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번 투옥에도 왕·판사 앞에 무릎 꿇지 않은 조지 폭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17세기 영국에 한 사내가 있었다. 구두장이 집안 출신으로, 성직자도 아니고, 귀족도 아니고, 대학도 안 나왔다. 그런데 이 사람, 왕 앞에서도 모자를 안 벗었다. 판사 앞에서도 무릎을 안 꿇었다. 감옥을 여덟 번 드나들면서도 굽히지 않았다. 이름은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 퀘이커운동의 초기 지도자다.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이야기인데, 어쩐지 오늘 아침 뉴스를 보는 것 같다.
17세기 조지 폭스의 초상화.(위키피디아)
목사님, 당신이 틀렸습니다
폭스가 살았던 17세기 영국은 종교가 곧 권력이었다. 성공회(영국 국교회)는 왕과 한 몸이었고, 교회 안에서 목사가 하는 말은 곧 법이었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스물두 살 무렵부터 혼자 들판을 돌아다니며 신(神)은 교회 건물 안에만 있는 게 아니다, 모든 사람 안에 내면의 빛 (inner light)이 있다 고 외치기 시작했다.
교회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중간상인(목사)이 필요 없다는 말이니까. 신과 인간 사이의 유통마진 을 없애겠다는 선언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우리 플랫폼 없이도 당신이 직접 거래할 수 있습니다 라고 외친 것인데, 기득권 입장에서는 혁명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폭스의 주장은 단순한 신학논쟁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교회를 예배당 이라 부르지 않고 모임집 이라 불렀고, 예배시간에는 설교 대신 침묵을 택했다. 누구든 성령의 감동이 오면 말할 수 있었다. 여성도, 가난한 자도, 배우지 못한 자도. 17세기에 여성에게 발언권을 준 종교공동체가 얼마나 있었을지 한번 헤아려 보시라.
조지 폭스 생가 근처 페니 드레이톤에 있는 조지 폭스 기념비. 김성수 시민기자 촬영
무릎 꿇기를 거부한 사람들
퀘이커라는 별명 자체가 조롱에서 비롯됐다. 1650년, 판사 게르바스 베넷(Gervase Bennet)이 폭스를 법정에 세웠을 때, 폭스가 신 앞에서 떨라(quake) 고 외쳤다 하여 떠는 자들 (Quakers)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조롱이었는데, 폭스는 그걸 훈장처럼 달고 다녔다.
퀘이커 교도들은 당시 사회의 예절 문법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귀족이나 왕 앞에서도 모자를 벗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모든 사람은 신 앞에 동등하다. 그러니 다른 인간에게 굽힐 이유가 없다. 법정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는 것도 거부했다. 나는 평소에도 진실만 말하는데, 왜 특별한 순간에만 맹세해야 하냐 는 논리였다.
이쯤 되면 국가 입장에서는 그냥 둘 수가 없다. 폭스는 평생 여덟 차례 투옥됐고, 그의 동료들 수천 명이 감옥을 드나들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 운동은 탄압을 받을수록 더 커졌다. 감옥에서도 폭스는 편지를 쓰고, 기도하며, 조직을 다졌다.
400년 전 조지 폭스와 그 가족이 다니던 페니 드레이톤 성공회 교회. 김성수 시민기자 촬영
전쟁을 거부한 이유
퀘이커 운동이 역사에 남긴 가장 진한 자국 중 하나는 평화주의 다. 폭스는 어떠한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651년 당시 공화정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이 폭스에게 군대 지휘관 직을 제안했을 때, 폭스는 정중히 거절했다. 크롬웰은 황당했겠지만, 폭스는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 평화주의는 훗날 미국 독립혁명(1775~1783) 시기에도 퀘이커들을 곤경에 빠뜨렸다. 어느 편도 들지 않으니 양쪽 모두에서 욕을 먹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신 다른 일을 했다. 부상자를 돌보고, 피란민을 먹이고, 전쟁고아를 거뒀다.
조지 폭스가 400년 전 다니던 페니 드레이톤 성공회 교회 내부. 김성수 시민기자 촬영
노예무역에 맞서다
퀘이커 운동이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노예제 반대운동이었다. 168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저먼타운의 퀘이커 공동체는 인류 역사 최초의 공식적인 노예제 반대 선언문을 발표했다. 우리가 자유를 원하듯, 그들도 자유를 원한다 는 내용이었다.
이 공동체를 세운 이가 윌리엄 펜(William Penn, 1644~1718)이었다. 폭스의 동료였던 펜은 영국 왕 찰스 2세(Charles II, 1630~1685)에게서 북아메리카 땅을 하사받아 퀘이커들의 이상적 사회를 세우려 했다. 그 땅이 오늘날의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즉 펜의 숲 이다.
훗날 퀘이커 출신 노예해방 운동가 존 울먼(John Woolman, 1720~1772)은 수십 년을 걸어 다니며 퀘이커 공동체 안의 노예 소유주들을 설득했다. 미국 남북전쟁(1861~1865)보다 100년도 더 앞선 이야기다.
영국 랑카스카 성(이전엔 감옥) 안에 있는 조지 폭스 조각상 앞에서 김성수 시민기자.
한국사회에 던지는 질문들
자, 이제 한반도로 시선을 옮겨보자. 조지 폭스가 오늘 서울에 살고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선 그는 대형 교회 건물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을 것이다. 왜 신의 집이 저렇게 크냐 고. 그리고 아마 목사 아들이 목사직을 세습하는 교회 앞에서는 더 오래 서 있을 것이다. 퀘이커에는 처음부터 직업 성직자가 없었다. 누구도 신과 인간 사이에서 통행료 를 받지 않았다.
폭스가 한국사회에서 가장 낯설어할 것 중 하나는 아마도 서열문화 일 것이다. 나이 한 살 차이에 반말과 존댓말이 갈리고, 직급 하나 차이에 허리 굽힘 각도가 달라지는 문화. 17세기 영국 귀족 앞에서도 모자를 안 벗던 사람이 이 문화를 보면 얼마나 피곤해 할까.
그러나 웃고 넘길 일이 아니다. 퀘이커운동이 우리에게 진짜로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권력 앞에서 얼마나 자주 무릎을 꿇는가?
2024년 겨울, 계엄령 선포와 탄핵 정국을 겪으며 한국 시민들은 광장에 나왔다. 촛불을 들고, 손을 흔들고, 노래를 불렀다. 그 광경은 어딘가 17세기 퀘이커들의 침묵예배 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총을 들지 않고, 폭력을 쓰지 않고, 그러나 물러서지도 않는 방식. 폭스라면 그 광장에서 모자를 쓴 채로, 꼿꼿이 서 있었을 것이다.
한국 사회가 폭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거창한 신학이 아니다. 작은 실천들이다. 불의한 선서를 거부하는 것, 부당한 위계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 전쟁 대신 돌봄을 선택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힘없는 사람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
영국 런던 번힐 필즈에 있는 조지 폭스의 묘비, 퀘이커 모임집 옆.(위키피디아)
400년이 지나도 낡지 않는 이유
폭스가 세상을 떠난 1691년으로부터 334년이 흘렀다. 그 사이 퀘이커들은 교도소 개혁(엘리자베스 프라이, Elizabeth Fry, 1780~1845), 정신병원 개혁(윌리엄 튜크, William Tuke, 1732~1822), 노예해방, 반전운동, 분쟁해결 운동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굵직한 고비마다 등장했다.
1947년에는 영국과 미국의 퀘이커단체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수상 이유는 단순했다. 오랫동안, 조용히, 꾸준히, 옳은 일을 했다는 것.
시끄럽지 않았다. 화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조지 폭스, 구두장이 집안 출신의 이 사내는 왕도, 귀족도, 대주교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들판에서 혼자 외치기 시작한 한마디, 모든 사람 안에 빛이 있다 는 400년 뒤에도 꺼지지 않았다.
광장에서, 법정에서, 병원에서, 감옥에서. 어디서든 가장 약한 사람 곁에 서 있던 그 빛.
우리에게도 그 빛이 있다. 다만 가끔, 너무 많이 굽히고 있을 뿐이다.
페니 드레이톤에 있는 조지 폭스 기념비 옆에는 비교적 그의 삶을 자세하게 기록한 기념물이 있다. 김성수 시민기자 촬영
17세기 조지 폭스의 초상화.(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