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자 주도성 말살 교육이 야만·파시즘의 씨앗으로 [교육] 연합뉴스 그래픽 2025.3.13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교육열이 가장 뜨거운 나라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교육지표 2025에 따르면 한국은 2008년 이후 17년 연속 교육열 1위를 기록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다. 교육 공익단체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 이 지난해 낸 보고서도 이를 뒷받침한다. 고등학생의 약 80%가 공교육 외에 사교육을 받고 있으며, 2024년의 사교육비 총액은 무려 29조 원에 달한다. 이 압도적인 지표들이 가리키는 진실은 명확하다. 한국 사회의 막대한 교육열 은 곧 입시 열기 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교육에 대한 높은 관심 자체는 얼핏 긍정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목적과 방식이 뒤틀려 있다면, 그것은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되는 폭력과 학대를 촉진할 뿐이다. 불행히도 작금의 한국 교육은 목적부터 수단까지 심각한 오류로 점철되어 있다. 한국 사회 교육의 참담한 실패를 논하기 전에, 우리는 참된 교육이란 본디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부터 던져야 한다.
교육의 중심에는 마땅히 학습자의 능동적인 배움 이 놓여야 한다. 그 배움은 단순한 지식과 기술의 습득을 넘어 인격과 인성의 함양까지 망라하며, 궁극적으로 학습자 스스로 주체적인 자아를 도출하고 형성하도록 이끄는 과정이다. 즉, 교육의 목적은 전적으로 학습자를 향해 있어야 하며, 철저히 학습자를 주체로 대우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실현하는 방법 또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교육의 방법론은 대부분 교육자의 손에 달려 있으며, 그 형식에 따라 교육의 정당성이 판가름 난다. 교육자가 조력자의 위치를 이탈해 교육을 주도하고 학습자의 주도성을 침해한다면, 학습자는 고유한 자아를 형성하는 대신 기성세대의 낡은 틀을 답습하는 데 그치게 된다. 이는 학습자의 개성을 지워버리는 명백한 폭력이다. 따라서 참된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교육자는 관찰자이자 조력자의 선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
책 읽기에 열중하는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이를 거리 두기 의 교육이라 명명했다. 교육자가 학습자의 세계에 전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한 발 물러선 자리에서 학습자의 능동적 행위를 보장하고 성장의 환경을 조력하는 것이다. 요컨대 교육의 본질적 목적은 학습자 고유의 개별성을 바탕으로 한 성장이며, 그 방법은 교육자의 획일화된 통제가 아닌 거리 두기 여야 한다.
한국 사회는 이러한 참된 교육의 목적과 방법으로부터 극단적으로 괴리되어 있다. 한국에서 교육의 유일한 목적은 입시 로 귀결된다. 교육의 성공 여부는 진학할 대학의 서열로 줄 세워지며, 성적표에 찍힌 숫자만이 성공의 유일한 보증수표로 통용된다. 입시라는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서 교육자들이 만들어놓은 체계에 맞춰 모든 학습자를 동일한 척도로 재단하는 기형적 제도는, 교육의 본질적 목표와 극단적으로 동떨어져 있다.
방법론 역시 벤야민의 거리 두기 와는 정반대를 향해 질주한다. 29조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사교육비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교육의 주도권이 학습자 본인이 아닌 학부모와 자본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부모들은 자녀를 원하는 고등교육기관에 밀어 넣기 위해 일상의 모든 일정을 관여하고 통제한다. 학습자가 스스로 길을 개척하게 두는 대신, 학부모 자신이 옳다고 믿는 주형(鑄型) 속에 학습자를 억지로 우겨넣어 재단한다. 이 숨 막히는 통제는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라는 끔찍한 미화로 학습자에게 이식된다. 한국 교육은 그 목적뿐만 아니라 수단까지도 철저히 병들어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교육이 단편적인 제도가 아니라 기억과 역사 를 두고 벌이는 치열한 투쟁이며 한 사회의 명운을 가르는 척도라는 데 있다. 거리 두기 의 교육은 학습자를 대상과 직면하게 함으로써 스스로 부딪히고 각성하게 만든다. 그 과정을 통해 무수한 연관 속에서 하나의 독립된 개별성으로 도약하게 돕는다. 반면, 기성세대가 계획하고 통제하는 교육은 학습자의 개별성을 말살하고 체제의 폭력을 주입하여 맹목적으로 재생산하게 만든다. 이는 학습자 스스로 자아를 상실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야만의 굴레로 끌어내린다.
한겨레신문 2021년 12월 11일 갈무리
작금의 대한민국 대학 사회가 시나브로 파시즘적 징후에 물들고, 젊은 세대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과 부정 대신 기득권 편입과 각자도생에 매몰되어 가는 현실이 이를 섬뜩하게 증명한다. 입시를 인생의 전부로 여기며 죽은 지식을 기계처럼 주입받은 이들에게, 비판적 사유나 성찰을 기대할 수는 없다. 이들에게 남은 유일한 신앙은 입시에서 거둔 성과는 온전히 나만의 능력 이라는 오만한 능력주의뿐이다. 입시 경쟁에서 뒤처진 이들을 하등하게 여기고 혐오와 천대를 정당화하는 태도는, 통제와 획일화로 점철된 한국 교육이 잉태한 필연적인 괴물이다.
결국 한국 사회에 싹을 틔우는 파시즘과 야만의 맹아를 도려내기 위해서는 교육의 패러다임 자체를 완전히 뒤집어야 한다. 기성세대와 사회가 학습자에게 강요하고 개입하여 조종하는 폭력을 멈추고, 학습자 스스로 대상과 직면하여 성장할 수 있도록 철저한 거리두기 를 실천해야 한다. 그것만이 야만을 향해 폭주하는 우리 사회의 기차를 멈춰 세울 유일한 비상 브레이크다.
넷플릭스 시리즈 참교육 예고편 클립들.
비관적이게도, 우리 사회는 아직 이 파국을 직시하지 못한 듯하다. 얼마 전 경기도 교육감 선거에 당선된 안민석 전 의원은 학생들의 휴대폰 강제 규제나 초법적인 참교육 을 명분으로 한 교권보호국 신설 등 통제 중심의 담론만을 쏟아냈다. 현 정부의 교육 개혁 역시 근본적인 목적과 방법의 쇄신은 외면한 채, 입시 제도의 지엽적 손질에만 매달려 있다. 벤야민의 거리 두기 는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요원한 몽상처럼 보인다. 이 절망적인 태도마저도, 끝까지 통제와 규율의 고삐를 쥐어야만 학습자를 올바른 길 로 이끌 수 있다는 기성세대의 뿌리 깊은 야만적 오만에 뿌리를 둔 것이다.
거리 두기 의 교육으로 온전히 전환하지 못한다면, 한국 사회는 이미 여러 차례 겪었던 끔찍한 비극을 또다시 반복하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이미 그 비극의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역사의 반복을 두고 남겼던 서늘한 통찰처럼 말이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희극으로. 이승규 시민기자 seungkyu0104@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