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 김창숙과 박정희의 친일 콤플렉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권한대행(왼쪽)이 메디컬센터에 입원한 김창숙을 문병하고 있다. (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1962년 5월 5일 오전 9시 서울 을지로6가 메디컬센터(현 국립중앙의료원) 15병동 10호실. 군복 차림의 박정희가 군모를 손에 들고 병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눈을 감은 김창숙은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 모로 누워 있다. 당시 45세의 박정희는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고, 호가 심산(心山)인 김창숙은 83세로 독립유공 최고등급 서훈자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였다.
이 장면을 담은 사진을 두고 일각에서는 꼿꼿한 성품의 김창숙이 일제 만주군 장교 출신의 박정희를 보기 싫어 돌아누웠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김창숙이 의식불명 상태였다는 반론이 나오자 의식이 있었다면 만남 자체를 거절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심산김창숙기념사업회 홍윤정 학예실장은 박정희 의장이 대동한 사진사가 촬영했고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언론에 배포했다는 점에서 심산 선생이 일부러 외면해 돌아누운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여러 정황을 종합하면 마주 보는 장면을 찍으면 한 사람은 뒷모습이 담기게 돼 그런 구도로 촬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친일과 좌익 전력 얼룩진 권력자의 문병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쿠데타로 집권의 기틀을 닦은 박정희의 가장 큰 약점은 친일과 좌익 전력이었다. 미국이 자신에게 품고 있던 좌익 연루 의심을 씻기 위해 그는 혁명 공약 제1조로 반공을 내세우는가 하면 북한이 보낸 형(박상희)의 친구 황태성을 만나주지도 않은 채 간첩 혐의로 사형시켰다. 독립유공자를 서훈하고 순국선열 동상을 세우는 것 등은 친일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려는 수단이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 경력을 앞세워 초대 대통령이 됐음에도 친일 반민족행위자 척결을 방해하고 독립유공자 서훈에도 소극적이었다. 1949년 4월 27일 건국공로훈장령을 제정 공포한 뒤 그해 광복절에 자신과 이시영 부통령 두 명에게 1등 건국공로훈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셀프 서훈’한 이후 외국인에게만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했다.
박정희는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독립유공자 서훈에 나서 이듬해 삼일절에 208명을 서훈했다. 김창숙과 함께 이준, 안중근, 김좌진, 안창호, 손병희, 윤봉길, 한용운, 김구, 신익희 등은 그제서야 비로소 건국훈장 중장(重章)을 받을 수 있었다. 정부수립 이후 14년 만이었다.
김창숙이 받은 건국공로훈장증에는 대통령 윤보선, 내각수반 송요찬, 내각사무처장 김병삼의 이름이 적혀 있지만 당시 최고 실권자인 박정희가 수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윤보선은 쿠데타 세력의 압박에 따라 1962년 3월 22일 대통령직에서 사퇴하고 박정희가 권한대행을 맡았다.
김창숙의 심신이 건강했다면 박정희가 주는 훈장을 단호히 거절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언론인도 있다.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김창숙은 일본에 투항했거나 동지를 배신한 무리가 포함돼 있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대원로(大元老)가 빠져 있어 감히 상을 받을 심정이 안 난다”며 상훈 대상의 수정을 요청하긴 했으나 박정희 의장이 모처럼 이런 용단을 내린 것은 고맙게 여긴다”고 밝혔다.
최고의 예우 갖춰 ‘선각자’요 ‘직언거사’를 보내다
박정희는 김창숙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자 3월 26일 위문금 20만 환과 화분을 보냈다. 5월 5일 문병했을 때는 메디컬센터 원장에게 치료를 정성껏 해달라고 당부한 뒤 아들 김형기 씨에게 치료비를 모두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말했다.
5월 10일 김창숙이 운명하자 박정희는 조사를 발표해 이 위대한 선열의 서거를 듣고 다시 한번 이 나라 이 민족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을 느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창숙이 공직을 맡고 있지는 않아 사회장(社會葬)으로 치르되 국민장(國民葬)급으로 예우하기로 하고 자신이 장의위원회 고문을 맡았다.
18일 장례식에서는 새로운 국가 건설에 여념이 없는 이 비상시국에 선각자요 직언거사(直言居士)인 선생과 같은 지도자를 여의게 된 것을 한없이 애통하게 생각한다”고 추모했다. 1974년 3월 25일 김창숙의 고향인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에 건립된 김창숙선생기념관 현판도 박정희가 썼다.
박정희가 이토록 김창숙에 진심이었던 것은 그가 온 국민의 사표(師表)가 될 만한 면모를 두루 갖추고 있는 데다 이승만과 대립하고 김일성도 반대해 자신이 내건 ‘민족정기 재건’과 ‘반공 태세 강화’ 공약에 맞춤한 인물로 여겼기 때문이다.
김창숙 선생 빈소를 찾아 분향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권한대행. (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민족대표 33인에 유교 대표 빠진 것 부끄럽게 여겨
김창숙은 1879년 7월 10일(음력)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이고 5남매 중 외아들이었다. 아버지 김호림은 유학자면서도 반상(班常)의 구별을 고집하는 고루한 선비가 아니어서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다. 6살 때부터 글을 배워 신동 소리를 들었고 정은석, 이승희, 곽종석 등을 스승으로 모시며 학문을 익혔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을사오적을 처단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1909년 ‘일진회 성토 건의서’의 서명 작업을 주도했다가 8개월간 구금되는가 하면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신학문을 가르치는 성명(星明)학교를 세웠다.
유림 독립운동가를 대표하는 심산 김창숙 선생. (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1919년 3·1운동을 앞두고 광무 황제(고종) 인산(因山·국장) 때 모종의 일을 일으키려 하니 상경하라”는 친구 성태영의 편지를 받았으나 어머니가 몸져 누워 당장 올라가지 못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에 개신교, 천도교, 불교 대표는 있고 유교 대표가 없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유림의 뜻을 모은 독립청원서를 그해 1월부터 프랑스에서 열리고 있던 파리강화회의에 전달하기로 했다.
장석영이 한문으로 작성한 파리장서(巴里長書) 초안을 곽종석과 김창숙이 다듬은 뒤 영남 유림 100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 나중에 문제 될 경우를 대비해 한 집안에 한 명만 서명했기 때문에 수천 명이 함께한 셈이었다. 충청도 유림 10여 명도 뒤늦게 참여해 연서인(連署人)은 137명으로 늘어났다.
김창숙은 1919년 3월 29일 중국어에 능통한 박돈서와 함께 서울을 떠나 중국으로 향했다. 일본 경찰에게 들키지 않도록 파리장서 원문과 서명지를 한 줄씩 가위로 오린 뒤 꼬아 미투리로 삼았다. 국경을 넘어 봉천(지금의 심양)에서 상투를 자르고 중국식 옷차림으로 변장했다.
파리장서 복제품(위). 파리장서를 한 줄씩 가위로 오려낸 뒤 꼬아 만든 미투리 견본품(아래). 심산김창숙기념관 지하 1층 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다. (이희용 촬영)
천진을 거쳐 상해에 도착한 것은 4월 2일이었다. 그곳에서 신한청년당의 김규식이 이미 파리에 도착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명의의 탄원서를 전달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김창숙은 이동녕과 신채호의 조언에 따라 파리장서를 김규식에게 우송하고 자신은 상해에 남아 독립운동을 돕기로 했다.
김창숙은 파리장서 영문판과 국한문 혼용판을 3,000부씩 인쇄해 김규식에게 전달하고 파리강화회의 각국 대표, 중국 주재 외교사절, 중국 정계 요인, 언론사, 국내 유림, 중국 각지의 동포 등에게도 배포했다. 4월 2일 성주장터 만세 시위 주동자들을 신문하는 과정에서 이 사실이 드러나 곽종석과 장석영 등이 옥고를 치렀다. 이를 제1차 유림단 사건이라고 부른다.
심산김창숙기념관 1층 로비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독립운동의 빛, 유교’. 파리장서 작성에서부터 대표자 파견에 이르는 제1차 유림단 사건 과정을 그림과 사진 등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희용 촬영)
무장투쟁 근거지 마련하고자 국내 잠입해 모금 활동
김창숙은 상해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출범한 임시의정원의 경북 의원으로 선출됐다.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추대되자 김창숙은 신채호, 박은식과 함께 극구 반대했다. 이승만이 1919년 2월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위임통치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1921년 국제연맹에도 위임통치를 청원하는 성명을 발표하자 김창숙은 이승만 성토에 앞장섰으며 그는 결국 1925년 탄핵됐다.
김창숙은 만주 지역의 무장 독립투쟁이 위축되자 이회영과 함께 몽골과 만주 접경지대에 새로운 독립군 근거지를 마련하기로 하고 군자금 모금을 위해 1925년 8월 국내로 잠입했다. 이듬해 3월까지 동지들과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동분서주했으나 걷은 돈은 목표액 20만 원에 턱없이 못 미치는 3500원이었다. 김창숙이 국내를 빠져나온 뒤 모금 사실이 발각돼 600여 명이 구속됐다. 이것이 이른바 2차 유림단 사건이다.
김창숙은 김구, 이동녕 등과 의논해 모금한 돈을 결사대 파견에 쓰기로 했다. 일제 식민통치 기관을 파괴하고 친일파를 처단해 꺼져가던 독립운동 불씨를 되살리기로 한 것이다. 김창숙은 김구가 소개한 나석주를 천진에서 만나 무기와 활동비를 주며 의거를 부탁했다. 나석주는 1926년 12월 28일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 경성지점에 폭탄을 던지고 일제 관리와 경찰을 권총으로 사살한 뒤 자결했다. 나석주 의거는 올해로 100년을 맞는다.
왼쪽은 김창숙의 예심 종결 소식을 보도한 1928년 4월 8일자 동아일보 3면. 경북 유림단의 두령이자 나석주 의거의 기획자로 소개해놓았다. 오른쪽은 공판 회부 소식을 보도한 8월 8일자 동아일보 3면. 20년 동안 중대 사건에 전부 가담했다”고 설명했다.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김창숙은 1927년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상해의 영국 조계지 병원에 입원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대구경찰서로 압송됐다.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일본 경찰에게 호통을 쳤다. 재판 과정에서도 일본 법률을 인정할 수 없다며 변호사 선임을 거부했다.
14년 징역이라는 중형이 선고되자 주변에선 항소를 권했으나 이마저도 뿌리쳤다. 고문 후유증으로 두 다리가 마비돼 ‘앉은뱅이 노인’이라는 뜻의 벽옹(躄翁)이라는 호를 얻었다. 감옥에서도 꼿꼿한 태도로 형무소장이나 간수 명령에 따르지 않아 건강을 해쳤다. 일제는 옥사할까 두려워 1934년 형집행정지로 풀어주었다. 6년간 울산 백양사에 연금돼 있다가 집에 돌아온 뒤 20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 시묘살이를 뒤늦게 했다.
1927년 중국 상해에서 체포돼 국내로 압송된 김창숙이 대구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뒤 검사국으로 송치되고 있다. (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이승만 단독정부에 반대하고 남북연석회의도 불참
광복 소식은 왜관경찰서 유치장에서 들었다. 건국동맹 남한 책임자로 추대된 것이 탄로나 1945년 8월 7일 투옥된 것이다. 해방 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비상국민회의에 참여해 통일 민주정부 수립을 준비했으나 미국-소련의 대립 속에 정국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는 김구·김규식·홍명희·조소앙 등과 함께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노선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면서도 김일성이 주도하는 남북연석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정치 활동을 잠시 접고 그가 매달린 것은 유림의 통합과 인재 양성이었다. 1945년 11월 전국유림대회에서 조선유도회총본부 위원장으로 추대된 뒤 일제가 경학원으로 격하시킨 성균관 명칭을 이듬해 복원했다. 1946년 9월에는 명륜전문학교를 토대로 성균관대학을 설립했다. 그는 초대 학장으로 취임한 데 이어 1953년 종합대로 승격되면서 초대 총장을 맡았다.
1949년 3월 8일 성균관 명륜당 앞에서 유도교도원 제1회 입학식을 개최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가운데부터 차례로 정인보, 김구, 김창숙. (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이승만이 잇따른 개헌으로 장기집권을 꾀하며 독재로 치닫자 정치와 거리를 두던 김창숙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1951년 이승만 대통령 하야 권고문을 발표하는가 하면 이듬해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이시영·김성수·조병옥 등과 반독재 호헌 구국선언대회를 개최했다가 40일간 수감됐다.
1956년 대선 때는 민주당 신익희 후보와 진보당 조봉암 후보를 만나 단일화 합의를 끌어냈으나 신익희가 갑자기 숨지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기도 했다. 그해 효창공원에 있는 애국지사들의 무덤을 옮기고 운동경기장을 건설하려고 하자 효창공원 7열사 묘소 이장반대 투쟁위원장을 맡았다. 공병부대의 불도저 앞에 드러눕고 신문에 ‘효창공원에 통곡함’이라는 시를 발표하는 등 치열하게 투쟁한 끝에 경기장 건설은 못 막았지만 애국지사 묘소는 지켜낼 수 있었다.
이승만은 김창숙을 집요하게 탄압했다. 임시정부 시절부터 자신을 반대한 구원(舊怨)도 작용했다. 성균관대 졸업생들의 학위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압박하는가 하면 유림 내분을 이용해 곤경에 빠뜨리고 폭도들을 동원해 테러를 가하기도 했다. 결국 김창숙은 1956년과 1957년에 걸쳐 성균관대 총장, 성균관장, 유도회총본부 위원장에서 모두 쫓겨났다.
반독재 호헌구국 선언대회가 열린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폭도에게 맞아 머리에 피를 흘리는 김창숙을 계엄군이 연행하려 하고 있다. (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그렇다고 뜻마저 꺾을 수는 없었다. 1959년 12월 여당 단독으로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통과시키자 고향에 머물던 그는 이듬해 손자 등에 업혀 서울로 올라와 반독재 범국민투쟁에 앞장섰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혁명도 길게 보면 김창숙의 반독재 투쟁과 맥이 닿아 있다.
4·19 이후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대표,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장, 김구선생살해진상규명투쟁위원장,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장,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장 등을 맡아 통일운동과 민족정기 선양사업에 힘쓰다가 지병으로 쓰러져 불귀의 객이 됐다.
5월 10일 북한산 자락 묘소에서 64주기 추모제
5월 10일 오전 11시 북한산 자락의 서울 강북구 수유동 김창숙 묘소에서는 심산 서거 64주기 추모제전이 열린다. 유지범 성균관대 총장, 최종수 성균관장, 윤영선 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장, 김호상 의성김씨대종회장, 이승우 서울지방보훈청장, 심산 선생 후손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5월 14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심산 동상 앞에서도 학생과 교직원 등이 모여 추모식을 치르며 5월 29일까지 ‘독립운동의 빛, 유교’란 주제 아래 김창숙을 비롯한 유교 독립운동가들의 유품과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이에 앞서 5월 6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심산김창숙기념관 2층 반포심산아트홀에서는 심산 선생 증손녀 김성진 음악감독의 지휘로 ‘코리아 플루트 콰이어와 함께하는 심산음악회, 동지(同志)’가 열렸다.
1990년 2월 성균관대 서울캠퍼스에 세워진 김창숙 동상. 조각가 최의순(전 서울대 교수)의 작품으로 글씨는 이가원(전 연세대 교수)이 썼다. (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