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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한국사람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조지 오글 목사

한국사람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조지 오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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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종류의 외국인 선교사가 있다. 하나는 너희는 불쌍하니 내가 구원해주마 하며 성경 한 권을 들이밀고 돌아가는 사람. 다른 하나는 그 나라 사람보다 그 나라를 더 깊이 사랑해서, 결국 그 나라에서 쫓겨나는 사람. 조지 오글(George E. Ogle, 한국 이름 오명걸·吳明傑, 1929~2020)은 후자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경우였다. 그는 쫓겨나는 비행기 트랩 위에서 한국말로 대한민국 만세! 를 외쳤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그의 전기는 쓰고 남는다. 추방당하면서 만세를 부르는 사람이라니. 이건 비장미도 아니고, 그냥 사랑이다.   조지 오글, 오명걸, 작은 예수를 추모하며 - 당당뉴스 탄광촌 소년, 인천 공장골목에 서다 오글 목사는 1929년 1월 17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트케언에서 태어났다. 탄광과 제철소 노동자들이 땀을 파는 동네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삼촌들, 이웃들이 먼지 마시고 허리 휘도록 일하는 것을 눈에 담고 자랐다. 훗날 그가 나는 어디를 가든 내 배경을 가지고 간다 고 말한 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1954년 듀크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연합감리교회 선교사로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한국전쟁의 포연이 가신 지 겨우 1년. 부서진 나라의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공주, 대전 등지의 기독교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한국말을 배웠고, 한국 사람의 마음을 배웠다. 잠시 미국으로 돌아가 1959년 도러시 린드먼(Dorothy Lindman)과 결혼한 뒤, 1961년 다시 한국으로 왔다. 이번엔 다른 사람이 되어서. 인천의 공장 골목을 걸으며 그는 보았다. 방직공장 소녀들이 열두 시간, 열네 시간을 서서 일하고, 노동이라는 단어조차 모른 채 착취당하는 현실을. 피트케언의 기억이 인천에서 되살아났다.   노동·민주화 운동 대부 조지 오글 목사 1주기…고난함께, 온라인 추모관 잇닿다 개관  - 뉴스앤조이 도시산업선교회 라는 씨앗 한 알 1961년 오글은 인천에 도시산업선교회를 세웠다. 지금 듣기엔 멀쩡한 이름이지만, 당시 이 기관의 정체는 꽤 불온했다. 노동자에게 노동법을 가르치고, 단체협상이 뭔지 알려주고, 너희도 권리가 있다 고 말하는 곳이었으니까. 박정희 독재정권의 시선에 이곳은 그냥 빨갱이 소굴 이었다. 오글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973년 위스콘신대학교에서 국제산업관계학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학교에서 노사관계를 가르쳤다. 미국인이 한국노동자들의 권리를 가르치는 상황 자체가 이미 아이러니였다. 정작 가르쳐야 할 자리에 있는 이들은 침묵했으니까. 그를 아끼는 이들은 그가 조승혁, 조화순 같은 산업선교 일꾼들을 발굴하도록 도왔다. 씨앗을 심은 자는 오글이었고, 그 씨앗들은 훗날 한국노동운동의 뿌리가 되었다.   노동·민주화 운동 대부 조지 오글 목사 1주기…고난함께, 온라인 추모관 잇닿다 개관  - 뉴스앤조이 기도 한 번이 폭탄이 된 날, 1974년 인혁당 사건 역사의 변곡점은 늘 작은 데서 온다. 1974년 9월, 박정희(1917~1979) 정권은 이른바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인혁당 사건)을 발표했다. 우홍선(1934~1975)을 비롯한 8명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국가를 전복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고문으로 뜯어낸 자백, 비밀 군사재판, 그리고 사형 선고. 훗날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2007년 재심 법원이 완전한 무죄 를 선언했으니, 이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국가가 조작한 살인극이었다. 그런데 사형 선고를 받은 우홍선의 아내가 오글 목사를 찾아왔다. 남편을 살려달라고. 오글은 주저했다. 저는 정치문제엔 영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조사는 해보겠습니다. 이 짧은 한마디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었다. 1974년 10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목요기도회.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 사복경찰이 깔려있었다. 오글은 단상에 올랐다. 그리고 기독교인뿐 아니라 비기독교인 사형수 8명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기도가 폭탄이 된 순간이었다. 중앙정보부가 그를 잡아가 빨갱이 임을 자백하라고 했다. 그는 거부했다. 1974년 11월, 오글은 인혁당 피해자 가족들의 이야기를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전했다. 기사가 터지자 국제사회가 술렁였다. 당황한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2월 14일, 오글에게 강제추방 명령을 내렸다. 20년을 살았던 땅에서, 짐 한 보따리 들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 비행기 트랩 위에서 그는 외쳤다. 대한민국 만세! 쫓아낸 쪽은 이겼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착각이었다.   1975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조지 오글 목사 강연회 소식이 사진과 함께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기관지 ‘한민신보’에 실렸다. 추방 이후, 더 넓은 세상에서의 싸움 미국에 돌아간 오글은 침묵하지 않았다. 미국 연방의회 청문회에 나가 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증언했다. 미국 전역을 돌며 한국의 인권 실태를 알렸다. 1975년 4월 9일, 인혁당 관련 8명이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전격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망연자실했다. 국제앰네스티가 사법살인 이라 부른 그 죽음들 앞에서. 이후 에모리 대학교 캔들러 신학대학원에서 교수로 일하면서(1975~1981) 『포로의 자유』를 썼고, 연합감리교회 교회와 사회국에서 사회·경제 정의를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1981~1991). 1990년에는 『한국: 경제 기적의 이면』을 출간해 한국의 산업화가 얼마나 많은 노동자의 피와 눈물 위에 세워진 것인지를 세계에 알렸다. 1995년에는 북한을 방문했고, 1998년에는 김대중(1924~2009)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받았다. 한때 그를 내쫓았던 나라가 다시 불렀다. 2002년, 한국인권문제연구소로부터 한국인권상을 받았다. 2007년에는 코리아타임스가 선정한 한국인이 기억하는 외국인 10인 에 이름을 올렸다. 2020년 6·10민주항쟁 33주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민주주의 발전 유공 국민포장 을 받았다. 그리고 2020년 11월 15일, 미국 콜로라도 주 라파예트에서 91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조지 오글 목사는 부인 도로시 오글과 함께 1954년 한국에 파견되어 1남2녀를 두고 1974년 강제추방 당할 때까지 20년 동안 산업선교와 민주화 지원 활동을 펼쳤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한국이 그에게서 배울 것, 지금, 이 순간에 오글 목사의 이야기가 지금의 한국에 건네는 말은 무엇인가. 첫째, 외부인의 눈이 때로 진실에 더 가깝다. 그는 한국인이 아니었기에, 오히려두렵지 않았다. 추방당해도 잃을 시민권이 없었고, 해고당해도 돌아갈 나라가 있었다. 역설적으로 그 외부인성 이 그를 더 자유롭게 했다. 오늘날 한국에서 언론인이, 학자가, 공직자가 나는 잃을 것이 너무 많다 며 침묵을 택할 때, 오글의 삶은 조용히 묻는다. 그래서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둘째, 연대는 국경을 넘는다. 오글은 혼자가 아니었다. 제임스 시노트(James Sinnott, 1935~2011) 신부를 비롯한 외국선교사 모임, 국제앰네스티, 미국 의회의 양심적인 의원들과 함께 싸웠다. 지금 이 땅에서 노동권, 이주민 인권, 장애인 이동권 등을 위해 싸우는 이들이 각자 외로운 섬처럼 고립되어 있다면, 오글이 보여준 초국적 연대의 정신을 다시 꺼내 볼 필요가 있다. 셋째, 국가폭력에 대한 기억은 반드시 기록되어야 한다. 인혁당 사건은 2007년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그러나 그 무죄판결이 나오기까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유족들은 빨갱이 가족 이라는 낙인을 안고 살았다. 기억을 지우려는 권력에 맞서 기록을 남기는 일, 오글이 한 일의 절반이 바로 그것이었다. 넷째, 신앙이든 철학이든, 소신은 행동으로 완성된다. 오글은 성경을 읽었지만, 성경구절을 외치며 현실에서 도망가지 않았다. 그는 공장에 들어갔고, 기도회에 나갔고, 청문회장에 섰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 지금 이 땅에서 정의 와 공정 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이 정작 불의 앞에서 눈을 감는다면, 오글의 삶은 그 자체로 가장 날카로운 풍자가 된다.   2002년 10월 15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외국 민주인사’ 초청으로 방문한 조지 오글(맨왼쪽) 목사가 제임스 시노트(왼쪽 둘째) 신부와 함께 ‘인혁당 조작 사건 유족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비행기 트랩 위의 그 사람에게 조지 오글, 당신은 참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20년을 살았던 나라에서 쫓겨나면서 그 나라 말로 만세를 불렀으니까요. 추방당한 사람이 만세를 부르면, 도대체 이긴 쪽은 어느 쪽입니까? 역사가 이미 답을 냈습니다. 당신이 기도했던 사람들은 무죄를 선고받았고, 당신을 쫓아낸 정권은 총탄 아래 스러졌습니다. 당신이 씨앗을 심은 인천의 공장골목에서 자란 노동운동은 마침내 민주주의의 한 기둥이 되었습니다. 한국 사람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다고들 했지만, 어쩌면 당신은 그냥 사람을 사랑했던 것 아닐까요. 인천의 공장소녀도, 사형수의 아내도, 피츠버그 탄광의 삼촌도, 모두 같은 무게의 사람으로.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오명걸(吳明傑). 밝을 명, 굳셀 걸. 이름대로 사셨습니다.   1974년 12월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강제 추방 당했던 조지 오글 목사는 20년 만인 1994년 민청학련운동 계승사업회 초청으로 부인 도로시 오글과 나란히 다시 한국을 방문했다. 오글 목사의 왼손 약지에 추방 직전 ‘인혁당 조작 사건’ 사형수 우홍선의 부인이 여비로 쓰라고 끼워준 금반지가 보인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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