 쓸몬(貨): 꾀내는 마음
쓰는 물건
우리는 몬에 둘러싸여 산다. 다석은 재화(財貨)를 ‘쓸몬’이라 불렀다. ‘쓸몬’은 ‘쓰다’와 ‘몬’이 합쳐진 말이다. 즉, 쓰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몬의 밑바탕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쓰이는’ 것이다. 밥그릇은 밥을 담아 먹는 데 쓰고, 옷은 입는 데 쓰면 그만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쓸몬’을 쓸 때 쓰지 않고 ‘모시기’ 할 때 생긴다. ‘쓸몬’은 ‘ᄒᆞ고ᄌᆞᆸ’을 일으키는 욕이다. 도구에 지나지 않는 몬에 ‘욕’이 스미는 순간, 그것은 임자를 잡아먹는 괴물이 된다. 다석은 신(神)을 주장하지 않고 사는 이는 그 자신이 물건이 되어서 사는 것이다.”라고 했다.
높쓰지 마라
사람들은 흔한 것보다 흔치 않은 것에 미친다. 늙은이(老子)는 3월에 타이른다. 쓸몬의 흔찮은건 높쓰지 말아서, 씨알이 훔침질을 않게.”라고. ‘흔찮은 건’은 얻기 어려운 귀한 몬이다. 다석은 이를 높쓰지 말아서”라고 풀었다. 귀하다고 떠받들고 값을 높여 부르지 말라는 것. 왜 그럴까? 사회가 남다른 몬을 비싸고 귀한 것으로 매만져 놓으면, 사람들 마음에 갖고 싶은 ‘ᄒᆞ고ᄌᆞᆸ’이 일어난다. 정당하게 못 가지면 훔쳐서라도 갖고 싶어진다. 그러니 훔침을 만드는 것은, 그 몬을 ‘높이 쓰는’ 사회의 헛된 값어치다. 바라고 높이고 높여서 쓰는 쓸몬은 욕이 만들어낸 헛짓 꼴이다. 다석이 이상한 물건이라고 받기 시작하면 필요한 물건을 무시하게 된다. 이쁘다 귀엽다 하는 것은 귀히 여기면 아무 소용 없는 것들에게 시간과 재정을 낭비하게 된다.”라고 하지 않았나.
마음 뺏김
바탕은 무엇일까? 쓸몬을 훔친 게 아니라 헛꼴(偶像)이 그 마음을 훔친 것이다. 도둑이 물건을 훔쳤다고 생각하지만, 헛꼴이 사람 마음을 훔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높쓰는 ‘쓸몬’에 눈이 멀면, 눈이 사로잡히고, 귀가 사로잡히고, 급기야 마음까지 몽땅 뺏긴다. 다석은 사람을 무시하게 되고 사람을 노리개로 여기면 자기의 인격을 상실하게 되고 물건에 마음이 끌리면 정신을 잃게 된다.”라고 했다. 마음을 뺏긴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다. ‘ᄒᆞ고ᄌᆞᆸ’의 종이 되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일 뿐이다. 그러니 진짜 피해자는 몬을 잃어버린 임자가 아니라, 몬에 혼을 도둑맞은 그 사람이다. 쓸몬은 우리 혼을 털어가는 가장 센 강도다.
쓸몬
쓸몬 중의 으뜸은 단연 ‘돈’이다. 늙은이는 9월에 금옥만당 막지능수(金玉滿堂 莫之能守)”라 했다. 다석은 이를 누런 쇠와 환ᄒᆞᆫ 구슬을 집에 그득히 두고는 직히는 수가 없으며,”라고 풀었다. 이것이 쓸몬”이다. 돈이 되는 몬이라는 뜻. 사람들은 집안 가득 ‘쓸몬’을 채워놓고 좋아하지만, 다석은 지키는 수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왜 못 지킬까? 도둑이 들어서가 아니다. 그 쓸몬을 지키느라 삶을, 때를, 얼을 다 써버리기 때문이다. 집은 나(吾)를 비우고 세우는 곳이지, 쓸몬을 채우는 곳집(倉庫)이 아니다. 가득 채운 것은 반드시 넘치거나 썩는다. 쓸몬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는 것, 이것이 ‘ᄒᆞ고ᄌᆞᆸ’이 파놓은 덫이다. 다석은 사람에게 매이려 하고 재물을 모으려 하는 매임과 모음은 그만두어야 한다. 이 세상을 죄다 잔뜩 모아서 앉아 있으려 하여도 그렇게 앉아 있을 수가 없다.”라고 했다.
그냥 쓰라
어떻게 해야 쓸몬의 꾀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답은 하나다. 그냥 쓰라.” 몬을 모시지 말고, 주인 자리에서 당당하게 ‘도구’로 쓰라는 것이다. 흔치 않은 것이라고 벌벌 떨지 말고, 그저 쓰임에 따라 싱겁게 쓰면 된다. 다석은 가멸고, 높돼서 젠척ᄒᆞ게 되면 제절로 그 허믈을 흘리미ᄅᆞ.”(9월)고 했다. 돈이 많다고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쓸몬’을 부리면 임자가 되지만, ‘쓸몬’이 부리면 노예가 된다. 다석은 몸뚱이로 살되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살지를 말고, 의식주를 구하되 내일을 염려하지 말자. 물질에 매이는 맘(拘束)과 물질을 모우는 몸(致富)은 그만두고 마음을 비워 두자.”라고 했다. 방에 무엇을 두었는가? 쓰는 물건인가, 아니면 모시는 몬인가? 쓸데없는 것은 나누고, 귀한 것에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한다. ‘쓸몬’의 값어치를 땅바닥으로 끌어 내릴 때, 값은 하늘로 솟는다. 몬은 쓰고, 사람은 사랑해야 하리라.
그림5) 화순 운주사 ‘와불(臥佛)’이다. 땅에서 익어가는 아주 큰 속알이다. 운주사 골짜기에 누워 있는 와불은 화려한 금칠도, 정교한 조각도 없지만, 그 자체가 지각을 뚫고 나온 ‘야무진’ 지구의 속알 같다. 아직 일어나지 못한(혹은 안 한) 이 미완의 부처는, 제나라는 껍질”을 벗고 땅의 숨(알짬)과 만나 빈틈없이 ‘야물어지는’ 우주적 정성이다.
#5. 야믊(妙): 여문 속알
야무진 것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을 보고 묘하다”고 한다. 뜬구름 잡는 소리 같고, 술수 같은 느낌도 든다. 우리말 알맞이에서 ‘묘(妙)’는 아주 뚜렷하고 단단한 꼴이다. 다석은 묘(妙)를 우리말 ‘야믊’이라 풀었다. 우리말 ‘여물다’, ‘야물다’를 이름씨(名詞)로 바꾼 것이다. 가을 들판의 벼를 보라. 뜨거운 여름 햇볕을 견디고 비바람을 이겨내어 속이 꽉 찬 낟알을 보고 참 잘 여물었다”, 아주 야물다”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야믊’이다(다석은 입술소리에 ‘ㅡ’를 썼다). 참은 안개 속에 숨겨진 묘한 헛꼴(幻想)이 아니다. 세찬 삶으로 속에서 단단하게 여문 ‘알맹이’다. 다석은 나는 일점광명(一點光明)의 긋이다. 그러므로 곧이 곧장 오르고 또 올라 내 속에 있는 고디(神貞)를 살려내어 내 속에 있는 ‘ · ’, 내 속에 가장 옹근 속알이 있는 것을 자각하여 깨닫고 나오는 ‘ · ’가 가장 소중하다.”라고 했다. 하늘아( · )는 옹근 속알이다.
야믄 알밤
왜 이 ‘야믊’을 보지 못할까? 늙은이는 1월에 그 까닭을 밝혔다. 늘 ᄒᆞ고ᄌᆞᆸ 없에 그 야믊이 뵈고, 늘 ᄒᆞ고ᄌᆞᆸ 있어 그 도라감이 뵈와라.”고 했다. ‘ᄒᆞ고ᄌᆞᆸ’ 없에 야믊이 뵌다고 하니, ‘ᄒᆞ고ᄌᆞᆸ’에 눈이 멀면 껍데기만 보일 뿐이다. 겉치레에 꽂혀서, 정작 그 안에 깃든 산알의 ‘야믊’은 보지 못한다. ᄒᆞ고ᄌᆞᆸ을 말끔히 걷어내고 길을 뚫어야 한다. 고픔의 안개를 걷어내야 비로소 알밤처럼 단단하게 여문 우주 올이 보인다. 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것은 마술이 아니다. 우주 정성이 ‘야물어’ 터진 놀라운 자취다. ᄒᆞ고ᄌᆞᆸ을 버린 눈만이 이 단단한 참꼴을 볼 수 있다. 다석은 진리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내 뜻 없이(無意) 보는 것이 바로 보는(正見) 것이다. … 이는 내 뜻이 없어지고(無意), 내 고집이 없어지고(無固), 나라는 것이 없어지고(無我), 반드시가 없어진(無必) 세계다. 진리와 나가 하나가 되는 세계다.”라고 했다.
속알 찬 알짬
‘야믊’은 속의 자리를 말하기도 한다. 속이 꽉 찬 아람을 ‘속알(德)’이라 했다. 그 가온꼭지를 ‘알짬(精)’이다. 알짬은 쌀을 쓿어 낸 뒤의 알맹이만 고른 것. 벼를 찧어 껍질을 벗기면 뽀얀 쌀알(알짬)이 나온다. 삶도 마찬가지다. ‘제나’라는 껍질, 욕이라는 껍질을 끊임없이 벗겨내고 닦아내면, 마침내 속에 숨은 참 바탈(天性), 그 ‘알짬’이 드러난다. 이 알짬이 밖으로 새지 않고 속으로 단단하게 뭉친 꼴, 그것이 바로 ‘야믊’이다. 야무진 사람은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이지만 속은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다. 세상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욕에 휘둘리지 않는다. 속이 꽉 여물었기 때문이다. 다석은 어머니 배에서 나온 것이 나가 아니다. 속알이 나다. 정신이 나다. 속사람이 나다. 겉사람은 흙 한 줌이요, 재 한 줌이다. 그러나 참나인 속사람은 하늘나라를 세울 수 있다. 그것은 한없이 크고 한없이 강한 나다.”라고 했다.
낳고 내고
이 ‘야믊’의 힘은 우주 소용돌이의 밑올(原理)이기도 하다. 다석은 주돈이(周敦頤, 1017~1073)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을 풀이하며 이렇게 말했다. 없극겆이요, 커극겆이다. 커극겆이 움직여 불숙이 뵈고, 움직 극겆에 고요, 고요에 움숙이 보임. 고요 극겆 다시 움직. 한움직 한고요 서로 그 뿌리됨. 쪽(너) 움숙 쪽(나) 불숙 둘봐옳이 니러섰다.” 우주 잘몬은 하늘의 뜻(없극)과 땅의 숨(알짬)이 만나 빈틈없이 ‘야물어(妙)’질 때 솟난다. 사랑으로 목숨을 배는 것도 알짬이 ‘야물어’지는 디딤이다. 그러므로 ‘야믊’은 산알의 숨은 혼이자 ‘첫비롯(創造)’의 힘이다. 얼렁뚱땅 만들어지는 목숨은 없다. 우주 온 산알이 다함 없는 ‘ᄆᆞᆷ(精誠)’으로 뭉치고 다져져서 ‘야물어질 때’ 비로소 하나의 산숨이 솟난다. 다석은 우리의 몸은 단순히 정신을 담는 그릇만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 4백조의 살알(細胞)이 하나로 뭉치어 유기체를 이룰 때에 여기에 개성이랄까, 성격이랄까, 한 인격이 나타나는 것은 참으로 신비하다고 아니 할 수 없다.”라고 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우주가 그토록 공들여 야물게 빚어낸 걸작품이다.
인생의 결실, 야무지게 마쳐라
쭉정이(제나)로 살다가 바람에 날려갈 것인가, 아니면 알곡(얼나)으로 여물어 하느님의 곳간(빈탕한데)에 들어갈 것인가? 야무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말해도 야무지게 하고, 일을 해도 야무지게 하며, 삶을 마칠 때도 야무지게 끝맺어야 한다. 흐리멍덩한 욕(ᄒᆞ고ᄌᆞᆸ)에 취해 살지 말고, 서릿발 같은 얼로 하루하루를 꽉 채워(가온찍기) 야물게 살아야 한다. 거짓 나(제나)의 욕인 ‘ᄒᆞ고ᄌᆞᆸ’을 버리고, 참(얼나)의 열매인 ‘야믊’을 얻는 것. 이것이 늙은이와 다석이 우리에게 전해준 ‘길알줄(道德經)’의 맺음말이다. 가을 들판의 황금 낟알처럼, 속이 꽉 차고 단단하게 ‘야믄’ 삶이 되어야 하리라. 다석은 바쳤다는 말은 밥이 되었다는 말이다. 밥이 되었다는 말은 밥을 지을 수 있는 쌀이 되었다는 것이다. 쌀이 되었다는 말은 다 익었다는 것이다. 성숙하여 무르익은 열매가 된 것이다. 인생은 무엇인가. 무르익는 것이다.”라고 했다.
[부록] 다석 류영모의 우리말 알맞이(哲學) 뜻글 풀이
1. 닦아남(賢): 흔히 어질 현(賢)을 ‘어진 이’로 풀지만, 다석은 이를 ‘닦아남’이라 했다. 이름씨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를 닦고(修) 닦아서 속알이 솟아나는(生:남) 움직임이다. 멈춰있는 인격이 아니라, 샘물처럼 솟구치는 수련의 디딤이다.
2. 쓸몬(貨): 재화(貨)를 우리말로 ‘쓸몬’이라 했다. ‘쓸모 있는 물건’이라는 뜻. 하지만 귀한 쓸몬은 사람의 욕(하고잡)을 부추겨 훔침질을 하게 만든다. 참된 삶을 위해서는 귀한 쓸몬을 높이지 말아야 한다.
3. 다시림(治): 다스림(治)을 ‘다시림’으로 풀었다. 이는 단순히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임(臨)함’을 뜻한다. 하느님의 뜻이, 혹은 텅 빈 마음이 이 땅에 다시 임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다스림이라는 뜻이다.
4. 븨임(虛): 마음을 비우는 것(虛其心)이다. 다석은 이를 ‘맘놓이’라고도 했다. 고픔과 앎으로 가득 찬 마음을 텅 비울 때, 비로소 참이 들어와 찰 수 있다. 다스림의 시작은 채움이 아니라 븨임(비움)에 있다.
5. 배(腹): 몸뚱이 배가 아니라, 산알의 숨이 모이는 ‘속알’ 혹은 ‘알짬’의 자리다. 마음은 비우고 배는 든든하게 채우는 것이 씻어난 이의 길이다.
6. 뼈(骨): 뼈를 튼튼하게 한다(强其骨)는 말에서, 뼈는 곧 ‘얼’을 뜻한다. 뜻은 부드럽게 하고, 삶을 지탱하는 근본인 얼의 줏대는 굳세게 세워야 함을 일러준다.
7. 빟(沖): 도(道)를 설명하는 ‘충(沖)’을 ‘빟’이라 했다. ‘비어 있다’는 뜻이자 ‘빈탕’이다. 텅 비어 있지만 끝없는 작용을 품고 있는 우주의 밑바탕이다. 고루고루 뚫려 있는 ‘빔’이다.
8. 씨우오라(用): 쓰임(用)을 ‘씨우오라’로 풀었다. 가온(中)을 씌운 것이 용이다. 씨알(씨)이 하늘(우)로 오르라(오라)”는 뜻을 담고 있다. 텅 빈 길의 작용은 마치 씨알이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것과 같다.
9. 잘몬의 마루(萬物之宗): 만물지종(萬物之宗)을 ‘잘몬의 마루’라 했다. ‘마루’는 등성이의 꼭대기이자 으뜸을 뜻한다. 모든 있꼴이 비롯된 근원이자, 돌아갈 고향이다.
10. 하웋님(帝): 상제(象帝)의 제(帝)를 ‘하웋님’으로 풀었다. 길(道)은 하느님보다 먼저 있는(象帝之先) 첫 뿌리의 있꼴을 말할 때 쓰인다. 텅 빈 ‘빟(道)’이야말로 하느님 앞자리에 놓이는 궁극의 실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