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스러진 동료들 새긴 헬멧 쓰면 안된다고?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크라이나 스켈레톤 대표 블라디슬라프 헤라스케비치가 9일(현지시간) 이탈리아 코르티나담페초에 있는 코르티나 슬라이딩 센터에서 연습 주행을 갖고 있다. 그의 헬멧에는 러시아와의 전쟁에 스러진 운동 선수 등 여러 명의 얼굴들이 새겨져 있다. 코르티나담페초 로이터 연합뉴스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스켈레톤에 출전하는 블라디슬라프 헤라스케비치(26·우크라이나)는 헬멧에 러시아와의 전쟁에 스러진 동료 선수 등 여러 명의 얼굴을 새겼다.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의 넋을 달래고 조국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리겠다는 뜻에서였다.
이번이 세 번째 올림픽 무대인 헤라스케비치가 지난 9일(현지시간) 코르티나 슬라이딩 센터에서 이 헬멧을 쓴 채 연습 주행에 나서자 많은 매체들이 주목했다. 그는 연습 주행을 마친 뒤 로이터 통신에 헬멧에 그려진 사람들 중 일부는 내 친구들이었다 고 밝혔다.
헬멧에 새겨진 이들은 10대 역도 선수 알리나 페레후도바, 복싱 선수 파블로 이셴코, 아이스하키 선수 올렉시이 로기노프, 배우이자 운동선수 이반 코노넨코, 다이빙 선수이자 코치 미키타 코주벤코, 사격 선수 올렉시이 하바로프, 무용수 다리아 쿠르델 등이다. 헤라스케비치는 올림픽을 통해 전쟁에 대한 관심을 계속 고취시키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 이라고 강조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그의 헬멧이 올림픽 헌장에 명시된 규칙을 위반했다고 밝히고, 대신 목숨을 잃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 검은 완장을 착용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이라고 덧붙였다고 영국 BBC가 다음날 전했다. 올림픽 헌장 제50조 2항은 어떤 종류의 시위나 정치적, 종교적, 인종적 선전도 올림픽 경기장, 시설이나 기타 지역에서 허용되지 않는다 고 규정하고 있다.
선수단 기수로 지난 6일 개회식에 참가했던 헤라스케비치는 9일 인스타그램에 IOC가 공식 훈련과 대회에서 내 헬멧 착용을 금지시켰다 고 밝혔다. 그는 선수들, 국가올림픽위원회(NOC)들과 IOC의 연락 및 소통을 담당하는 츠루나가 도시오가 선수촌을 찾아와 이 내용을 통보했다고 전했다.
그는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결정이다. IOC가 올림픽 운동의 일원이었던 선수들을 배신하고 있다는 느낌, 그들(세상을 등진 이들)이 다시는 설 수 없는 스포츠 무대에서 기려지는 일을 허용하지 않는 느낌 이라고 털어놓았다. 나아가 IOC가 이런 추모를 허용했던 전례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우크라이나만을 위해 특별한 규칙을 정하기로 결정했다 고 개탄했다.
IOC 대변인 마크 애덤스는 우리는 처음부터 이 문제를 다뤘으며, IOC는 그 분쟁과 전 세계 다른 분쟁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선수들의 바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면서 우리는 선수들의 성과와 스포츠에 집중해야 하며, 모든 선수에게 평등한 권리가 보장되고 모든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게 지켜야 한다. 우리가 말한 것은 이 헬멧이 위에서 언급한 지침을 위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경기 중에 검정색 완장을 착용하는 것은 허용할 것이다. 그는 소셜 미디어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지만, 우리는 이것이 좋은 타협안이라고 생각한다 고 설명했다.
애덤스 대변인은 90개국이 넘는 나라가 이곳에 참가하고 있고, 수천 명의 선수들이 참가하며, 사람들이 기념하고 싶은 다양한 것들이 있다 면서 우리는 그런 환경에서 벗어나 올림픽에서 경쟁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만들고, 그들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그는 문구 없이 완장을 차도 된다. 우리가 어떤 표현에 동의하든, 미묘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그는 또 사람들이 항상 규칙을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면서 IOC는 각 사례를 개별적으로 평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규칙은 경기장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기는 어렵고 시스템을 악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슬로건을 금지해야 한다 고 덧붙였다.
2018년 평창 대회를 통해 올림픽 무대를 처음 밟은 헤라스케비치는 2022년 베이징 대회 중에도 우크라이나 전쟁을 반대한다 (No War in Ukraine) 문구를 들어 보인 일이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며칠 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로 진격하는 특수작전 에 들어갔다. 당시 IOC는 평화를 호소하는 일반적 메시지 로 판단해 그를 제재하지 않았다.
그는 경기장 안에서 정치적 시위를 금지하는 올림픽 규정을 준수한다면서 대회 기간 우크라이나가 처한 비극적인 상황, 전쟁은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의지를 밝혀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헬멧을 준비한 헤라스케비치가 우리 투쟁의 대가(무고한 희생)를 세계에 알렸다 고 찬사를 늘어놓았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텔레그램을 통해 이 진실은 불편하지도 부적절하지도 않고, 스포츠 행사에서의 정치적인 행위로 불릴 수 없다 면서 우크라이나는 평화와 생명을 존중하는 올림픽 운동의 역사적 사명에 충실하다. 러시아는 그 반대 라고 말했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한 이후, 러시아와 벨라루스 선수들은 대부분 국제 스포츠에서 제외됐으나, 이후 점진적으로 대회에 복귀하고 있다. IOC는 러시아 출신 13명의 선수를 개인 중립 선수(AIN)로 출전하도록 허용했다.
이탈리아계 아이티 디자이너 스텔라 장(가운데)이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로마 주재 아이티 대사관에서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에 참가하는 아이티 선수단 단복을 소개하고 있다. 설원이나 빙상에서 아주 돋보일 단복이다. 왼쪽 모델은 리비아 오데인, 오른쪽 모델은 메건 토머스. 로마 AP 연합뉴스
IOC 아이티 선수단 단복에서 독립 영웅 그림 빼
IOC는 동계올림픽에 두 번째로 참가하는 아이티 선수단 단복 디자인을 바꾸도록 압력을 넣었다. 아이티계 이탈리아 디자이너 스텔라 장이 단 두 명의 이 나라 선수를 위해 핸드 페인팅이란 가장 아날로그 방식으로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단복을 꾸렸다.
그런데 화려한 그림 속 한 인물이 문제가 됐다. 18세기 말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이티의 농민 반란을 이끌어 최초의 흑인 공화국을 수립한 건국 영웅 투생 루베르튀르의 얼굴을 문제 삼았다. 옥신각신 끝에 루베르튀르의 얼굴을 빼기로 했다.
우리로 얘기하자면, 유관순이나 김구 얼굴을 넣었다고 일본 눈치를 보며 빼라고 압력을 넣은 셈이다. 그런데 스텔라 장이 루베르튀르의 얼굴 대신 그가 타던 붉은 말을 그렸는데 오히려 주인 잃은 말 이 영웅이 지워진 조국 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되레 단복이 아이티가 처한 참담한 상황을 방증하게 됐다는 것이다.
2012년 런던올림픽 축구 남자 대표팀의 박종우가 독도 세리머니 를 펼쳤다가 국제축구연맹(FIFA)로부터 A매치 두 경기 출전 정지 징계를 받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순신 현수막 과 욱일기 반입을 놓고 한국과 일본 측이 날카롭게 충돌했던 일도 있었다.
정치적 의사 표현의 원조 격은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있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스프린터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는 육상 남자 200m 1위와 3위를 차지한 뒤 시상대 위에서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들의 ‘검은 주먹’은 미국 흑인의 차별받는 현실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은메달을 딴 호주의 백인 선수 피터 노먼도 둘에게 동조했다는 이유로 국가대표가 되지 못하는 등 셋 모두 불이익을 받았다. 하지만 반 세기가 지난 지금도 올림픽 역사에 가장 용기있는 행동으로 여겨진다.
2020년 12월 미국올림픽·패럴림픽위원회(USOPC)는 선수들의 정치적 의사표시에 대해 징계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선수들의 정치적 의사 표시를 제한한 올림픽 헌장 50조 2항과 배치되는 결정이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USOPC는 선수들이 메달 세리머니 때 ‘무릎꿇기’, ‘주먹 쥐어 올리기’ 등 평화적 저항을 표시하는 행동에 대해 징계를 내리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앞서 USOPC 선수위원회 소속 선수들이 제도 변화를 요구했고, USOPC가 오랜 고민 끝에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 한참 선배들인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도 기꺼이 함께 했다.
한국계 미국인 스노보드 대표 클로이 김이 9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리비뇨 기자회견을 통해 2026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하프파이프 출전을 앞둔 소회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동료 대표 공격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리비뇨 AFP 연합뉴스
선수들은 입도 벙긋 하지 말라는 거냐
이번 대회에 출전 중인 미국 선수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자국 선수 공개 비난에 잇따라 반응하며 선수의 발언권과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이 확산하고 있다.
스노보드 하프파이프의 간판이자 올림픽 2연패 금메달리스트인 한국계 클로이 김은 9일 리비뇨 기자회견 자리에서 이런 순간일수록 더 많은 사랑과 연민이 필요하다”면서 미국을 대표하는 것이 자랑스럽지만, 우리가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의견을 말할 권리도 있다”고 강조했다.
논란은 미국 프리스타일 스키 선수 헌터 헤스의 발언에서 시작됐다. 헤스는 최근 국기를 달고 뛴다고 해서 미국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며 자국 내 강경한 이민 단속과 정치적 긴장 상황에 대해 복잡다단한 감정을 느낀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헤스를 진짜 루저(loser)”라고 지칭하며 공개 비난했다.
클로이 김은 한국계 이민자 부모를 둔 자신의 배경을 언급하며 이 사안은 개인적으로도 매우 가깝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우리 가족에게 많은 기회를 줬지만, 동시에 우리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차세대 한국 스노보드 기대주 최가온을 언급하며 세대와 국적을 넘는 연대를 주장했다. 그는 최가온 같은 젊은 선수들이 자유롭고 안전한 환경에서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 며 우리가 지금 내는 목소리가 다음 세대 선수들에게도 중요한 메시지가 될 것 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스노보드 대표팀 동료들 역시 비슷한 입장을 밝혔다. 매디 마스트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외면할 수 없다”며 자비와 연민이라는 가치 아래 미국을 대표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선수 베아 김은 다양성이야말로 미국의 힘”이라며, 서로 다른 배경의 선수들이 한 무대에 서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중국 대표로 출전 중인 미국 태생 프리스타일 스키 스타 에일린 구도 헤스 지지를 표명했다. 그는 헤스가 처한 상황은 이길 수 없는 언론전처럼 보인다”며 초점은 정치가 아니라 스키에 맞춰져야 한다”고 말했다.
컬링 대표 리처드 루오호넨은 미네소타주 세인트폴 태생으로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에 대해 목소리를 냈다. 중환자실 간호사 알렉스 프레티와 러네이 니콜 굿(이상 37)이 같은 주 미니애폴리스에서 ICE 요원들에게 살해된 사건 이후 지난 몇 주간 미국 전역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루오호넨은 미네소타에서 벌어지는 일은 잘못됐다 면서 회색 지대가 없는 것은 명확하다. 지금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정말 좋다. 사람들이 나와서 사랑과 연민, 진실성, 그리고 모르는 이들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고 그들을 돕고 있다. 우리는 그런 점 때문에 미네소타를 사랑한다. 나는 미국 대표팀과 우리 나라를 대표하게 돼 자랑스럽지만, 미네소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모두에게 얼마나 힘든 시기였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면 실수일 것 이라고 털어놓았다.
이번 논란은 선수 안전 문제로도 이어졌다. ICE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게시한 뒤 위협을 받았다고 밝힌 미국 태생의 영국 프리스타일 스키 대표 거스 켄워디 사례까지 더해지며, 미국 선수단에서는 온라인 공격과 정치적 압박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켄워디는 이번 대회 개막을 일주일 앞둔 시점에 인스타그램에 자신이 설원 위에 소변으로 F*** ICE 라고 새긴 듯한 사진과 함께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더는 참을 수 없다. ICE가 우리 사회에서 아무런 견제 없이 권한을 행사하도록 방치하면 안 된다 고 비판했다.
그러자 살해 협박이나 극단을 선택하라느니, 경기 중 목이나 무릎이 부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느니 등등 온갖 얄궂은 메시지들이 쏟아졌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