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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셀 참사 2년…피해자 조롱·책임 떠넘기기 여전
[사회혁신]
오늘, 2026년 6월 24일은 경기도 화성에서 아리셀 참사가 발생한 지 2년이 되는 날이다. 2년 전 화성의 리튬전지 공장에서 23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참사 현장 앞에는 추모 표지석이 세워졌고, 조만간 추모 공간도 마련될 예정이다. 그러나 참사 직후 대통령의 민방위복과 시나브로 카메라 플래시가 사라진 뒤 이어진 시간은 거의 온전히 유가족과 이주노동자 활동가들이 감당해야 했다. 아리셀 참사 2주기를 맞아 슬픔보다는 분노가 앞선다. 참사를 대하는 법원의 판단이 1심과 2심 사이에서 너무도 멀리 갈라졌기 때문이다. 2025년 9월, 1심 재판부는 아리셀 박순관 대표와 박중언 총괄본부장에게 각각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참사를 ‘불운한 사고’가 아니라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던 인재로 보았다. 또한 생산라인의 열감지 장치 미설치, 참사 이틀 전 발생한 전지 폭발에 대한 후속 조치 부재, 안전교육과 대피체계의 미비를 책임의 근거로 판단했다.   아직 여기 있다 아리셀 참사 2주기 추념식에서 발언하고 있는 우다이 라이 이주노조 위원장. 2026. 6. 24 손정순 합의 핑계로 중대재해처벌법 무력화한 아리셀 참사 항소심 그런데 2026년 4월 항소심은 박 대표의 형을 4년, 박 본부장의 형을 7년으로 대폭 감형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을 사실상 무력화한 판결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비상구 설치·유지 의무를 좁게 해석하고, 중대재해처벌법상 일부 의무 위반과 사고 사이의 관련성도 부정했다. 위험물질을 다루는 작업장이 3층에 있어도 건물 전체에 비상구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식의 해석은, 법에 ‘모든 층’이라고 명시돼 있지 않다는 법조문에 기대고 있다. 그러나 비상구가 실제로 기능하고 노동자들이 그 위치와 사용법을 알았더라면 23명의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는 현실은 외면했다. 참사가 드러낸 구체적 위험보다 백면서생같은 법조문 해석을 내놓은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감형의 논리다. 2심 재판부는 유가족과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점, 경영책임자를 강하게 처벌하면 오히려 피해 회복이 늦어질 수 있다는 황당한 이유를 들어 경영책임자의 형사책임을 크게 덜어 주었다. 합의를 피해 회복과 용서가 완료된 증표처럼 다룬 것이다. 일부 유족은 생계를 위해 민사상 합의를 했을 뿐 처벌불원서를 제출한 적이 없다고 호소했다. 합의는 무너진 삶을 버티기 위한 수단일 수 있지만, 국가가 기업의 책임을 깎아 주는 영수증일 수는 없다. 더구나 국경을 오가며 언어와 체류, 장례와 생계의 장벽을 함께 감당해야 하는 이주노동자 유가족에게 합의는 자유롭고 대등한 선택이 되기 어렵다. 이런 불평등한 조건에서 이루어진 합의를 감형의 근거로 삼는 순간, 가장 절박한 피해자일수록 가해자의 형량을 더 많이 줄여 주는 역설이 생긴다. 참사에 대한 법적 심판은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참사를 바라보는 사법부와 유가족의 시선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르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대책위 및 유가족협의회 회원들이 17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아리셀 박순관 대표와 박중언 본부장에게 징역 4년, 징역 7년에 벌금 100만원을 선고한 2심 재판부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6.6.17 연합뉴스 사고 책임을 아래로, 피해자에게 돌리는 사회 구조 아리셀 참사는 ‘위험의 이주화’를 사회적 의제로 끌어올렸다. 그 뒤 노동자 일터는 달라졌을까? 2026년 3월 20일 대전 안전공업공장 화재로 14명이 숨지고 60명이 다치는 참사가 또다시 발생했다. 수사 과정에서 불법 증축된 복층 공간과 취약한 대피로, 가연성 물질의 방치, 폭발 위험이 있는 흄이 작업장에 가득 차 있었던 정황이 드러났다. 화재경보기는 울리다가 누군가가 조작해 꺼진 것으로 조사됐고, 경보기 옆 메모에는 화재 확인 절차가 아니라 ‘끄는 방법’만 적혀 있었다. 이미 확인된 사실만으로도 아리셀과 닮은 구조가 선명하다. 경고는 생산을 방해하는 소음으로 취급되고, 피난 공간은 비용과 효율의 뒤로 밀리며, 안전 법제는 노동자가 죽고 난 뒤에야 현장에서 작동한다. 일하는 장소와 희생자의 국적은 달랐지만 위험을 아래로 떠넘기는 방식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 구조는 노동현장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국 사회가 참사를 대하는 방식에도 익숙한 순서가 있다. 처음에는 함께 울고 분노한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해자에게 왜 거기 있었느냐”고 묻는다. 세월호 유가족의 단식 앞에서는 ‘폭식’ 시위와 보상 특혜 괴담이 벌어졌고, 이태원 참사 희생자에게는 왜 놀러 갔느냐”는 비난이 쏟아졌으며, 분향소 곁에서는 유족을 향한 조롱이 이어졌다. 무안공항 제주항공 참사 뒤에는 유가족 대표를 ‘가짜 유족’이나 특정 정당의 사람으로 몰아가는 허위 글이 퍼졌다. 국가와 자본의 책임을 따지는 대신 피해자의 선택을 심문하고 유족의 의도를 의심하는 것이다. 그렇게 피해자는 권리를 요구하는 시민에서 보상과 특혜를 노리는 골칫거리로 바뀐다. 아리셀 유가족도 이 악순환을 피하지 못했다. ‘떼○이 결국은 죽어서 떼돈을 벌었네’라는 조롱이 지금도 인터넷을 떠돈다. 그런 말이 아무렇지 않게 오가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마주할 때마다 필자는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깊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노동자 목숨도 국적 따라 차이가 있나 사회적 참사 피해자를 모욕하는 언어와 이주노동자를 배척하는 언어는 뿌리가 같다. 둘 다 ‘우리’의 경계를 좁히고, 그 경계 밖의 사람에게는 안전과 존엄을 덜 보장해도 된다는 생명의 위계를 만든다. 아리셀은 그 위계를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드러냈다. 한국 경제는 이제 이주노동자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을 한국 사회 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데에는 여전히 인색하다. 고용노동부 산재 통계에 따르면 2026년 1분기 산업재해 사망자 가운데 이주노동자는 15.9%를 차지한 반면, 이주민 취업자가 전체 경제활동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3.6%였다. 단순 비교만으로 모든 원인을 설명할 수는 없으나 위험이 누구에게 집중되는지는 선명하다. 한국 사회는 이주노동자가 필요할 때는 ‘외국 인력’이라 부르고, 권리와 안전을 요구하면 ‘세금 한 푼 내지 않는 외국인’이라고 밀어낸다. 경제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면서도 정치적·사회적으로는 공동체 밖에 세워 두는 이중성이다. 참사 직후 공중에서 본 사고 현장. 연합뉴스 왜 이주노동자는 작업장 안팎에서 끊임없이 타자로 남아야 하는가. 그 이유를 문화 차이에서 찾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가린다. 타자화는 값싸고 순응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제도와 관행, 배제와 차별이 일상화된 비민주적 작업장 체제가 만들어 낸 결과다. 그 이면에는 ‘노동자라고 다 같은 노동자가 아니다’ ‘나는 너보다 우월하다’는 위계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1980년대까지 사무직 노동자가 이촌향도(離村向都)의 생산직 노동자를 ‘공돌이’ ‘공순이’라고 비하하던 관행도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오래된 작업장 내 비하, 배제, 멸시 관행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시대 변화에 따라 대상을 바꾸며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오늘날 이주노동자를 향한 혐오와 배제로 이어지고 있다. 산업 현장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주노동자 차별과 모욕 최근 1~2년 사이 알려진 사례만 돌아봐도 현실은 참담하다. 전남 영암 축사에서 일하던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질환으로 숨진 뒤 시신이 산에 유기된 사건, 전남 나주 벽돌공장에서 이주노동자를 벽돌과 함께 포장해 지게차로 들어 올리며 희롱한 사건, 경기 용인 달걀포장업체의 베트남 여성 노동자 폭행 사건, 인천 서구 섬유공장의 방글라데시 노동자 집단·상습폭행 사건이 있었다. 경기도 화성 자동차부품업체에서는 이주노동자의 항문에 에어건을 ‘재미로’ 쏴 중상을 입혔고, 경북 영천 제조업체에서는 이주노동자를 ‘원숭이 1번, 2번, 3번’으로 부르며 폭언과 폭력을 가했다. 강원 양구의 필리핀 계절노동자 집단 임금체불과 중간착취, 전남 해남·고흥·완도에서 벌어진 계절 이주노동자 임금 착취도 이어졌다. 뉴스에 드러난 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비하와 멸시가 일상이 된 곳에서 폭력과 착취는 예외가 아니라 구조가 된다. 일상화된 배제와 차별은 능력주의를 배경으로 한국 사회 극우 정치의 정서적 토양이기도 하다. 해법의 출발점은 이주노동자를 보호와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는 데 있다. 사업장 이동의 실질적 자유를 보장하고, 다국어 안전교육과 실제 대피훈련을 유급 노동시간에 실시해야 한다. 위험을 느낀 노동자가 체류자격이나 해고를 걱정하지 않고 작업을 멈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불법파견을 상시 감독하고, 모회사와 원청, 공급망 상위 기업에도 실질적인 안전책임을 물어야 한다. 중대재해 사건에서는 민사상 합의와 처벌불원 의사를 엄격히 구분하고, 경영책임자 처벌과 기업 벌금이 실제 예방 효과를 갖도록 양형 기준을 정비해야 한다. 기억과 추모 넘어 모두가 권리 주체로 인정받는 시작 돼야 앞으로 마련될 아리셀 참사 기록·추모 공간과 조사 과정에는 국적과 언어를 넘어 유가족이 동등하게 참여해야 한다. 언론과 시민은 희생자의 국적보다 먼저 그들의 이름과 삶을 보고, 유가족의 요구를 ‘정치화’가 아니라 정당한 시민적·민주적 요구로 받아들여야 한다. 노동조합 역시 ‘내 일자리를 빼앗는 외국인’ ‘내 노동조건을 갉아먹는 외국인’이라는 조합원의 평균적 인식을 넘어 이주노동자를 동료 노동자이자 조합원으로 조직하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   1일 오후 경기 화성시청에서 열린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시민 추모제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지난달 24일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소재 일차전지 업체인 아리셀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31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2024.7.1 연합뉴스 손정순 시화노동정책연구소 연구위원 기억은 마음속에 오래 간직하는 감정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다시 죽지 않도록 안전과 권한을 나누는 사회적 실천, 노동자 특히 이주노동자의 정당한 요구에 귀 기울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리셀 2주기에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23명을 아직 기억하느냐는 질문만이 아니다. 이주노동자가 위험한 지시를 거부할 수 있는가, 낯선 언어를 쓰는 노동자도 비상구를 알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유족이 모욕당하지 않고 진실을 요구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모든 생명을 똑같이 애도하고 모든 노동자에게 똑같은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는 극우의 토양을 말려 버린다. 반면에 ‘외국 인력’은 환영하면서 작업장 안팎에서 ‘외국인’은 밀어내는 사회는 또 다른 참사를 방조하는 것이다. 아리셀 참사 2주기는 추모의 끝이 아니라 ‘누구도 타자가 아닌 사회’를 만드는 시작이어야 한다.손정순 노동판 ksjso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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