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에 관한 글만 쓰고 읽고 생각한 블라디미르 레닌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온종일 혁명만 생각하고, 혁명에 대한 글만 쓰고, 혁명에 관한 글만 읽는 사람이 어찌 집권할 수 없었겠소. - 옛 동료 율리 마르토프(1867~1923)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1870~1924), 본명 울리야노프. 1870년 러시아 제국 심비르스크에서 태어난 이 사람은 후일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를 세운 혁명의 아버지 로 불린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프롤레타리아트(노동자계급)의 영웅이 평생 육체노동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버지 일리야(1831~1886)는 장학관이었고, 어머니 마리아(1835~1916)는 독일계 귀족 출신이었다. 집에는 하녀까지 있었다.
노동자를 위한 혁명가 가 사실은 귀족 집안의 공부만 하고 싶은 아이였다는 건, 칼 마르크스(1818~1883)와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도 평생 공장 바닥을 밟은 적 없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혁명의 아이러니는 항상 시작이 이런 식이다.
어린 레닌은 공부 잘 하는 모범생이었다. 그런데 1887년, 17세 소년의 삶을 바꾸는 사건이 일어난다. 큰형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1863~1887)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1845~1894)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연루되어 체포되고, 21세의 나이로 사형당한 것이다. 평소 형을 따르던 17세 소년이 형의 죽음을 보고 눈이 바뀌었다. 이후 카잔대학 법학과에 입학했지만 같은 해 불법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제적당한다. 이건 한국에서 학생운동 하다가 제학당한 것과 다를 바 없는 경험이었다.
1920년의 레닌 (위키피디아)
시베리아에서 책을 읽고 아내를 얻은 남자
1895년 레닌은 혁명조직에 적극 참여하면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당한다. 5년간의 유배. 길고 긴 시베리아의 겨울 속에서 이 사람이 한 일은 무엇이었냐고? 책을 읽었다. 그리고 책을 썼다. 1898년 유배지에서 동료혁명가 나데즈다 크룹스카야(1869~1939)와 결혼하고, 같은 해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연구서를 출판한다. 유배지가 연구소가 된 셈이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일제 감옥에서 독립선언문을 쓰고 민족주의 사상을 가꾸었던 것과 비슷한 이야기라면, 그 결과의 성격은 달랐지만 억압 속에서 생각이 단단해진다 는 패턴은 동일하다.
1900년 석방되면서 레닌은 본격적으로 혁명이론의 대표적 목소리로 성장한다. 1903년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 대회에서 당내 온건파 멘셰비키와 강경파 볼셰비키로 분당되면서, 레닌은 볼셰비키의 지도자가 된다. 전업 혁명가 를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혁명은 아마추어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의 인생자체가 그 주장의 산 증거였다.
세 살 때의 레닌(왼쪽)과 그의 누이 올가 (위키피디아)
1917년, 드디어 역사를 뒤집었다
1905년 1월 피의 일요일 사건과 그 이후의 실패로 레닌은 다시 해외로 떠난다. 1907년부터 주로 스위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한다. 그리고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 속에서 러시아제국은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1868~1918)의 무능한 통치로 완전히 무너진다. 2월(구력) 혁명으로 왕조가 무너지고 임시정부가 들어오는데, 이때 레닌은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를 타고 스위스에서 귀국한다. 독일이 왜 러시아 혁명가를 도와주었냐고? 간단하다. 러시아가 내부에서 무너지면 독일에게 유리하다는 계산이었다. 이건 냉정한 지정학이지, 우정이 아니었다.
레닌이 귀국한 후 6개월 만에 10월 혁명이 일어난다. 1917년 11월 7일(구력 10월 25일). 케렌스키(1881~1970)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정권을 세운 것이다. 빵과 평화 를 약속한 혁명. 제대한 군인과 굶주린 백성들에게는 그 약속이 곧 희망이었다. 이것도 한국역사와 비교하면 흥미롭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민중들도 독립의 꿈과 함께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언어에 귀를 기울였고, 그 영향이 실제로 조선 땅까지 닿았다.
1895년 블라디미르 레닌이 체포됐을 때 경찰 사진 (위키피디아)
조선과의 연결, 이동휘와 레닌의 만남
레닌이 세운 공산주의 운동의 국제 연합망인 제3 국제공산당을 1919년 3월에 창설하면서, 조선 독립운동가들도 여기에 영향을 받았다. 1918년 연해주에서 조선인들이 세운 한인사회당이 바로 그 증거다. 그리고 이동휘(1873~1935).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였던 이 사람은 1921년 모스크바로 가서 레닌을 직접 만난다. 레닌은 조선 독립운동에 200만 루블을 지원하고, 한편으로는 조선인들에게 공산주의 혁명 전에 민족독립과 민주혁명을 먼저 해야 한다 고 조언하였다. 이동휘 자신도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고 스스로 고백한 적이 있다. 독립을 위해 사용 가능한 모든 무기를 손에 잡은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한국 진보운동에서도 생각해볼 점을 준다. 이동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독립이라는 목표를 위해 외부의 힘과 연대한 것인지, 아니면 이념 자체에 귀를 기울인 것인지의 경계는 당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항상 불분명했다. 그리고 그 불분명함은 오늘날 우리가 진보와 민주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레닌(가운데)이 1897년 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투쟁동맹의 회원들과 함께 있는 모습 (위키피디아)
혁명가의 마지막은 스탈린의 권력욕 경고
레닌이 남긴 가장 소중한 유산은 어쩌면 혁명자체가 아니라, 죽기 직전에 남긴 경고였을 수도 있다. 1918년 8월 30일, 레닌은 사회혁명당원 파니 카플란(1890~1918)의 총기 저격을 당하여 중상을 입었다. 총알이 몸에 박혔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런데 그 총알은 무려 4년 후에야 제거되었고, 그 후유증과 누적된 과로가 레닌의 몸을 갉아먹었다.
1922년 5월에 첫 뇌졸중이 발작하고,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다. 죽기 직전까지 레닌은 후임자 문제에 깨달음을 얻었다. 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의 세력이 당 내에서 비정상적으로 강해지고 있었고, 레닌은 유서에서 스탈린의 편집광적인 권력욕 을 경고하며 그의 사임을 촉구했다. 그러나 그 유서는 스탈린이 철저히 은폐하였다. 1924년 1월 21일, 레닌은 54세로 세상을 떠난다.
스탈린은 이후 레닌의 시신을 방부처리하여 붉은 광장 지하에 안치하고, 레닌을 신격화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그리고 이후 수천만 명의 죽음을 불러온 스탈린주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레닌이 경고한 바로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1890년의 레닌 (위키피디아)
민주적 토론과 견제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줘
레닌의 이야기를 오늘 한국에 비추면 여러 면이 보인다. 첫째, 혁명을 원하는 사람은 혁명을 위해 스스로를 만들어야 한다 는 레닌의 신념. 오늘날 한국 진보운동에서도 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회를 바꾸려면 단순히 불만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조직하고 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레닌의 신경제정책(1921년)에서 배울 수 있다. 러시아혁명 후 경제가 무너지면서 레닌은 자본주의적 요소를 제한적으로 도입하여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현실에 맞게 유연하게 대응한다 는 이 접근은 오늘날 진보세력이 경제정책을 세울 때 생각해볼 교훈이다. 원칙과 현실 사이의 균형은 너무나 중요하다.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레닌의 스탈린 경고다. 어떤 운동이든,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집중되면 그 운동 자체가 왜곡된다. 이것은 좌파와 우파를 구분할 필요 없이, 모든 정치적 운동에 해당하는 보편적 진리다. 한국정치에서도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패턴이며, 단일 리더에 대한 맹목적 의존보다는 민주적 토론과 견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레닌의 비극적 유산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이삭 브로드스키가 그린 레닌의 장례식, 1925년.(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