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로 착각한 아메리카를 착취한 콜럼버스 [국제] 세계 곳곳의 역사책 표지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얼굴이 있다. 돛을 활짝 펴고 수평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결연한 표정의 사나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 사람, 평생 자기가 어디 와 있는지도 모른 채 죽었다. 그래놓고 500년 넘게 신대륙을 발견한 위인 으로 떠받들어졌으니, 인류역사에서 이만큼 거대한 착각이 이만큼 오래 간 사례도 드물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초상화(위키피디아)
길 잃은 뱃사람, 그러나 확신은 넘쳤다
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제노바의 직물공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배를 탔고, 포르투갈에 정착해 항해술을 익혔다. 그의 머릿속엔 한 가지 야심이 있었다. 유럽에서 서쪽으로 곧장 가면 아시아, 그러니까 인도와 중국에 닿을 수 있다는 것. 당시 학자들 대부분은 지구가 둥글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콜럼버스가 정말 몰랐던 건 그 둥근 지구가 얼마나 큰지였다. 그는 실제 거리를 한참 과소평가했다.
1492년, 콜럼버스는 에스파냐 국왕 부부 이사벨 1세(Isabella I of Castile, 1451~1504)와 페르난도 2세(Ferdinand II of Aragon, 1452~1516)의 후원을 받아 산타마리아호를 비롯한 배 세 척을 끌고 대서양으로 나섰다. 그해 10월 12일, 지금의 바하마 어딘가에 상륙했다.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이곳을 인도 근처 라고 믿었다. 원주민을 인디언 이라 부른 것도 이 어처구니없는 확신에서 나왔다. 이후 1493년, 1498년, 1502년까지 세 차례 더 항해했지만, 그는 끝내 자기가 새로운 대륙에 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신대륙이라는 이름조차 그의 것이 아니다. 그가 죽고 한 해 뒤, 이 땅에 실제로 발을 디딘 또 다른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1454~1512)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 라 불리게 됐을 뿐이다.
이탈리아 제노바에 있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집으로,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을 18세기에 재건한 것. 원래의 건물은 1684년 제노바 포격 당시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위키피디아)
발견이 아니라 침탈이었다
문제는 길을 잘못 든 것 자체가 아니다. 콜럼버스가 도착한 히스파니올라 섬(지금의 도미니카공화국과 아이티)에서 벌인 일이 진짜 문제다. 그는 이 섬의 총독이 되어 원주민 타이노족을 강제노역과 조공체제에 몰아넣었다. 금을 바치지 못한 사람의 손을 자르고, 저항하면 학살하고, 유럽으로 끌고가 노예로 팔았다. 에스파냐 출신 선교사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Bartolomé de las Casas, 1484~1566)는 훗날 이 섬에서 벌어진 참상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 보고서가 묘사하는 풍경은 발견 이라는 단어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결국 콜럼버스는 자신이 임명했던 식민지 운영 실패와 폭정 혐의로 1500년 본국에 쇠사슬에 묶인 채 송환됐다. 발견자가 아니라 피의자로 끌려간 셈이다.
그럼에도 그는 죽기 전까지 끊임없이 왕실에 청원서를 보내 자기 몫의 부와 명예를 돌려달라고 매달렸다. 1506년 5월 20일,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쓸쓸히 숨을 거둘 때까지 그는 스스로를 정의로운 탐험가라 믿었다. 가해자가 스스로를 가해자로 인식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걸 콜럼버스만큼 잘 보여주는 사례도 없다.
콜롬보 지오비네토(Colombo giovinetto), 제노바 줄리오 몬테베르데(Giulio Monteverde)의 젊은 콜럼버스 조각.(위키피디아)
동상은 무너져도 신화는 끈질기다
20세기 들어 미국은 콜럼버스를 국가적 영웅으로 박제했다. 콜럼버스 데이가 만들어지고, 동상이 곳곳에 세워졌다. 그러나 2020년대 들어 인종차별과 식민주의에 대한 반성이 확산되면서 미국 여러 도시에서 콜럼버스 동상이 끌려 내려오거나 아예 치워졌다. 일부 지역은 콜럼버스 데이를 원주민의 날 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신화가 무너지는 데 500년이 걸린 셈이다.
여기서 한국이 곱씹어볼 대목이 나온다. 신화가 만들어지는 데는 한 세대로 충분하지만, 걷어내는 데는 한참이 걸린다는 점이다. 독재자 박정희(1917~1979)식 근대화 영웅 서사가 그 폭압의 기록과 함께 검토되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고, 지금도 일부는 그 신화를 다시 꺼내 들고 있다.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 역시 나라를 구하기 위한 결단 이라고 착각하고 잘못된 확신에 매달리고 있다. 콜럼버스가 죽을 때까지 인도에 도착했다고 믿었던 것처럼, 권력을 쥔 자의 확신은 현실과 무관하게 단단하다. 그 확신이 무너지는 건 본인 입에서가 아니라, 결국 역사의 기록과 후대의 평가에서다.
콜럼버스가 남긴 진짜 교훈은 이거다. 누군가 내가 옳다 고 끝까지 우긴다고 해서 그게 진실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우김이 만든 피해는 신화가 걷히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보인다는 것. 한국 사회가 지금 비상계엄의 책임을 끝까지 추궁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해자의 착각이나 확신이 아니라 가해와 피해의 기록이 역사가 돼야 한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콜럼버스도, 박정희도, 그리고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그 밤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알리프란도 카프리올리(Aliprando Caprioli)의 콜럼버스의 초상.(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