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책이 필요 없는 도시 글로스터, 파주와 전우애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역사책이 따로 필요 없는 도시가 있다. 그 자체가 역사책인 도시. 잉글랜드 남서부, 세번(Severn) 강변에 들어선 도시 글로스터(Gloucester)가 바로 그런 곳이다. 로마군단이 터를 닦고, 여왕이 도시를 재설계하고, 폐위된 왕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국왕이 직접 대군을 이끌어 공격했지만 끝내 함락되지 않은 곳.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피를 흘린 병사들의 고향이기도 한 곳이다.
글로스터 부두는 산업혁명과 주거혁명이라는 격변을 모두 견뎌냈다. 거대한 창고들은 고급 아파트와 관광객을 위한 쇼핑 공간으로 탈바꿈했다.(위키피디아)
로마 황제가 퇴역군인에게 선물한 도시
글로스터는 로마 황제 네르바(재위 96~98년)가 선포한 콜로니아(Colonia), 즉 퇴역군인 정착 도시였다. 이 자치도시는 선출된 행정관이 지역분쟁을 해결하고 토목공사를 감독했으며, 주민들은 세금을 내야 했다. 2천 년 전에 이미 주민자치가 있었다.
로마가 물러간 뒤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머시아(Mercia) 왕국의 실질적 지배자 아서플래드(Æthelflæd, 약 870~918년)다. 알프레드 대왕의 맏딸인 그녀는 남편 아서레드(?~911년)가 죽은 해부터 자신이 세상을 뜰 때까지 머시아를 다스렸다. 왕도 왕비도 아닌 귀부인(Lady) 이라는 이름표를 달고서. 그녀는 글로스터를 머시아인들의 중요한 정치중심지로 만들었고, 도시의 가로망을 재설계하고 성벽과 방어시설을 보수했다. 도시계획까지 직접 챙긴 셈이다.
덴마크 군의 침입에 맞서 요새화된 마을들을 건설하고 더비와 레스터 점령 등 주요 군사적 승리를 이끈 그녀는 918년 6월 12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 글로스터의 성 오스왈드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1100년이 흐른 2018년, 글로스터 시민 1만 명이 거리로 나와 그녀의 장례 행렬을 재현했다. 죽은 지 천 년이 넘어도 이렇게 기억되는 지도자가 있는가 하면, 살아있어도 기억하기 싫어하는 지도자도 있다. 어느 쪽이 더 긴 생을 산 것일까.
아서플래드(애빙던 수도원 문서 및 관습집, 1220년경, 위키피디아)
죽어서 도시경제를 살린 왕
중세 글로스터의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에드워드 2세(1284~1327)와 관련이 있다. 그는 1307년부터 1327년 1월 폐위될 때까지 잉글랜드 왕이었으며, 그해 9월 21일 버클리 성(Berkeley Castle)에서 아마도 새 정권의 명령으로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무덤은 글로스터 대성당에 있으며, 1327년 죽음 이후 한 세기 동안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 무덤을 찾았다. 살아서는 나라를 말아먹은 왕이, 죽어서 대성당을 먹여 살린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가장 탁월한 국가 기여였는지도 모른다.
에드워드 2세가 영국 왕관을 받는 모습을 담은 당대의 삽화(위키피디아)
글로스터 대성당 앞에서 김성수 시민기자
왕도 못 뚫은 성벽, 1643년의 통쾌함
1643년 8월 10일, 찰스 1세(1600~1649년)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글로스터 성문 앞에 나타났다. 글로스터는 세번 강 유역 마지막 남은 의회파 도시였다. 1500명의 수비대가 왕의 대군을 맞았고, 결국 구원군이 도착하자 왕은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왕당파 손실은 사망 120명에 부상·탈영 1700명이었으나 수비대 손실은 30~50명에 불과했다.
대군을 이끌고 온 왕이 허탕을 치고 돌아간 것이다. 그 찰스 1세는 6년 뒤 처형된다. 글로스터를 못 뚫은 것이 어쩌면 그 시작이었으니, 작은도시 하나가 영국역사의 물꼬를 바꾼 셈이다.
찰스 1세 초상화(위키피디아)
설마리의 피, 그리고 파주길
여기서 이야기는 갑자기 한반도로 건너온다.
설마리 전투(임진강 전투, 글로스터 고지 전투)는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파주시 적성면 감악산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다. 영국군 제29여단 글로스터 대대가 설마리에서 중공군의 4월 공세를 방어한 전투로, 당시 글로스터 대대는 임진강을 막고 있었다.
압도적인 4만 2000여 명의 파상공세에 맞서 652명의 글로스터 대대는 나흘 동안 영웅적인 분투를 벌였으나, 감당할 수 없는 사상자가 발생하고 탄약까지 소진되어 더 이상의 교전이 불가능해졌다. 대대장은 부상병들과 함께 남겠다고 선언하고 철수를 명령했지만, 포위망을 뚫고 나온 것은 우회로를 택한 67명의 D중대뿐이었다. 결국 생존한 67명의 대원들은 포로가 되어 정전 때까지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다.
그런데 이 전투를 버텨준 덕분에 유엔군 전선은 위기를 넘겨 다시 안정을 되찾았으며, 서울 북쪽의 방어선이 유지되었다. 피로 지킨 시간이었다.
이 인연이 씨앗이 되어, 파주시와 글로스터시는 2014년 4월 22일 자매결연 협정을 체결했다. 전투가 시작된 날짜를 기억하며 맺은 결연이다.
그 뒤가 더 감동적이다. 파주시는 감악산 부교를 글로스터 영웅의 다리 로 명명했고, 글로스터시는 부둣가의 유명한 길에 파주길(Paju-gil)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국 남서부의 오래된 항구도시 부둣가를 걷다가 파주길 이라고 한글로 새긴 표지판을 마주친다면 어떤 느낌일까. 나는 이 표지판 앞에 서서 글로스터 연대가 이 도시 출신의 부대였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무지도 이런 무지가 없지만, 동시에 발견의 감동도 이런 감동이 없다.
글로스터시에는 파주길 외에도 임진 막사(Imjin Barracks) 등 파주를 기억하는 여러 기념공간이 있어, 파주의 다른 어느 해외 자매도시보다 더 깊은 우정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2024년 11월에는 파주 김경일 시장이 이끄는 13인 대표단이 글로스터를 공식 방문해, 글로스터 시장 로레인 캠벨과 함께 자매도시 협정에 서명했다. 글로스터 대성당에서는 원본 카른 십자가(Carne Cross)도 볼 수 있었는데, 이 십자가는 포로수용소에 갇힌 글로스터 병사들이 나무로 만든 것이다. 수용소에서 손으로 깎아 만든 십자가가 수백 년 된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 이 얼마나 묵직한 역사의 압축인가.
글로스터 부둣가 파주 길 명판 앞에서 김성수 시민기자
글로스터가 한국에 던지는 질문
2천 년을 살아온 도시 글로스터, 그리고 피로 맺어진 파주와의 인연이 오늘날 한국에 건네는 질문 몇 가지.
첫째, 희생은 기억되어야 비로소 완성된다. 설마리에서 스러진 글로스터 병사들은 이름 없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파주는 다리에 그 이름을 새겼고, 글로스터는 항구 길에 한국도시의 이름을 붙였다. 기억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살아있는 역사다. 지금 한국에서 누구의 희생이 기억되고, 누구의 희생이 지워지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둘째, 소수가 버텨야 역사가 바뀐다. 1643년 1500명이 왕의 대군을 막았고, 1951년 652명의 글로스터 대대가 4만 2000여 명의 중공군 물결을 나흘 동안 버텼고 결국 67명만이 생존해 돌아왔다. 숫자가 아니라 의지가 역사를 만든다. 거대한 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 현실 이라고 불릴 때, 글로스터의 역사는 그 현실을비웃는다.
셋째, 자매도시는 관광교류가 아니라 역사인식의 문제다. 파주와 글로스터의 인연은 시청 공무원의 출장으로 시작된 게 아니라 피와 화약 연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 무게를 모르는 자매결연은 그냥 현수막 교환일 뿐이다. 한국의 수많은 자매도시 관계가 실제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글로스터는 화려한 도시가 아니다. 인구 약 14만 명의 중소도시다. 하지만 이 도시의 돌 하나하나에 2천 년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고, 항구의 낡은 길 하나에 한국전쟁의 기억이 담겨 있다. 로마군단이 닦은 길과 파주길이 같은 도시에 공존하는 것, 이것이 글로스터의 깊이다.
역사를 잊지 않는 도시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남의 역사도 잊지 않는 도시는, 더욱 그러하다.
글로스터 웨스트 게이트 스트릿(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