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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그 시절, 매 맞지 않는 농장 사슴이 부러웠다

그 시절, 매 맞지 않는 농장 사슴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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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순씨가 만일 시립아동보호소의 입소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면 아마 이런 느낌 아닐까. ‘처음 보호소의 철문 안으로 들어갔을 때, 누나의 손이 꼭 잡혀 있었다. 어린 손과 손이 서로를 붙들고 있었지만, 그 힘만으로 세상을 막아내기는 너무 작았다. 낯선 얼굴, 낯선 목소리, 낯선 규칙들. 시설은 보호의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감금에 가까웠다. 보호라는 이름 속엔 가정이 무너진 소리와 밤마다 서로를 찾던 울음소리가 들어 있었다.’ 몇 해가 채 지나지 않아 김종순씨는 다시 분리됐다. 5세 무렵, 관악구 소재 신림원으로 전원 조치되었다. 아이에게 행정은 늘 번개처럼 떨어진다. 예고도 없었고 설명도 없었다. 신림원의 하루는 일정표대로 흘렀다. 기상, 식사, 점호, 잠. 그러나 아이의 시간은 그렇게 흐르지 않았다. 누나는 입양 절차가 진행 중이었다가 취소되었다. 새로운 이름, 새로운 가정이 생길 뻔했던 서류들이 도로 접혀 서랍 속으로 들어갔으며, 몇 달이 지난 뒤 누나 역시 신림원으로 오게 되었다. 만나는 날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서로를 알아보는 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달려갔다. 서로의 몸에 얼굴을 묻었다. 말 대신 울음이 먼저 터졌다. 참았던 시간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아이들의 울음은 말보다 강했다. 잃어버린 세계가 품 안으로 돌아온 흐느낌이었다. 서로를 껴안고 한참을 놓지 못하던 두 아이의 체온이 눈물 속에 남아 있다.   1970년대 신림원의 원생들. 신림원에 들어간 첫날부터 아이들에게는 적응이 아니라 통과의례 같은 게 있었어요. 이름을 묻기도 전에 서열이 먼저 정해집니다. 그들끼리 만들어 놓은 등급은 누가 더 먼저 때릴 수 있는지가 순서였던 것 같아요. 보호라는 간판 아래, 아이들끼리 만든 또 다른 규칙이 작동하고 있었던 겁니다. ‘맞아야 강해진다.’ 선배들은 그렇게 말하며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그 말은 구호처럼 반복됐어요. 주먹이 날아왔고, 기합이 이어졌습니다. 잘못한 게 없다는 사실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만 빨리 배우게 됩니다. 울면 더 맞았고, 피하면 쫓아와 맞았고, 가만히 있어도 순서가 오면 맞아야 했습니다.” 잠자리에서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복도에서 들리는 고함과 울음소리는 밤마다 천장을 타고 내려왔다. 어른들은 모르는지, 모르는 척하는지, 개입은 없었다. 사고는 그런 와중에 벌어졌다. 5~6세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시설 주변에 고아원 소유의 밭이 있었어요. 밭일할 때 사용하던 연장이 가끔 흉기가 될 수도 있더군요. 선배가 휘두른 호미 끝에 머리를 찍혔어요. 비명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어요. 쓰러지고 세상이 소음으로 변하는 순간 정신을 잃었습니다. 피가 눈으로 흘러내렸고, 한쪽 시야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고, 몇 개월 입원. 붕대에 감긴 머리와 눈, 반복되는 소독약 냄새, 지독한 통증. 퇴원 후에도 치료는 길게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시력은 돌아오지 않았고, 한쪽 눈은 사시가 되어 희뿌연 형체로만 남아있습니다.” 지금도 그의 머리에는 흉터가 있다. 호미 끝이 지나간 자리가 ‘호미’처럼 그려져 있다. 물음표 모양의 상처, 지워지지 않는 표식, 설명되지 않은 폭력의 문장부호. 그러나 그 몇 마디로는, 한 아이의 시야가 절반으로 줄어든 사건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까지 함께 바뀌어버린 순간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 봄날의 신림원 뒷동산은 아카시아 꽃이 만발했어요.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하얀 꽃송이. 그 향기에 홀려 가지를 잡아당기던 추억은, 달콤한 꿀맛 대신 끔찍한 비명과 붉은 피로 가득합니다. 봄바람이 불던 어느 날, 나는 손이 닿지 않는 곳의 아카시아 꽃을 따기 위해 밧줄을 가지에 걸고, 있는 힘껏 잡아당겼습니다. 나의 몸무게와 밧줄의 탄성이 더해진 순간, 굵은 아카시아 가지가 부러졌어요. 그 힘에 못 이겨 그만 뒤쪽에 있던 나무 그루터기 위로 주저앉았습니다. 그루터기의 뾰족한 표면이 엉덩이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하반신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죠. 문제는 그 이후였습니다. 통원치료를 받고 있던 상황에서 선배에게 야구방망이로 다시 엉덩이를 얻어맞았습니다. 조심해야 할 상처가 다시 터져버린 것입니다. 지금도 제 엉덩이엔 참혹한 흉터가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그 때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사고과 구타의 여파로 참혹한 김종순씨 엉덩이 모습(현재) 신림원 뒤편에는 야산이 있었다. 건물의 담장을 돌아 나가면 바로 흙냄새와 풀 비린내가 뒤섞인 오솔길이 이어졌다. 낮에도 그늘이 먼저 깔리는 길이었고, 해가 지면 순식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밤이 되면 선배들은 종종 약수터에서 물을 받아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약수터로 가는 길은 사람 키를 넘는 잡풀 사이로 겨우 흔적만 있었다. 신발이 흙에 빠지고, 마른 가지가 발목을 잡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서로 긁히는 소리가 났다. 아이들은 그 소리를 누군가 따라오는 발자국처럼 느끼곤 했다.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지만,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가로등도 없었다. 물통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약수터를 갈 때면 늘 텔레비전에서 보던 전설의 고향이 떠올랐어요. 우물가, 산길, 갑자기 들리는 인기척, 하얀 옷을 입은 처녀 귀신, 드라마 속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내 발밑에서 벌어지는 일 같았어요. 움푹 꺼진 돌 틈에서 물이 졸졸 흐르고, 가까이 다가가면 물소리보다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들렸습니다. 물을 받는 동안에도 몇 번씩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습니다. 마치 누가 서 있는 것 같은 분위기 때문이었죠. 돌아오는 길은 더 멀게 느껴졌어요. 건물 불빛이 보이면, 발걸음이 한층 빨라집니다. 그 불빛은 안도감이자 또 다른 긴장이었습니다. 무사히 다녀왔다는 안심과, 혹시라도 물이 적다고 다시 받아오라는 말을 들을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입니다. 그 산길은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았고, 기록에도 없지만 그곳을 오르내렸던 내 기억 속에는, 언제나 가장 길고 어두운 길로 소환되고 있습니다.” 1985년, 신림원의 터전이 바뀌었다. 원장은 기존 부지를 매각하고 충남 부여의 외진 곳으로 시설을 옮겼다. 아이들에게는 이전 이유도, 과정도 설명되지 않았다. 새로 옮긴 곳의 신림원은 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신림원이라는 간판보다 사슴농장이 먼저 보였다. 아이들은 사슴의 눈망울을 부러워했다. 묶여 있는 건 서로 다르지 않는데, 사슴은 얻어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농장 주변에는 밤나무 숲이 펼쳐져 있었다. 가을이면 허기를 참지 못하고 몰래 밤을 주워 먹었다. 규칙을 어긴다는 걸 알면서도 손이 먼저 갔다. 배고픔은 규정보다 빨랐지만, 밤 몇 알을 주어먹은 값은 온몸으로 치러야 했다. 잘못의 질량보다 배고픔의 대가를 더 크게 느껴야 했고, 그 대가는 관리자가 휘두르는 폭력으로 이어졌다.   김종순씨의 학창시절 신체검사기록부. 폭력의 여파로 인해 초등학교 6학년 이후 오른쪽 시력이 0 에 머물러 있다. 부여 신림원 옆에는 원장의 별장이 따로 있었어요. 조경수로 둘러싸인 공간이었습니다. 그 주변을 꾸미는 일도 아이들의 몫이었어요. 산에서 느티나무 뿌리를 파내는 일은 어른에게도 버거운 작업이었지만, 아이들에게 삽과 곡괭이가 쥐어졌습니다. 학교에 가 있던 날에도 조퇴 처리되면서 강제 노동이 이어졌어요. 흙을 파고, 뿌리를 자르고, 나무를 끌어내다 보면, 손바닥이 벗겨지고 살갗이 낫이며 톱날에 찢기기도 했어요. 작업은 하루 종일 계속되었습니다. 점심시간도 일정하지 않았죠. 중노동과 배고픔과 탈진이 겹치면서 눈앞이 흐려지던 어느 날, 죽고 싶은 마음에 흙이며 나뭇가지 등을 마구 움켜쥐어 입에 넣었어요. 결국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죽으려던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대신 복부에는 또 다른 수술 자국이 흉측하게 남았습니다.” 머리와 엉덩이에 이어 손목과 복부까지 지금도 그의 몸엔 온갖 흉터와 상처로 가득하다. 심지어 심부름 때문에 고아원 주방에 들어가 데인 화상자국도 그가 폭력에 시달린 과거를 증명하고 있다. 밥은 정부미였어요. 냄새가 심하고 찰지지도 않아 날아다니는 듯 하는 밥이었습니다. 한참 성장기인데다 좋은 음식을 먹었던 것도 아니어서 늘 배가 고팠죠. 선배 한명은 소화기 계통이 좋지 않아 가끔 구역질을 하기도 했는데, 그는 그 음식을 뱉지 않고 삼키면서 소처럼 되새김질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옷은 늘 부족했고, 신발은 한 켤레라서 찢어지고 너덜거릴 때까지 신고 다녔어요. 선배들 옷을 물려 입기도 했고, 후원자가 다녀간 날에야 새 옷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새 신발을 받으면 옷장에 숨겨놓아야 잃어버리지 않았어요. 후원물품이라도 나눠주는 날에는 선배에게 빼앗기는 게 다반사였죠. 한 번은 서울시장 염보현의 이름이 찍혀있는 과자세트를 창고에 보관하다가 상해서 버린 경우가 있었는데, 일부 아이들은 그 중 괜찮은 것을 찾아서 주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썩어서 버릴지언정 고아들에게는 주기 싫었나 봅니다.” 관악구 신림원 시절인 중 1 때, 엄마가 찾아왔다. 부여로 이사가 확정되었다는 것을 알고 찾아왔을 것이라 김종순씨는 추정하고 있다. 부모의 존재를 처음으로 확인하던 순간이었다. 성인이 되어 부모찾기를 시도하며 방송에 출연 신청도 해봤지만 다시는 엄마를 만나지 못했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엔 부여 신림원으로 아버지가 찾아왔다. 비로소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부모님은 결혼 10년 만에 헤어졌으며, 김종순씨와 그의 누나를 시설에 맡긴 채, 새로운 인생을 찾아 엄마는 떠났고, 아버지는 형을 홀로 키우고 있었다. 그날 처음으로 형의 존재를 알았다. 아버지와 형은 하월곡동의 달동네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다. 왜 나를 고아원에 맡겼느냐는 원망조차 할 수 없었다. 부여농고를 졸업할 무렵 학교 교사의 추천으로 창동에 있는 섬유 공장에 취업했어요. 그리고 지금도 섬유업계에서 종사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기숙사에서 숙식을 해결했습니다. 월급이 제때 나오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묵묵히 참고 일했습니다. 월급을 받으면 그대로 은행에 입금했는데, 통장에 돈 쌓이는 재미가 쏠쏠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믿었던 공장 동료가 통장 비밀번호를 알아내고는 은행에서 돈을 빼갔습니다. 배신감이 상당했죠. 아마 제가 고아원 출신이라 만만하게 봤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어요. 시설을 퇴소하면 정착금을 줘야하는데, 당시 관리자들이 말을 해주지 않으니, 정착금제도가 있는 줄도 몰랐어요. 알려준 선배가 정착금을 받아내야 한다고 하더군요. 정착금 60만원을 퇴소 몇 년이 지난 후 겨우 받았습니다. 서울 신림원을 매각한 차익과 아이들에게 가야할 지원금을 착복하여 원장은 호의호식하다 결국 횡령 등의 사건으로 감옥신세를 졌고, 신림원은 퇴소하고 몇 년 후 폐쇄되었습니다.”   고아수용시설에서 자행된 폭력에 대해 규탄기자회견을 벌이고 있는 피해자와 관련단체 회원들. 성인이 되면서 이름과 생일, 빼앗겼던 자신의 기록을 되찾고 싶었다. 시설에서 임의로 만든 이름을 버리고, 아버지 도움으로 본명을 되찾는 절차를 밟았다. 서류를 바꾸는 일이 복잡하긴 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주민등록 정정이 완료된 날, 그는 종이 한 장을 한참 들여다봤다. 자신의 삶이 비로소 제 자리를 찾은 순간이었다. 시설에서 지어준 김종필을 본명인 김종순으로, 생년월일도 1972년 11월에서 1972년 5월로 되찾으며 자신의 기록을 회복했다. 한편, 어린 시절 머리를 호미에 찍혀 망가진 눈을 그대로 두고 싶지 않았다. 모은 돈이 쌓일 때까지 몇 년이 걸렸다. 수술비는 그에게 집 한 채 값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사시는 교정되었지만, 시력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원망의 유통기한은 만료되었고, 눈동자만이라도 제자리에 돌아왔음을 감사할 뿐이다. 심성이 고운 김종순씨는 어느 덧 50대 중반으로 접어들었다. 소수지만 뇌리에 깊이 박혀있는 선배들, 고아원에서 후배들을 괴롭히고 폭력을 휘둘렀던 그들을 이미 용서한지 오래다. 심지어 호미 테러를 가했던 선배를 향해서는 자신보다 처지가 훨씬 안타깝다며 그를 돕는 일조차 마다하지 않고 있다. 그 당시 선배들 또한 잘못된 제도와 국가폭력이 낳은 피해자라는 생각 때문이다. 2월 26일이면 진화위 3기가 공식 출범한다. 새로운 ‘과거사정리 기본법’에는 입양알선기관, 사회복지기관 등 집단수용시설 피해자도 국가폭력의 범주에 포함시켜 본격적인 인권침해 조사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지 8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시설폭력으로 고통 받았던 고아들의 한과 눈물을 국가가 나서서 닦아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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