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동환율제 하에서 자본 도피에 직면한 한국 경제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홍종학 전 국회의원 · 중소벤처부 장관
환율이 1400원대에 근접할 정도로 폭등하면서 다시 경제 위기가 거론되고 있다. 지난 번 레고랜드 사태 당시에도 환율이 오르자 IMF 사태를 거론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러나 현재는 외환보유고가 충분하고 국민연금과 한국투자공사의 해외투자, 그리고 서학개미들의 해외 증권 투자가 많아 순대외금융자산이 7천억 달러를 넘고 있다. 또 당시와는 달리 현재는 시장 자율적인 변동환율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무리하게 환율을 방어하다 외환보유고가 고갈되어 국가부도사태를 맞은 IMF 사태가 똑같이 반복되지는 않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 이유는 당시와 유사점이 많기 때문이다. 현재 정부와 정치권은 경제 위기에 대한 경각심이 없고, 경제 위기를 상시 점검하고 대비하는 시스템도 작동하지 않고 있다. 한국은행이 조기 경보시스템을 만들었고, 국제금융센터에서는 국제 금융시장을 면밀히 점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언론에서 경제 위기에 대한 보도는 전무하다시피 하고, 학자들의 논의도 거의 없다. IMF 사태를 맞고서야 벼락을 맞았다고 허둥지둥하던 당시와 흡사하다. 최근 일본 경제와 관련한 언론 보도와 정책 대응을 보면 상황 인식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기업 밸류업 지원방안 2차 세미나에서 축사하고 있다. 2024.5.2 [금융위원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연합뉴스
경쟁력 저하, 엔 약세로 고통받는 일본 좇자는 한국 언론
변동환율제도 하에서의 경제위기 상황을 그려보는 데는 일본의 사례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버블 경제 붕괴 이후 잃어버린 30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동산 거품이 꺼진 후 막대한 정부 재정을 투입했지만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고, 정부 부채만 늘리는 부작용만 생겼다. 건설경기 부양에 치중한 경제 정책으로 혁신에 기반한 경쟁력은 뒤처지게 되고, 저성장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구조조정 없이 저금리 정책으로 일관한 결과 역사상 유례없는 양적 완화 정책으로도 경제는 살아나지 않았다. 대신 좀비기업만 늘어나 구조조정을 더 어렵게 하고 있고, 그 사이 일본 경제의 경쟁력은 저하되어 고스란히 엔화 약세의 원인이 되었다.
고통받던 일본 국민은 엔화 약세로 더욱 실질 구매력이 줄어들어 이중의 고통을 겪었다. 반면 수출 대기업의 주가는 상승했지만 달러 기준으로 보면 이전에 비해 크게 오르지 못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국내 언론에서는 일본의 주가 상승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우리도 일본과 같이 밸류업 정책을 취해야 한다는 엉뚱한 처방을 내놓았고, 어처구니없게도 그 제안을 따라 정부가 밸류업 대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경제위기를 대처해야 하는 정부가 잘못된 진단을 하고 있다면, 그 자체가 중요한 위기 요인이다. 지난 주 일본 엔화는 달러당 160엔이라는 사상 최저 수준을 기록했고, 일본 정부는 어쩔 수 없이 대대적인 시장개입을 통해 간신히 엔화를 방어하고 있다. 선진국 중 최대 수준인 재정적자와 만성적인 저금리 정책으로 인해 금리를 올릴 수도 내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서민들만 고통을 받고 있다. 이런 현실은 무시한 채 주가의 인위적인 부양을 위한 밸류업을 논의하는 현실은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
사실상 변동환율제도 하에서의 경제 운용은 고정환율제도보다 더 어렵다. 단순히 외환보유고만 지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 시장 참여자들의 반응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안정적인 경제 운용에 대한 신뢰를 제공해야 한다. 일본처럼 구조조정 없이 저금리와 재정으로 경기를 부양하는 경우 엔화에 대한 신뢰는 회복하기 어렵다. 경기도 안 좋아 금리를 올릴 수 없기 때문에 경제 정책 운용이 크게 제약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을 좇고 있는 한국의 경제 운용도 이러한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8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국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국토교통부 주최 업계 에서 김승범 국토교통부 부동산투자제도과장이 인사말하고 있다. 2024.4.8. 연합뉴스
구조조정 없이 주택 가격 떠받치기로 자본 도피 막을 수 있나
변동환율제도 하에서 정부 정책이 신뢰를 얻지 못할 때 자본 도피(capital flight)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한국은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장기적으로 성장률이 마이너스로 전환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미국에 비해 장기적으로 성장률도 떨어지고, 혁신 기업도 없어 자본수익률도 낮을 것으로 추정된다. 단기적으로 금리도 상대적으로 낮은 상황에서 자본이 해외로 유출되려는 압력은 커지게 된다.
과도한 건설 투자 비중으로 인해 경제의 혁신 능력이 저하되었는데도 정부는 여전히 구조조정은 등한시하고 건설 경기 부양을 위한 주택 가격 떠받치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으로 부동산 가격이 높게 형성되면 혁신 투자는 더욱 어렵게 된다. 적절한 구조조정으로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지 않는다면 산업 경쟁력이 살아날 수 없는데도, 거품 붕괴로 인한 경기 침체를 피하려는 관료들은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원화도 점차 가치가 떨어지게 되고, 실질 소득의 하락으로 서민경제는 살아나기 어렵다. 내수 위축으로 장기 침체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한국 경제의 전망은 이미 매우 어둡다. 가장 큰 문제는 저출산인데 정부와 정치권은 저출산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논의조차 피하고 있다.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이 떨어지게 되면 인재들이 해외로 떠나게 되는데, 이미 이런 추세가 시작되었다. 고급 인력의 국내 임금이 해외에 비해 낮기 때문이다. 인적 자본의 도피(Human Capital Flight)와 함께 자본의 도피가 발생할 때, 경제는 회복하기 어려운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중남미 국가들이 오랫동안 성장하지 못한 이유인데 한국경제가 직면한 위험이 되었다.
변동환율제도 하에서는 경제 변수 하나하나가 다 중요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환율과 물가, 이자율, 경제 성장률 등의 변수를 꼼꼼히 챙기면서 장기적인 성장 잠재력을 회복시키는 경제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현재 한국 정부와 한국은행에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