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린 먼로, 금발 여신의 가면 뒤 숨겨진 지성과 저항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1926년 6월 1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노마 진 모텐슨으로 태어나 1962년 세상을 떠난 여성이 있다. 세상은 그녀를 마릴린 먼로 라 부르고, 남성들의 시선은 그녀의 굴곡진 몸매에 머물렀으며, 자본은 그녀의 웃음을 병에 담아 팔았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다시 그녀를 소환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 ‘치마 들리는 사진’ 때문이 아니다. 그녀의 삶은 억압적인 체제 속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예술로 승화시키고, 동시에 그 체제에 균열을 냈는지 보여주는 처절한 투쟁기이자 고도의 풍자극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한국의 어느 신파극보다 더 신파극이었다. 정신병원을 드나들던 어머니 글래디스 먼로(1902~1984),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그리고 11곳의 위탁가정과 고아원을 전전하던 유년기. 16세에 결혼한 것도 위탁가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은, 지금 한국의 가정 밖 청소년들이 겪는 구조적 폭력을 떠올리게 한다.
1954년의 마릴린 먼로 (위키피디아)
‘백치 금발’이라는 가면을 쓴 전략가
1950년대 초반, 먼로는 백치 금발 역할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53년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 나이아가라 ,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방법 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그녀는 섹스 심벌로 자리 잡았다. 영화 제작자들은 환호했다. 관객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정작 먼로 자신은?
사람들은 내 가슴만 보지, 내 머리는 안 봐요.
당대 할리우드는 여성을 남성의 욕망을 투사하는 ‘빈 병’으로 취급했다. 먼로는 이 공장에서 찍어낸 가장 화려한 상품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백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대중이 원하는 환상을 정확히 읽어내고 그것을 연기한 철저한 기획자 였다.
그녀는 스스로를 극단적으로 대상화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남성들의 저열한 욕망을 거울처럼 비추었다. 그녀의 과장된 걸음걸이와 콧소리는 남성권력이 규정한 여성성 에 대한 일종의 조롱이었다.
극작가 아서 밀러(1915~2005)와의 결혼은 단순히 미녀와 야수 의 만남이 아니었다. 지성을 갈구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던 투쟁의 기록이었다. 그녀는 촬영장에서도 항상 도스토옙스키(1821~1881)의 책을 읽었으며, 연기 스튜디오에서 리 스트라스버그(1901~1982)로부터 체험연기법을 배우며 배우로서의 실존을 증명하려 애썼다.
그녀가 서른여섯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을 때, 세상은 비극적인 여배우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사실 우리가 잃은 것은 체제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한 인간의 가능성이었다.
1927년쯤 먼로의 유아 시절 (위키피디아)
가장 정교한 이미지 공장 한국과 외모 지상주의
이제 시선을 현재의 대한민국으로 돌려보자. 먼로의 삶은 현재 우리사회의 여러 단면과 기묘하게 닮아 있다.
한국은 성형 대국이라는 좋지 않은 이름을 얻고 있다. 10대 청소년들이 쌍꺼풀 수술을 생일 선물로 받는 나라. 능력보다 외모가 먼저 평가받는 사회. 먼로의 비극은 우리의 현재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이미지 공장 이다. 먼로가 겪었던 상품화 는 오늘날 SNS를 통해 전 국민의 일상이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전시하고,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보정된 삶을 산다. 먼로가 화려한 조명 뒤에서 수면제 없이는 잠들지 못했던 고독은, 좋아요 숫자에 일희일비하며 정서적 빈곤을 겪는 현대 한국인의 모습과 겹친다.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사랑받느니, 내 모습 그대로 미움 받겠다 던 그녀의 일갈은 성형과 보정으로 점철된 한국의 외모 강박에 서늘한 일침을 가한다.
1940년대 엽서 사진을 위해 핀업 모델처럼 포즈를 취하고 있는 먼로 (위키피디아)
정치적 올바름 과 이중잣대
먼로는 생전 흑인 가수 엘라 피츠제럴드(1917~1996)를 인종 차별하는 클럽에 항의하며 그녀의 공연을 성사시킨 인권옹호자이기도 했다. 1955년, 재즈의 여왕이 인종 차별 때문에 할리우드 최고급 클럽 모캄보에서 공연하지 못하게 됐다.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먼로는 클럽 주인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피츠제럴드를 무대에 세우면 내가 매일 밤 맨 앞자리에 앉겠다. 언론이 난리날 거다. 실제로 먼로는 공연 내내 매일 밤 맨 앞자리를 지켰다. 피츠제럴드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그 후로 나는 작은 재즈 클럽에서 공연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녀는 시대를 앞서간 특별한 여성이었다. 그리고 본인은 그걸 몰랐다.
1950년대 미국 민권운동 시기, 백인 슈퍼스타가 자신의 명성을 걸고 흑인 예술가를 지지한다는 건 커다란 위험이었다. 경력에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먼로는 했다. 나는 노예제도를 직접 아니까 흑인들이 좋다 고 그녀는 말했다. 고아원과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겪은 소외의 경험이 그녀를 소외된 다른 이들과 연결시켰다.
겉으로는 자유와 공정을 외치지만 속으로는 차별과 혐오가 팽배한 지금의 한국사회를 향해, 먼로의 이런 행동은 따끔한 풍자가 된다. 유력 정치인들과의 스캔들로만 소비되던 그녀가 사실은 매카시즘(1950년대 미국을 휩쓴 반공산주의 선풍)의 광풍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 했던 투사는 아니었을까.
마릴린 먼로가 첫 번째 남편인 제임스 도허티와 함께 한 사진, 1943년~1944년경. 두 사람은 먼로가 16세 때 결혼했고, 20세였던 1946년에 이혼했다. (위키피디아)
우리가 먼로에게 배워야 할 해학 과 생존법
지금 한국은 저출생, 양극화, 정치적 갈등이라는 삼중고를 겪고 있다. 이 삭막한 땅에서 먼로의 생애는 어떤 시사점을 줄까?
먼로는 대형 제작사 20세기 폭스의 노예계약에 맞서 스스로 제작사를 차렸다. 흥미로운 건, 먼로가 기득권을 깨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가 하는 점이다. 1955년, 그녀는 할리우드 최고 권력자 중 한 명이던 대릴 자눅(1902~1979)에게 정면으로 맞섰다. 계약을 거부하고 뉴욕으로 건너가 연기수업을 받았다. 기득권이 짜놓은 판에서 울기보다, 판을 엎으려 했던 그녀의 기지는 오늘날 양극화와 ‘갑질’에 신음하는 서민들에게 필요한 제3의 길 에 대한 영감을 준다. 복종할 바엔 차라리 사라지겠다 는 그녀의 기개는 굴종을 강요하는 시대에 필요한 덕목이다.
그녀는 소외된 이들과 연대했다. 갈등이 일상이 된 한국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누가 더 잘났나 를 따지는 잣대가 아니라, 서로의 결핍을 보듬는 먼로식 공감 이다. 그녀는 고아원을 전전하던 유년기에 대한 상처를 숨기지 않았고, 그 상처를 통해 타인의 고통에 접속했다.
1944년 데이비드 코노버가 라디오플레인 컴퍼니에서 촬영한 먼로의 사진 (위키피디아)
지하철 환풍구 위에서의 결단
영화 7년 만의 외출 (1955)에서 먼로의 흰 원피스가 위로 솟구칠 때, 사람들은 그녀의 다리를 보았다. 하지만 현재의 진보적 시민들은 그녀의 표정 을 보아야 한다. 억지로 웃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슬픈, 그러나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그 눈빛 말이다.
먼로는 자본주의 정점에서 소비되었지만, 결코 그 체제의 노예로만 살다 가지 않았다. 우리 역시 자본과 권력이라는 거대한 환풍구 위에서 치마자락을 붙잡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그 바람을 타고 비상할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다.
지금 대한민국은 먼로적 상황 에 처해 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곪아 터진, 누군가의 시선에 맞춰 춤춰야만 생존할 수 있는 기괴한 무대 위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엄숙주의가 아니다. 먼로가 보여준 것 같은 날카로운 위트와 자신을 던져 모순을 드러내는 기지다.
먼로가 남긴 말처럼 말이다. 불완전함은 아름답고, 광기는 천재적이며, 완전히 지루한 것보다는 완전히 우스꽝스러운 것이 낫다. 어쩌면 이 문장이 지금의 경직된 한국사회를 구원할 해학일지도 모른다. 지루한 도덕주의자들의 설교보다 때로는 광기 어린 웃음이 세상을 더 크게 바꾼다.
영화 7년 만의 외출 (1955)에서 사진작가들을 위해 포즈를 취하는 마릴린 먼로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