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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시대, 곳곳에서 수난 중인 조선 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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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태릉(泰陵)은 조선 중종의 세 번째 왕비인 문정왕후 윤씨가 잠든 곳이다. 2001~2002년 SBS TV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전인화가 연기한 인물이라고 하면 금세 알아챌 사람이 많을 듯하다. 그 태릉이 요즘 논쟁의 한가운데 섰다. 지난달 29일 국토교통부가 ‘도심 주택공급 확대 및 신속화 방안’을 발표하며 서울 노원구 공릉동 태릉골프장을 후보지에 포함시키자 오세훈 서울시장은 종묘 경관 저해를 이유로 국가유산청이 세운상가 재개발 계획을 반대한 사례를 들며 국가유산청과 국토부는 각각 다른 나라 정부인가”라고 따져 물었다. 오 시장은 국가유산청은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과 뚝 떨어진 세운지구 개발은 반대하면서 명백히 세계문화유산 영향 범위 안에 있는 태릉골프장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반대를 하지 않고 있다”면서 정부 기준이 무엇인지 대통령께서 명확히 정리해 달라”고 요구했다.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 꼽히는 정원오 성동구청장은 둘 다 세계문화유산 영향평가를 받고 그 결과에 맞춰 조정해 추진하면 된다”고 잘라 말하며 영향평가를 거부하는 서울시를 비판했다. 국토교통부는 세계유산 가치가 훼손되지 않도록 영향평가를 거쳐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가 잠든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 능침. (국가유산청 제공) 공릉동 지명은 공덕리와 태릉에서 한 글자씩 딴 것 공릉동이란 행정구역 명칭은 이곳에 공릉이란 무덤이 있어서 정해진 게 아니다.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 일대가 1963년 서울에 편입될 때 태릉동으로 정하려고 했으나 공덕리 주민의 반대가 많아 한 글자씩 따서 공릉동(孔陵洞)이라고 지었다. 한글로는 같고 한자가 다른 공릉(恭陵)은 예종비 장순왕후가 묻힌 곳으로 경기도 파주시에 있다. 태릉의 주인 문정왕후는 ‘조선의 측천무후(당나라 고종 황후이자 무주를 건국한 여황제)’로 불릴 만큼 조선의 역대 왕비 가운데 가장 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권좌에 오르기까지 우여곡절을 거쳤고, 권세를 누리는 동안에도 풍파가 그치지 않았다. 연산군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에게는 부인 신씨가 있었다. 남편을 따라 왕비가 됐으나 1주일 만에 폐출됐다. 아버지 신수근이 반정에 가담하라는 권유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궁에서 쫓겨난 뒤 인왕산 자락에서 남편을 그리며 살았다. 왕도 자신을 잊지 못해 종종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쪽을 바라본다는 말을 듣고 궁에서 입던 치마를 경회루가 잘 보이는 바위에 걸어두었다. 부부 금실이 좋아 생겨났다는 인왕산 치마바위의 전설과 달리 중종은 원비 말고도 계비 두 명과 후궁 9명을 두어 9남 11녀를 얻었다.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가 아들을 낳고 1주일 만에 산후병으로 숨졌다. 문정왕후가 궁에 들어왔을 때 입지는 불안했다. 전처가 살아 있어 복위 가능성이 남은 데다 친정 배경이 든든하고 왕자까지 낳은 후궁이 많아 처음에는 장경황후가 낳은 세자(인종)를 돌보는 데 힘썼다. 그러나 자신도 아들을 낳은 뒤에는 태도를 바꿔 남동생들을 중심으로 당파(소윤·小尹)를 만들고 세자를 핍박했다. 중종이 1544년 승하한 뒤 대비가 된 문정왕후는 인종에게 우리 모자를 언제 죽일 거냐”고 몰아세우는가 하면 살해를 기도하기도 했다. 인종은 재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단릉(單陵)임에도 가장 큰 문인석·무인석으로 위세 명종 등극으로 마침내 문정왕후의 세상이 왔다. 문정왕후는 아들이 20세가 될 때까지 수렴청정하던 9년간은 물론 명종의 친정(親政) 후에도 국사를 주물렀다. 첫해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大尹) 일파를 찍어낸 데 이어 이듬해 양재역 벽서사건을 빌미로 다른 왕족들도 제거했다. 1565년 세상을 뜬 문정왕후는 남편이 묻힌 강남구 삼성동 정릉으로 가지 못했다. 지대가 낮아 큰비가 내릴 때마다 물에 잠기는 데다 순회세자가 12세에 요절하는 등 안 좋은 일이 잇따르자 명종의 명에 따라 태릉에 홀로 묻혔다. 왕비가 홀로 묻힌 단릉(單陵)은 대부분 규모가 작은데 태릉은 문정왕후 생전의 위세를 짐작하게 하듯이 능역이 넓고 묘호도 남성적일 뿐 아니라 봉분 앞의 문인석·무인석도 높이 260㎝로 가장 크다.   태릉 봉분 앞에 혼유석과 장명등이 있고 좌우로 망주석, 문인석, 무인석, 석마가 세워져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훗날 사관은 문정왕후가 나라를 쥐락펴락한 것을 두고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라고 혹평하는가 하면 그의 신임을 업고 불교 부흥에 힘쓴 보우를 요승(妖僧)이라고 비난했다. 이 기록이 여성과 승려를 낮잡아보는 유림의 관점이라는 반론도 있다. 보우가 실시한 승과(僧科)에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합격해 임진왜란 극복에 앞장설 수 있었다. 문정왕후 위세에 눌려 ‘마마보이’로 지냈던 명종은 모후의 3년상을 마친 직후 세상을 떠나 태릉의 동쪽 언덕에 묻혔다. 명종이 먼저 묻힌 강릉(康陵)은 8년 뒤 인순왕후가 숨지면서 쌍릉(雙陵)으로 꾸며졌다.   명종과 인순왕후가 묻힌 강릉. (국가유산청 제공) 태릉을 잠식해 들어온 군 시설, 스포츠 시설, 학교 태강릉의 능역은 1938년 남쪽에 조선인 지원병훈련소가 들어서면서 줄어들기 시작했다. 문정왕후와 명종 내외가 편안히 잠들기 어렵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1946년 1월에는 육군이 모체로 삼고 있는 남조선 국방경비대가 훈련소 터에서 창설됐다.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대에서 출범한 군사영어학교도 2월 이곳으로 옮겨오고 폐교 후 세워진 국방경비대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가 자리 잡았다. 강릉 북동쪽 삼육대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가 1906년 평안남도 순안에 세운 의명학교가 기원이다. 1931년 신학과를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시조사 자리)으로 옮겼다가 일제 탄압으로 문을 닫았고, 1947년 재개교한 뒤 1949년 강릉 주변 임야를 매입해 이전했다. 서울위생병원(삼육대병원 전신)의 조지 루 박사가 이승만 대통령 주치의여서 헐값에 왕실 땅을 넘겨받았다는 의혹도 있다.   1961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계통의 서울여대가 1961년 태릉 남서쪽에 들어선 데 이어 1966년에는 태릉과 강릉 사이에 ‘엘리트 체육의 요람’ 구실을 해온 태릉선수촌이 세워졌다. 대한체육회가 태릉과 강릉 두 개의 이름을 놓고 고민하다가 누군가 정문에 가까운 쪽 이름으로 정하자”고 제안해 태릉선수촌으로 결론 내렸다는 일화가 있다.   1966년 설립돼 2017년 충북 진천으로 이전하기까지 51년간 엘리트 체육의 요람 구실을 했던 태릉선수촌. (연합뉴스) 태릉갈비가 유독 맛 좋기로 소문난 까닭 같은 해 육사 동쪽에 골프장이 문을 열었고 1971년 태릉과 서울여대 사이에 사격장이 입주했다. 이곳에서는 1978년 우리나라가 개최한 첫 번째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인 세계사격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이듬해에는 국제 규격의 400m 트랙과 제빙 시설을 갖춘 스케이트장도 처음으로 들어섰다. 이전까지는 동계 전국체전 스피드스케이팅 경기는 강원도 춘천시 공지천에서 치러야 했다. 사격장과 빙상장 바로 옆에는 수영장, 테니스장, 유스호스텔 등을 갖춘 우리나라 최초의 레저타운 푸른동산이 조성됐다. 태릉에 붙은 ‘국내 최초’의 타이틀은 한두 개가 아니다. 푸른동산 개장과 함께 이 일대는 서울 시민의 교외 나들이 장소로 탈바꿈했다. 주변에는 갈비집도 많았다. 소는 농사에 필수적인 가축이어서 조선 시대에는 함부로 잡을 수 없었으나 왕릉에서는 해마다 여러 차례 제사를 지내느라 소고기 요리가 발달했다. 사도세자(장조)와 정조의 융건릉이 있는 수원갈비, 명성황후(민비)가 잠들어 있던 홍릉갈비 등이 유명한 까닭이다. 특히 태릉갈비는 인근에 먹골배가 많이 나 고기 맛이 좋기로 유명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왕릉 40기는 곳곳에서 수난 중 2009년 6월 조선왕릉 42기 가운데 40기(태조 원비 제릉과 정종 후릉은 북한의 개성에 있음)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때 현지 조사에 나섰던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헌릉 앞 비닐하우스촌과 태릉의 선수촌·사격장·빙상장 철거를 요구해 약속받았다. 그러나 비닐하우스촌은 사유재산이란 이유로 방치돼 여전히 흉물처럼 경관을 해치고 있다. 태릉선수촌은 충북 진천으로 이전하고 사격장은 문을 닫았으나 빙상장은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전 후보지를 찾지 못한 상태다. 문정왕후와 명종 모자의 무덤 사이가 언제 회복될 수 있을지 기약하기 힘든 형편에 태릉골프장 자리에 아파트 6800가구를 짓겠다는 계획은 우려를 자아낸다. 태릉과 강릉의 경관을 해칠 가능성이 높을 뿐 아니라 역대 정부의 정책 기조와도 모순되고 그동안의 원형 회복 노력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0년에도 태릉골프장을 아파트단지로 개발하려다가 문화유산 훼손에 항의하는 시민과 교통체증을 우려하는 주민들의 반대로 거둬들인 적이 있다. 경기도 김포시의 장릉(章陵·인조의 부친 원종 무덤) 앞에 이른바 ‘왕릉뷰’ 고층아파트가 들어선다고 해서 뜨거운 논란을 빚은 것도 불과 5년 전이다.   태릉골프장 전경. 정부는 이곳에 6800가구의 아파트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연합뉴스) 되돌릴 수 없는 문화유적 훼손은 신중해야 집값 안정이 중요하고 택지 확보가 절박하다 해도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일단 아파트를 짓고 나면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선수촌이나 사격장 등은 그나마 공공시설이어서 철거가 가능했다지만 엄청난 비용을 감수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동구릉(東九陵) 다음으로 왕릉이 밀집한 서오릉(西五陵) 옆은 3기 신도시 고양 창릉 지구로 지정돼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고, 경종의 의릉(懿陵)은 한국예술종합학교 건물(옛 중앙정보부 청사)가 둘러싸고 있으며, 순조의 인릉(仁陵) 앞은 국가정보원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는 형편이다. 문정왕후의 남편 중종이 묻힌 강남 삼성동의 정릉이 거대한 빌딩군에 휩싸인지는 이미 오래다.   곡장 뒤에서 바라본 중종의 정릉. 석호와 석양이 호위하고 있고 맞은편으로는 고층빌딩이 늘어서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문정왕후의 삶은 파란만장했고 죽은 뒤에도 온갖 구설에 올랐다. 그러나 잠든 지 400여 년 만에 이토록 자신의 유택이 뜨거운 논란을 빚을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지하에서 이 사실을 듣는다면 무덤에서 뛰쳐나오고 싶지 않을까.   태릉 능침에서 바라본 조망이 시원하다. 오른쪽에 우람한 무인석이 서 있고 바로 앞에는 정자각이 보인다. (이희용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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