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훔친 여자, 노예제를 박살낸 해리엇 터브먼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역사책에는 영웅이 참 많다. 대부분 남자고, 대부분 말을 탔으며, 대부분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 1822~1913)은 좀 다르다. 그녀는 말 대신 두 발로 뛰었고, 동상 대신 지하도를 남겼다. 미국 정부가 20달러짜리 지폐에 그녀 얼굴을 넣겠다고 수십 년째 논의 중인데, 아직도 결론이 안 났다는 사실이 어쩌면 그녀를 가장 잘 설명하는 농담일지도 모른다. 권력은 언제나 자유를 향한 얼굴을 지폐 속에 가두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터브먼은 1822년 미국 메릴랜드주 도체스터 카운티에서 노예로 태어났다. 본명은 아라민타 로스(Araminta Ross). 해리엇 은 어머니 이름에서, 터브먼 은 결혼 후 남편 성에서 따온 것이다. 어린 시절, 감독관이 던진 쇳덩이에 머리를 맞아 평생 발작과 수면장애를 안고 살았다. 뇌 손상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중증 장애인이다. 그런 그녀가 남긴 말이 있다.
좀 더 많은 노예들을 일깨울 수 있었더라면 수천 명 더 많은 노예들에게 자유를 찾아줄 수 있었을텐데...
뇌를 다친 사람이 이 정도 통찰을 가졌다면, 멀쩡한 뇌를 가진 사람들이 왜 그토록 오래 복종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터브먼, 1868년 아니면 1869년.(위키피디아)
지하철도, 땅 속에 없던 철도
1849년, 스물일곱 살의 터브먼은 홀로 도망쳤다. 약 150킬로미터를 걸어 북부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 닿았다. 그 뒤 그녀는 그냥 거기 눌러앉지 않았다. 다시 남쪽으로 돌아갔다. 열세 차례. 약 70명의 노예를 이끌고 탈출에 성공했다. 한 번도 들키지 않았다.
이 탈출 경로를 사람들은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 라 불렀다. 물론 진짜 철도가 아니다. 노예들을 숨겨주는 사람들의 집, 헛간, 교회로 이어진 비밀 연결망이었다. 터브먼은 이 망의 핵심 차장(conductor) 이었다. 남부 농장주들은 그녀의 머리에 현상금 4만 달러(오늘날 가치로 수십억 원)를 내걸었다. 잡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의 전술은 단순했다. 탈출은 반드시 토요일 밤에 시작했다. 일요일에는 노예 주인들이 쉬느라 도망 공고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북극성을 나침반 삼아 걷고, 낮에는 숨고, 포기하려는 사람에게는 총을 들이밀었다. 죽든지, 자유를 얻든지. 인정머리 없어 보이지만 사실 이보다 더 인정 넘치는 말은 없다. 한 명이 포기하면 전체가 잡혀 죽을 수 있었으니까.
그는 1896년 여성참정권대회 연설을 통해 나는 8년간 지하철도의 차장이었다. 내가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단 한 번도 기차를 탈선시키지 않았고, 단 한 명의 승객도 잃지 않았다 고 자랑스러워했다.
민티 (해리엇 터브먼)와 그녀의 형제 헨리, 벤을 체포하여 데려오는 사람에게 각각 미화 100달러(2025년 기준 3870달러에 해당)의 현상금을 지급한다는 공고.(위키피디아)
전쟁터에서도, 투표장에서도
남북전쟁(1861~1865)이 터지자 터브먼은 또 달렸다. 이번엔 북군 첩보원이었다. 1863년, 그녀는 흑인병사 300여 명을 이끌고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컴바히 강 기습작전을 지휘했다. 700명 이상의 노예를 해방시켰다. 미국 역사상 무장작전을 이끈 최초의 여성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그녀가 국가에 청구한 연금은 수십 년이 지나서야 지급됐다. 그것도 남편의 유족 자격으로. 그녀 자신의 공로로는 끝내 받지 못했다.
전쟁 이후에도 터브먼은 멈추지 않았다. 여성참정권 운동에 뛰어들었다. 수전 B. 앤서니(Susan B. Anthony, 1820~1906),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Elizabeth Cady Stanton, 1815~1902) 같은 운동가들과 함께였다. 그녀의 나이 예순을 훌쩍 넘긴 때였다. 마침내 1913년, 아흔한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기 직전, 주변 사람들에게 남긴 말은 이랬다.
나는 천국에 가는 기차를 준비해놨어요. 함께 갑시다.
기차 비유를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다. 이 양반, 평생 철도 곁을 떠난 적이 없었나 보다.
해리엇 터브먼 기념 은화 앞면.(위키피디아)
한국이 터브먼에게 물어야 할 것들
자, 여기서 잠깐 한국 이야기를 꺼내보자.
터브먼의 삶에서 가장 무서운 대목은 탈출 장면이 아니다. 탈출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장면이다. 노예 중 상당수는 그래도 지금 여기가 낫다 고 했다. 낯선 곳의 자유보다 익숙한 곳의 굴종을 택했다. 터브먼은 이것을 가리켜 자신이 노예인 줄 모르는 상태 라 불렀다.
한국에서 자신이 노예인 줄 모르는 풍경을 목격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몇 가지만 짚어보자.
첫째, 제도 안에서만 싸우려는 습관. 터브먼은 법을 통해 자유를 얻으려 하지 않았다. 1850년 미국에서는 도망노예법(Fugitive Slave Act) 이 통과돼, 북부에서 잡힌 도망 노예도 남부로 돌려보내야 했다. 법이 불의할 때, 그녀는 법 바깥의 길을 만들었다. 한국에서 부당한 법과 제도 앞에 우리는 법을 지켜야 한다 며 멈추는 사람들에게 터브먼은 물을 것이다. 그 법이 누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는 물어봤나요?
둘째, 고통 받는 사람이 침묵하는 구조. 노예제도의 가장 정교한 장치는 채찍이 아니라 수치심이었다. 나는 왜 이 모양인가 라는 내면화된 굴욕이 저항을 막았다. 오늘날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 세입자, 요양보호사 등이 부당한 처우에도 내가 못나서 라고 자책할 때, 그 구조는 정확히 같다. 터브먼이라면 총을 들이밀며 말했을 것이다.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일어나세요.
셋째, 연대의 힘과 배신의 위험. 지하철도는 혼자 만든 것이 아니었다. 백인 퀘이커교도들, 자유흑인들, 이름 없는 수십 명이 목숨을 걸고 문을 열어줬다. 한국사회에서도 각자의 영역에 갇혀 나만 살면 된다 는 고립이 깊어지고 있다. 성별, 세대, 지역, 계층이 서로를 의심한다. 터브먼의 지하철도는 이 분열에 대한 오래된 반박이다.
넷째, 권력은 얼굴을 지폐에 넣어 길들이려 한다. 미국정부가 터브먼을 20달러 지폐에 넣겠다는 발표를 한 건 2016년이었다. 도널드 트럼프(1946~) 1기 행정부가 이를 뒤집었고, 조 바이든(1942~) 행정부가 다시 추진했으나 2026년 현재도 실현되지 않고 있다. 저항의 얼굴을 돈 위에 새기는 것이야말로 저항을 박제하는 가장 세련된 방법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기념관에 갇히고, 5·18이 달력 속 빨간 글씨로만 소비될 때,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박제다.
해리엇 터브먼 기념 은화 뒷면.(위키피디아)
기차는 아직 떠나지 않았다
해리엇 터브먼은 위인전의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머리에 쇳덩이를 맞고도, 발작을 일으키면서도, 현상금이 걸린 채로도 달린 사람이다. 완벽한 조건을 기다리지 않았다.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라 두려운데도 발을 뗐다.
그녀의 삶이 한국사회에 남기는 질문은 하나다.
당신은 지금, 자신이 노예인 줄 알고 있습니까?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터브먼은 알았고, 또한 떠났다. 그리고 돌아왔다. 혼자 자유로워지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차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토요일 밤, 북극성은 아직 그 자리에 있다.
남북전쟁 당시 복장을 한 터브먼의 목판화.(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