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교육혁명을 위한 심서(心書) [교육] 공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던 곽노현의 신간 『학교 교육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는 진보교육감 시대 15년간에 대한 치열한 고뇌와 모색의 결과물이다. 저자 자신이 주도했던 진보교육에 대한 깊은 성찰이자, 위기에 직면한 공교육을 향해 던지는 담대하면서도 정교한 개혁의 설계도다.
지난 진보교육감 시대가 방향은 옳았으나 체감적 변화가 미흡했다고 저자는 냉철하게 진단하면서 그에 대한 처방과 청사진을 제시한다. 교육계의 해묵은 과제부터 미래 교육의 의제까지 전방위로 다룬다.
저자는 학생인권조례 폐지 움직임과 학교의 사법화, 인공지능과 기후위기라는 복합적 도전 앞에서 우리가 지켜내야 할 교육의 본질을 다시 묻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교육을 단순한 수업기술이나 생활지도의 영역을 넘어 사회구조를 바꾸는 정치적·제도적 기획으로서의 교육개혁론을 현장의 언어로 풀어낸다. 그가 이 책을 통해 말하려는 것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집약되는데, ‘공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헌법적 가치를 내면화하고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 주권자를 길러내는 일이라는 게 그에 대한 저자의 답이다. 그래서 학교는 부모의 운명을 물려받는 통로가 아니라 제 몫의 삶을 개척하는 기회의 터전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곽노현 저 『학교교육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의 표지.
그러나 지금 우리 교실의 현실은 무한 경쟁에 지쳐 잠들거나 차가운 법 논리에 휘말려 교육적 성찰을 잃어가고 있다. ‘자치와 인권의 공간’에서 멀어지고 있다. 오늘의 교육 현장에서의 ‘교실의 붕괴’를 그는 잠자는 교실, 떠드는 교실, 자해하는 교실 이라는 3중 병리로 압축한다. 입시 경쟁에 지쳐 배움의 끈을 놓은 잠자는 교실 , 기본 질서가 무너진 떠드는 교실 , 불안과 무기력이 극단으로 표출된 자해하는 교실 이다. 현장 교사라면 누구나 체감하는 현실이지만 저자는 이를 개인의 일탈이 아닌 시스템의 실패로 진단한다. 이는 극소수의 승자만을 골라내는 한 줄 세우기식 입시 경쟁과 관료주의적 통제가 결합해 만들어낸 필연적 오작동의 결과라고 본다.
예컨대 저자는 매년 천문학적 규모의 교육 예산과 사회적 기회비용이 수포자(수학포기자) 양산 구조 속에 허비되고 있음을 구체적인 숫자로 고발한다. 전국의 100만 수포자가 매일 교실에서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는 연간 2억 시간의 청춘, 이로 인해 발생하는 연간 1조 6천억 원의 세금 손실과 학부모들이 쏟아붓는 매몰 사교육비는 국가적인 재앙이자 미래 세대에 대한 범죄다. 이 낭비적인 ‘수학 지옥’을 정면 돌파하는 방안으로 저자는 고교 수학의 선택과목 분할 및 학점제 전환, 수학 교과 시간의 대폭 축소라는 혁명적 발상 전환을 제시한다. 인공지능이 고도의 수학적 연산을 대신하는 시대에,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계적인 문제 풀이 기술이 아니라 논리적 사유와 데이터 문해력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구글과 파파고로 대변되는 실시간 자동통번역기 시대에 발맞춰, 더 이상 국가적 경쟁력이 될 수 없는 강제된 영어 암기 교육 방식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변별만을 위한 영·수 중심의 입시 제도를 허물고, 그 자리에 세계시민교육과 비판적 주체성을 길러주는 미디어 문해력, 그리고 기후위기 시대의 모든 존재와 연결되는 생태적 감수성을 채워 넣어야 한다는 것이 대한민국 최초의 진보교육감이자 혁신교육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연 저자가 생각하는 확고한 처방이다.
교육혁명의 힘은 어디서 나올 수 있을까. 성공한 혁신학교의 사례가 증명하듯 공교육 현장의 무기력의 사슬을 끊어내는 힘은 교사들의 자발적인 협력문화와 집단지성에서 나온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교사 1인의 고군분투로는 무너진 교실 문화를 바꿀 수 없지만, 학년과 교과를 넘어 교사들이 집단효능감을 높일 때 비로소 학생 중심, 배움 중심의 생생한 교실 혁명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자율과 참여를 보장하면서도 공동체적 책임의식을 함께 일깨워주는 민주시민 의식의 내면화, 그것이 바로 저자가 제시하는 공교육 정상화의 첫 번째 이정표다.
‘아래로부터의 교육과정 다원화’에서 교실을 바꾸는 근본적인 동력이 나올 수 있다. 국가가 획일적으로 정해준 교육과정을 기계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는 다변화되는 미래 사회의 주역을 길러낼 수 없다는 지적이다. 현장의 교사들이 주체적인 ‘교육과정 개발자’로서 지역의 특성과 학생들의 필요에 맞는 살아 있는 교육과정을 설계할 수 있도록, 교사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제도적으로 전면 보장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저자는 교육부의 특별교부금이라는 쌈짓돈 이 지방교육자치를 무력화하는 핵심 수단으로 기능해왔음을 고발하고, 교장에게 무조건적 복종을 강제하는 제왕적 교장 승진제도 를 학교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는 주범으로 지목한다. 교사를 교무행정과 공문 폭탄에서 해방시키는 교원업무 정상화 를 개혁의 황금열쇠로 제시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최근 교육 현장의 가장 뼈아픈 실상 가운데 하나는 갈등이 생겼을 때 교육적 성찰과 화해 대신 변호사부터 찾고 소송전으로 치닫는 이른바 학교의 사법화 다. 차가운 법 논리와 징벌적 사법 만능주의가 교실을 지배하는 순간, 갈등을 통해 성숙을 배울 아이들의 기회는 원천 봉쇄된다.
저자는 이에 대한 근본적 해법으로 학생자치 처리, 회복적 정의, 방관자 교육 이라는 3원칙을 제시한다. 갈등 해결의 권한을 어른들이 독점해 법정 공방으로 키우지 말고, 교실 안의 생활 전문가인 아이들의 집단지성과 학생자치법정에 맡기자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의 가장 큰 교육적 교훈이 권위에 대한 맹종 과 침묵 이었음을 환기하며, 불의에 가만 있지 않는 강한 민주시민 을 키워내야 한다는 그의 선언은 공교육의 목적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다시 묻는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이자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는 왜 학교가 시민으로의 제2의 탄생을 돕는 산실이 돼야 하는지를 역설한다. 민주제도와 기구는 민주시민성의 뒷받침을 받아 끊임없이 충전돼야 하며, 그래야만 허약하지 않은 견실한 민주주의에 필요한 주권자적 시민이 길러질 수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학교에서 실제로 체득하는 가치는 민주주의라기보다는 엘리트주의와 능력주의 경쟁주의 시장주의 국가주의 권위주의다.”
저자는 민주시민성 교육에서 공교육의 실패는 곧 한 나라의 민주주의 실패로 이어진다면서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으로 충전되지 않으면 좀비처럼 ‘살아 있는 송장’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학교를 살아 있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체험학습장으로 바꿔내지 못하면 민주주의와 민생의 미래, 진보의 미래란 없다.”
이 단호한 선언은 이 책이 저자의 삶의 경로의 결과물이며, 그 삶의 이력이 또한 이 책의 배경이 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교육학자가 아니다. 노동법과 인권법을 전공하고 강의한 법학자였고, 삼성 경영권 편법상속 고발운동을 이끈 활동가였으며,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위원과 사무총장을 지낸 제도 안팎의 실천가였다. 강자를 법의 지배 아래, 약자를 법의 보호 아래 라는 그의 평생 화두는 교육감이 된 뒤에도 바뀌지 않았던 것은 물론 한 결실로 나타났다. 교육이야말로 그 화두를 가장 근본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영역임을 교육감 재임 시절 확인했던 듯하다.
교육감이 되자마자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이 체벌 금지와 학생인권조례 제정이었던 것도 그 화두의 학교현장에의 적용, 학생은 교육의 객체가 아니라 권리의 주체라는 믿음의 산물이었다. 친환경 무상급식 역시 같은 맥락이다. 밥상 앞에서 가난을 드러내야 하는 아이, 급식비 미납 명단이 붙는 교실. 그것은 복지 정책 이전에 존엄의 문제였다. 인사·사학·시설·구매 등 모든 교육행정에서 시민참여와 투명성을 강화한 것도 마찬가지다. 교육 관료제를 시민의 통제 아래 두겠다는 것, 그것은 강자를 법의 지배 아래 라는 그의 오래된 신념이 교육행정으로 번역된 형태였다. 교육이 더 이상 부모의 배경을 물려받는 계급재 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선언 역시 경제민주주의 운동을 함께 이끌었던 그의 이력과 겹친다.
교사의 정치기본권 보장 주장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50만 교사를 투명인간으로 만드는 정치 중립 규범을 정면으로 문제 삼고, 교사가 정치적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민주시민을 육성하겠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라는 논리다. 장애인 탈시설운동, 내놔라 내 파일 국정원 개혁운동 등 그가 평생 함께한 운동들과 같은 궤적이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이들은 한결같이 저자의 짧았던 교육감 재직에 대해 적잖게 애석해하는 심경을 나타냈다.
교육계 출신이 아니면서 교육행정을 경험한 사람이 갖는 새로운 통찰과 발상, 현장의 언어로 풀어낸 실전형 교육개혁론이 독보적이었다”
그에게 교육감의 기회가 또 주어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서 누군가 이 책을 읽어 그를 대신해 새 길을 열기를”
이 책을 특별하게 하는 하나의 이유는 추천사에서도, 저자 자신도 말한 것처럼 그가 어느 자리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으면서 평생 그 경계들을 오갔기 때문일 수 있다. 현장에 충실하되 현장 너머를 보는 시야, 그것이 이 책이 교육 담론을 교육 관료제의 장막 너머 사회구조와 정치적 시민권의 영역으로 대폭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 스스로 서두에서 자평하듯 이 책의 글들은 학술적인 글보다 현장성이 강하고 운동가의 글보다 대안모색이 풍부하며 정책보고서보다는 뜨거운 공분이 살아 있다.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를 쓴 것은 유배지 강진에서였다. 심서(心書) 라는 제목은 다시 목민관이 돼 백성을 직접 다스리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는 처지에서 마음으로만 쓰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목민관의 자리를 얻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 거리가 오히려 전체를 보게 했고 현실 너머의 현실 을 제시했다.
이 책을 그와 같은 심서 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기에 진보교육감 10년을 지탱한 정책적·상상적 토대였던 곽노현의 교육개혁을 오늘의 교실이 이어받아야 할 현장 중심의 실천교육학으로 다시 호명하고 있다”는 추천사(정용주 서울 천왕초 교장)처럼, 미완으로 남은 교육개혁을 오늘의 과제로 이어받기 위한 제안서로 이 책을 읽을 이유가 거기에 있다. 동의 여부를 떠나, 대한민국 교육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이 책이 던지는 질문들을 피해 갈 순 없을 것이다. 이명재 에디터 promes6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