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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서거 90주기…단재에 얽힌 6가지 오해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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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2월 21일은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 역사학자이자 언론인, 그리고 작가인 단재 신채호(1880~1936)의 90주기 기일이다. 그는 동시대의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웠고, 몸담았던 분야마다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기일 하루 전인 20일 오전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김구기념관 대회의실에서는 ‘단재 신채호 선생 순국 90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그동안 신채호 순국 추모식은 묘소와 사당이 있는 충북 청주시에서 개최돼왔으나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는 단재 정신을 정치·역사·시민의 기억으로 확장하는 계기로 삼고자 서울로 장소를 옮겼다”고 설명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영상 메시지를 통해 대한민국 헌정 질서의 뿌리가 독립운동에 닿아 있다”고 강조했고, 황운하 기념사업회 상임대표는 90년이 지나도 선생의 말씀과 행동은 역사에 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다”고 추모했다. 유인태 기념사업회 고문, 이강일 국회의원, 이승우 서울지방보훈청장, 류운걸 광복회 충북지부장 등도 자리에 함께했다.   항일 언론인의 사표이자 민족사학의 비조로 꼽히는 신채호. 우뚝 선 존재, 그에 대한 일부 부정적 시각은 왜일까? 그러나 항일 언론인의 사표(師表)이자 민족사학의 비조(鼻祖)라는 찬사에 걸맞지 않게 이날 추모식 말고는 순국 90주기를 기리는 이렇다 할 기념행사가 없었다. 언론사들의 특집 기획이나 문화예술계의 공연·전시 등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예전에도 신채호를 다룬 평전이나 그의 활동과 사상을 연구한 저술은 많았지만 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 TV 드라마, 소설, 연극 등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대중매체에서는 고집스럽고 괴팍한 그의 성정을 부각하거나 과장하는 사례가 많았다. 신채호를 두고 찬사 못지않게 부정적인 시선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강직한 성격 탓에 주변 인물과 늘 부딪혔고, 특이한 행동으로 구설에도 자주 올랐다. 이런 점들이 다른 독립운동가에 비해 대중의 관심이나 추모 열기가 높지 않은 원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그의 존재가 너무 우뚝하다. 실제 그의 진면목은 어떤지, 90주기를 이대로 흘려보내도 좋은 건지, 기존 연구와 저술 등을 토대로 신채호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을 파헤쳐보자.   20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신채호 선생 순국 90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와 공연 출연진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①신채호는 고집불통이었나?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발행되는 중화보(中華報)에 논설을 기고하던 신채호는 신문사가 글을 제멋대로 고쳤다는 이유로 집필을 중단했다. 사장이 여러 차례 찾아와 사과했는데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단지 ‘어조사 의(矣)’ 한 글자가 빠졌을 뿐이었다. 신채호는 중국인이 조선인을 무시해서 함부로 고친 것”이라고 분개했다. 1928년에는 무정부주의자 국제조직의 위조 어음 발행 사건에 연루돼 10년형을 선고받고 중국 뤼순(旅順)형무소에 수감됐다. 건강이 나빠지자 형무소 당국은 재력 있는 친척을 보증인으로 내세우면 병보석으로 풀어주겠다고 제의했다. 신채호는 친일파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안중근·이회영·신채호가 갇혀 있다가 숨을 거둔 중국 뤼순형무소. 지금은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맨 왼쪽에 신채호 발자취를 소개한 패널이 걸려 있다.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영어 단어 ‘neighbour’를 철자 그대로 ‘네이그흐바우어’라고 발음하고 문장 ‘I am a boy’에 한문식으로 토를 달아 ‘I는 am a boy이니라’라고 읽었다든가, 머리를 숙이기 싫어해 세수할 때 허리와 목을 꼿꼿이 편 채 물을 찍어 얼굴에 바르는 바람에 소매를 적시고 마룻바닥을 온통 물투성이로 만들었다는 등의 일화도 널리 알려져 있다.   충북 청주시 상당군 낭성면 귀래리의 단재신채호기념관은 세숫대야를 전시하며 신채호의 특이한 세수 방법을 소개해놓았다. (충청북도) 그의 사상적 편력을 보면 고집스럽기는커녕 새로운 조류와 진보적 세계관을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자기 혁신을 꾀했음을 알 수 있다.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한학을 배우고 성균관에서 공부했는데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며 근대 민주주의 사상을 수용하는가 하면 ‘가정잡지’를 발행하며 여성 계몽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1차대전과 러시아혁명을 거친 뒤에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입각한 민중혁명론을 받아들였다. 신채호와 함께 베이징에서 지낸 원세훈은 단재는 선견지명이 있어서 그 주장을 고집했을지언정 사리에는 능통(能通)이었다”면서 단재의 고집을 이해하지 못하고 임시적 변통에 능한 체하며 원대한 우려가 없었던 이들이 도리어 불통(不通)이었을 것”이라고 오히려 비판자들의 문제를 지적했다. ②주변 인물들과는 왜 자주 부딪혔나? 신채호가 신동으로 소문나자 학부대신을 지낸 친척 신기선은 천안의 집 서재에 있는 책을 모두 읽을 수 있게 하고 성균관 입학도 주선했다. 그런 은인도 그의 추상같은 필봉을 피하지 못했다. 1908년 4월 8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신기선을 송병준·조중응과 함께 ‘일본의 3대 충노(忠奴)’라고 질타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임시정부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국제연맹 위임통치론을 주장한 이승만이 국무총리에 선출되자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은 자”라고 성토하며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다.   신채호(왼쪽)가 중국 상하이 망명 시절 같은 집안의 독립운동가 신석우(가운데), 신규식(오른쪽)과 함께 찍은 사진.(독립기념관) 자신이 반대하는 인물이 선출됐다고 퇴장한 것은 모처럼 결집한 독립운동 진영에 균열을 일으키는 처사이자 민주주의 원칙에도 어긋나는 행위였다. 신채호는 외교론을 내세운 이승만은 물론 안창호를 비롯한 준비론자들과도 타협을 거부하며 임정과 결별했다. 신채호 입장에서 보면 원칙과 소신대로 행동한 것뿐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이승만의 무책임한 태도와 독단적인 행동 탓에 임시정부가 창조파와 개조파로 갈라진 것을 보면 처음부터 신채호의 판단이 옳았음을 알 수 있다. 신채호의 단호한 원칙에는 은인도 피붙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채호는 형 신재호가 요절하자 조카딸 향란을 대신 돌보다가 대한매일신보 동료 임치정에게 부탁하고 1910년 망명했다. 향란이 친일파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1917년 본국에 잠입해 만류했으나 듣지 않자 이제 너와 나는 조카와 삼촌이 아니다. 골육이라도 이렇게 끊어버린다”라고 말한 뒤 손가락 한 마디를 끊고 돌아왔다. ③조강지처를 버린 까닭은? 신채호는 조강지처를 버렸다는 비판도 받았다. 1895년 풍양 조씨와 결혼해 아들 관일을 두었으나 부인이 분유를 잘못 먹이는 바람에 일찍 죽고 말았다. 이 일을 계기로 둘 사이가 소원해지자 신채호는 논 다섯 두락을 장만해준 뒤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이 일은 망명의 사전 정지작업이기도 했다. 부인이 동행을 거절했는지, 신채호 혼자 망명하겠다고 마음먹고 미리 친정으로 보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독립운동가들이 가정을 돌보지 못하거나 본부인을 두고 재혼한 것은 당시 기준으로 볼 때 흠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신채호는 1920년 연경대에 다니던 박자혜와 재혼한 뒤 아들 수범과 두범을 두었다. ④그는 과격·모험주의자였나? 신채호가 의열단장 김원봉의 요청을 받고 1923년 1월 발표한 6400여 자 분량의 ‘조선혁명선언’은 그의 독립 노선과 혁명 사상을 응축한 글이다. 그는 일본을 우리의 국호와 정권과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한 강도”라고 규정한 뒤 자치권을 요구하거나 문화운동을 부르짖는 자들도 적”이라고 선언했다. 이어 외교론자와 준비론자를 공박하며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해,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지 못하고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라고 천명했다.   김원봉 의열단장의 요청으로 신채호가 지은 조선혁명선언(오른쪽)과 의열단원들(오른쪽). 대전의 신채호 생가 터에 들어선 단재홍보관에 전시돼 있다. (대전시) 그가 비타협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무장투쟁을 통한 민중혁명의 기치를 내건 것을 두고 과격주의자라거나 모험주의자라고 깎아내리는 것은 올바른 평가가 아니다. 해방을 이룬 과정이나 결과만 놓고 독립 노선의 우열을 따질 수 없고, 오늘날의 잣대로 당시 투쟁 성과를 따지는 것도 피해야 한다. 신용하는 조선혁명선언을 일제강점기 한국의 민족독립운동이 성취한 가장 귀중한 불멸의 문헌의 하나이며 독립선언문들 중에서도 정상에 서 있는 문헌”이라고 평가했다. 최홍규도 최남선의 ‘기미독립선언’이나 한용운의 ‘조선독립의 이유의 서(書)’를 훨씬 능가할 만큼 민족독립을 위한 폭력적인 투쟁이념을 가장 선명하면서도 극적으로 밝힌 선언적 압권임을 역사는 스스로 증명했다”고 강조했다.   2025년 11월 해군 잠수함 신채호함이 동해의 파도를 가르며 항해하고 있다. 2021년 9월 28일 진수식을 한 신채호함은 3000t급 잠수함으로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다. (방위사업청) ⑤영웅사관을 신봉했나? 신채호는 망명 전 대한매일신보에 ‘수군 제일 거룩한 인물 이순신전’, ‘동국 거걸(巨傑) 최도통(최영)전’ 등을 연재하고 ‘을지문덕전’을 편찬했다. 궁예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일목대왕(一目大王)의 철추(鐵椎)’ 등의 역사소설도 발표했고 중국 양계초의 ‘이태리 건국 삼걸전’도 번역했다. 비슷한 시기에 장지연의 ‘애국부인전’, 우기선의 ‘강감찬전’, 박은식의 ‘연개소문’ 등도 선보였다. 신채호는 역사 속 영웅담을 통해 민족 자긍심을 일깨우고 독립 의지를 불어넣으려 했으나 영웅사관을 신봉한 것은 아니었다. 1909년 대한매일신보에 쓴 ‘20세기 신동국지영웅’에서는 고대에는 일국의 원동력이 한두 명의 영웅에 있었으나 오늘날 일국의 흥망은 국민 전체의 실력에 달려 있다”고 썼다. 그가 출현을 기대한 영웅도 과거와 달리 ‘국민적 종교·학술·실업·미술 등에 종사하며 국민 전체에 봉사하는 사람’이었다. 고증 논란을 빚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과정을 묘사한 대목이다. 강 상류를 둑으로 막았다가 일시에 터뜨려 수나라 대군을 떼죽음시켰다는 얘기는 기존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당시 토목공사 역량이나 수나라 대군의 이동 행렬 등을 따져봐도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많다.   살수대첩 기록화. 을지문덕 장군이 수공(水攻)으로 수나라 군사를 무찌르는 장면을 묘사했다.(독립기념관) ⑥‘환빠’들이 신채호를 내세우는 까닭은? 1908년 8월 27일부터 12월 31일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는 기자조선설과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고 고대사를 만주 중심으로 바라보았다. 이와 함께 김춘추와 김부식을 비판하고 발해와 통일신라를 남북조 시대로 간주했다. 민족사학과 식민사학, 혹은 강단사학과 재야사학 간에 벌어진 주요 쟁점이 모두 그의 붓끝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채호는 연해주와 만주에서 고조선·고구려·발해 유적을 답사한 기록과 베이징 도서관과 서점 등을 뒤지며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조선사’를 집필하다가 단군부터 백제 멸망까지 다룬 뒤 투옥으로 중단했다. 조선일보에 1931년 6월 10일부터 10월 14일까지 연재했고, 병세가 악화돼 이후 역사를 더 담지 못한 채 1936년 옥중에서 순국했다. 이 글을 엮은 책이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란 서문의 문구로 유명한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다.   신채호의 ‘조선사’ 제1편 총론이 실린 조선일보 1931년 6월 10일자 4면. 그는 한반도에 국한된 한민족의 강역을 대륙으로 넓히는 한편 중국 관점에서 벗어나 한민족을 중심으로 한 역사 서술의 틀을 만들었다. 묘청 주도로 단행된 고려의 서경(西京·평양) 천도를 ‘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1대 사건’으로 평한 것도 묘청이 칭제건원(稱帝建元·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씀)을 주장하고 금나라 정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1911년 계연수가 ‘삼성기(三聖紀)’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 4권을 하나로 묶어 필사한 것이라고 전한다. 소장자 이유립이 수정·보충해 1979년 내놓으면서 세상에 알려졌으나 위서(僞書)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지난해 12월 이재명 대통령이 박지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에게 환단고기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물어본 것을 계기로 이른바 ‘환빠(환단고기에 열광하는 사람들) 논쟁’이 재연됐고 신채호의 이름도 다시 소환됐다. 그가 백제의 요서경략설(遼西經略說) 등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신채호의 저술과 환단고기 기록이 일치하는 대목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대목도 많다. 그는 부여족을 정통으로 보면서도 거란족이나 여진족 등 만주족 전체를 같은 조상을 둔 계열로 보지 않았으며, ‘천부경(天符經)’도 위작이라고 주장했다.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어라” 모든 학자가 그렇듯이 신채호의 저술이나 학설 가운데서도 비판할 대목이 있고 오류도 적지 않다. 그때까지 축적된 학문적 성과나 당시의 연구 여건을 감안하면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신채호 스스로도 형무소에서 면회한 조선일보 신영우 기자에게 원고의 보완과 수정 필요성을 들어 연재 중지를 요구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독보적인 이론을 정립하고 다방면에 걸쳐 뻬어난 업적을 남긴 것이 오히려 놀라울 따름이다. 이른바 ‘국뽕’으로 비칠 만큼 민족지상주의를 강조하고 대륙 영토에 집착한 것도 일제강점기라는 특수성을 고려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단군신화를 기록한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제왕운기(帝王韻紀)’도 고려시대 몽골 침략기에 편찬됐다. 대전시 중구 어남동의 신채호 생가터에 꾸며놓은 단재 홍보관에는 1908년 6월 25일 대한협회 회보에 쓴 논설의 한 대목이 적혀 있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역사 제대로 읽기와 바로 보기는 애국의 첫걸음이다.   충남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림리(현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의 신채호 생가 터. 그가 태어난 초가를 복원해놓았다. (대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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