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 잃어버린 10년 …전통 양당 지고 개혁당 떴다 [뉴스] 차기 영국총리로 요력시되는 앤디 번햄. 지난 18일 맨체스터 인근 메이커필드 지역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 번햄이 22일 런던 웨스트민스터의 국회의사당에 도착하고 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의 사임 이후, 번햄은 스타머의 후임으로 영국 총리직에 출마할 것이라고 밝혔다. 2026.6.22. EPA 연합뉴스
영국이 EU(유럽연합)에서 탈퇴(브렉시트)하기로 결정한 2016년 6월 23일 국민투표 실시 10주년을 하루 앞둔 22일 키어 스타머 영국총리가 사임 의사를 표명했다. 스타머는 2024년 총선 때, 브렉시트 결정 이후 5명의 총리들이 줄줄이 단명으로 임기를 끝낸 보수당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하며 압승을 거두고 14년만의 정권교체를 이뤄냈으나 그 자신도 집권 2년도 채우지 못한 채 그 대열에 합류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10년간 6번째의 총리사임이다. 그는 7월 중순에 실시될 노동당 당수 선거에서 그의 후임자가 새로 뽑힐 때까지만 총리자리를 지킬 것이다. 차기 노동당 당수이자 총리는 그레이터 맨체스터 시장을 지낸 뒤 노동당 내 반스타머 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고 지난 18일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앤디 번햄(Andy Burnham)이 유력하다.
브렉시트 이후 10년 고통뿐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10년 전 설마 EU 탈퇴 지지표가 더 많이 나올 리 있겠느냐는 오산 속에 국민투표 실시에 동의했던 탈퇴 반대파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예상밖의 결과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EU 이탈 찬성 52%, 반대 48%였다. 이후 테레사 메이, 보리스 존슨, 리즈 트러스, 그리고 리시 수낵에 이르기까지 4명의 보수당 총리들이 단기 집권 뒤 잇따라 물러났다.
이민이 줄어들고 경제는 회복될 것이라던 이탈 지지파들의 환상은 충족되지 못했으며 정치는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 이민은 브렉시트 이후 오히려 더 늘었다.
조사회사 유거브(YouGov)의 최신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7%가 EU 탈퇴(브렉시트)를 ‘잘 못한 것’이라고 응답했고, ‘잘 했다’는 30%에 그쳤다. 지난 20일 EU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시위에 참가한 한 여성은 브렉시트 이후의 세월을 두고 잃어버린 10년, 고통만 있었을 뿐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최근 5년간 식료품 가격은 40% 가까이 올랐고, 2022년의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과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침공으로 연료값도 급등했다.
2016년 EU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 이후 10년 동안 단기 집권 뒤 물러난 6명의 영국총리들. 맨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키어 스타머, 리시 수낵, 리즈 트러스, 데이비드 캐머런, 테레사 메이, 보리스 존슨. 2026.6.23. 로이터 연합뉴스
기대했던 노동당 정권도 뽀족한 수가 없었다.
스타머는 계속되는 경제 정체 속에 별다른 비전을 제시하지도 못한 채 정부 재정적자에 대처하기 위해 고령자용 겨울 난방비 지원금을 삭감하는 등 복지 지출 삭감을 시도하고 농가 상속세를 늘리려다 실패하는 등 실책을 거듭했다. 부자들한테서 옷과 축구경기 티켓을 선물받고, 주미 대사로 지명한 측근 피터 맨델슨이 미국의 억만장자 성범죄자 세프리 엡스타인과 친밀하게 지낸 사실이 폭로되는 등의 스캔들도 지지율을 끌어내렸다. 유거브(YouGov)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최근 1년 스타머 정권 지지율은 20% 이하로 내려갔고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70%를 오르내렸다. 지난 4월 여론조사에서 스타머 정권에 대한 지지는 15%, ‘지지하지 않는다’는 68%였다.
22일 사임의사를 표명할 때 경제와 공공의료 서비스 등에서의 실적을 열거하고 노동당 재건에서도 성과를 올렸다고 자찬했지만 실의 속의 퇴진임을 숨기지 못했다.
6월 22일, 영국 런던 다우닝가에서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사임 성명을 마무리하고 있다. 키어 스타머는 영국 총리 겸 노동당 대표직에서 사임했으며, 후임자를 뽑기 위한 당대표 경선이 시작되었다. 2026.6.22.EPA 연합뉴스
스타머 퇴진의 결정타는 지방선거 패배와 ‘번햄’ 등장
그가 결정타를 입은 것은 6월 18일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그를 대체할 인물로 노동당 내 반대파가 밀고 있는 앤디 번햄이 당선된 것이었다.
그에 앞서 스타머는 지난 5월 7일 실시된 지방선거 대패로 이미 큰 타격을 입었다. 런던 등 잉글랜드 지방의 약 5000 의석을 놓고 다툰 그 선거에서 노동당은 선거 전 의석의 60%에 상당하는 약 1500석을 잃었고, 웨일즈 의회(정족수 96석)에서도 1999년 의회 설립 이후 처음으로 제1당 자리를 내 주고 제3당으로 전락했다. 당 내에서 스타머 사임 요구가 커졌다..
보수당도 그 선거에서 선거 전 의석의 40% 가까이를 잃었다. 대신 의석을 대폭 늘린 것은 이민반대를 부르짖은 우익 포퓰리스트 정당인 ‘개혁당’ 등 우익세력이었다. 57%의 여론조사 응답자들이 브렉시트는 잘못 한 것이라고 대답했지만 브렉시트를 주창하고 주도한 세력이 선거에서 여전히 더 많은 표를 얻는 모순적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스타머 총리는 우리는 위기의 시대를 맞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위험한 대립상태에 직면하고 있다”며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지 않고, 도망가지 않는 책임”을 강조하며 계속 집권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노동당 내의 불만세력이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약 100명의 노동당원들이 총리의 조기 퇴진을 공개적으로 요구했고, 그들 중 한 명이 그레이터 맨체스터 시장을 지낸 전 국회의원 앤디 번햄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뒤, 번햄이 국정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이 물러나겠다며 의원직을 사퇴했다. 그 결과 중부 맨체스터 근교의 메이커필드 선거구에서 지난 18일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번햄이 출마했다.
원래 그 선거구는 지난 5월 지방선거 때 우익 개혁당(Reform UIK)이 대승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으나, 번햄은 보궐선거에서 약 55% 득표율로, 차점자인 개혁당 후보를 1만 표 가까운 표차로 따돌렸다.
그것이 결정타였다. 지방선거에서 대패한 스타머의 노동당이 바로 뒤에 치러진, 번햄이 출마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는 낙승했다. 스타머는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노동당은 지금 정족수 650석의 국회(하원)에서 60%가 넘는 403석을 차지하고 있고, 다음 선거까지 3년 남짓 임기가 남아 있어서 번햄이 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될 경우 국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실시할 가능성은 낮다.
번햄 정권마저 단명하면 다음은 우익 ‘개혁당’
하지만 만일 7월 중순에 노동당수 선거를 거쳐 탄생한 번햄 총리 정권 역시 별다른 돌파구를 열지 못한 채 단명으로 끝난다면 그 다음은 우익 포퓰리스트 정당 개혁당이 정권을 탈취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렇게 될 경우 보수당과 노동당이 벌갈아가며 약 100년을 지배해 온 영국 양대 정당 정치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될 것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노동당 지지율은 19%, 보수당 지지율도 19%에 그쳐, 24% 지지율을 얻은 개혁당에 뒤졌다.
반이민, 반EU 자세를 취하고 영국의 EU 이탈을 강력하게 주장해 온 개혁당은 2018년에 ‘브렉시트 당’으로 출발해 2021년에 ‘개혁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2024년 총선에서 개혁당은 14.3%의 득표율을 얻었고, 지난 5월의 지방선거에서는 잉글랜드 지역에서 약 1450석을 확보했다. 선거 전 의석은 단 2석이었다. 엄청난 약진이다.
여기에는 1993년 EU 출범 때부터 영국의 EU이탈을 주장해 온 나이절 패라지가 이끌었던 또 다른 우익정당 독립당(UKIP)의 흐름도 가세하고 있다. 지금은 독립당을 떠난 패라지는 보리스 존슨과 함께 브렉시트를 주도했다. 보수, 노동 양대 정당에서 답을 찾지 못한 다수의 영국 유권자들이 우익 포퓰리스트들 속에서 새로운 ‘구세주’를 찾고 있는 형국이다.
지지자들에 둘러싸인 앤디 번햄. 가디언 6월 22일
번햄이 돌파구를 열 수 있을까?
번햄은 이런 우익의 득세에 맞설 수 있는 리더로 노동당 내에서 기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22일 스타머의 총리직 사임의사 표명 뒤 SNS를 통해 당대표선거에 출마할 뜻을 밝혔다.
하지만 번햄이 정권을 잡더라도 영국 상황이 일거에 개선될 것으로 기대하긴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 중론이다. 막대한 정부 부채(재정 적자)로 인한 예산편성상의 제약, 중동정세 악화에 따른 에너지 가격 급등 등 풀기 어려운 난제들이 산적해 있다.
영국정부 순부채는 현재 약 2조 9110억 파운드(약 5900조 원)로, GDP(국내총생산)의 약 94~95%를 차지한다. 2007~2008년에는 GDP 대비 정부 부채비율이 35% 수준이었으나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과 그 뒤의 겅제침체 여파로 급증했다. 이 때문에 정부의 부채 상환 및 이자 지급액이 치솟아 재정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2016년 6월의 국민투표와 2020년 1월에 탈퇴절차를 공식적으로 마무리할 때까지 영국에서는 혼란이 이어졌다. 공식 탈퇴 이후 무역이 정체되고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파장 등이 겹치면서 경제 하락 추세는 더 가팔라졌다.
저성장으로 세수가 정체된 가운데 사회보장비와 국방비는 늘었다. 우익 포퓰리스트 세력이 대중의 인기를 얻으면서 사회보장비 삭감 및 조정 노력은 실패했고, 성장을 위한 투자비 마련도 어려워져 전환을 위한 대담한 정책 시행도 난관에 부닥쳤다. 이것이 2016년 국민투표 이후 스타머 정권에 이르기까지 지난 10년간 역대 정권들을 단기 퇴진으로 내몬 상황이었다.
‘영국문제’의 본질은 이민 아닌 공공정책의 실패
영국 문제의 본질은 이민이 아니라 공공정책의 실패라는 지적이 있다. 2008년 미국발 세계 금융공황 뒤 캐머런 정권은 긴축재정을 펴면서 사람의 흐름에 대응하는 정책수단을 폐기했고, 비EU권까지 포함해서 연간 30만 명 규모의 이민을 받아들이면서 교육, 의료, 주택 등의 공공 서비스는 지원하지 않아 지방을 중심으로 불만이 쌓여 갔다. 브렉시트 지지파가 다수표를 얻은 데에는 그런 상황에서 보수당 지지층이 움직인 영향이 컸다.
영국에서는 건강문제를 이유로 일하지 않고 정부 지원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스타머 정권은 이 지원금을 줄이려 했으나 노동당 내부 반발로 그마저 실패했다. 반이민을 내세운 우익 개혁당에 대항하기 위한 엄격한 이민 제한도 오히려 경제성장을 약화시켰다는 지적을 받았다.
비현실적인 EU 재가입 구세주는 없다”
EU에 다시 가입하자는 목소리도 있으나, 우익이 지지기반을 넓혀 가고 있는 지금 다시 국민투표를 실시할 경우 재가입 쪽이 다수표를 얻는다는 보장도 없다. 찬반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거세지면서 상처만 더 키울 가능성이 있다.
EU와의 관세동맹이나 단일시장 쪽으로의 부분적인 접근 등 단계적인 관계 개선이 더 현실적이라는 지적들이 있다.
결국 문제를 단번에 풀어 줄 해결책도 요술 방망이를 든 구세주도 없다는 얘기다. 차기 정권을 맡게 될 가능성이 큰 번햄 정권마저 실패하고 단명으로 끝난다면 2029년까지는 실시해야 할 다음 총선에서 개혁당이나 우익연합이 노동・보수 2대 정당을 누르고 영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집권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한승동 에디터 sudohaan@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