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로그인   회원가입   초대장  
페이지투미   페이지투미 플러스
페이지투미 홈   서비스 소개   아카이브   이야기   이용 안내
페이지투미는 사회혁신 분야의 새로운 정보를 모아 일주일에 3번, 메일로 발송해드립니다.

link 세부 정보

정보 바로가기 :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읽는 ‘시민주권’ 원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읽는 ‘시민주권’ 원리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피렌체를 방문해 본 이라면 알겠지만 이 도시는 크고 작은 광장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시민의 주권이 살아 숨쉬는 이곳에서 르네상스가 꽃핀 것은 우연이 아니리라는 느낌이 든다. 마치 여러 종류의 광장이 만개했던 아테네가 민주주의의 발상지가 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런 피렌체에서 로마의 역사를 기록하고 군주론을 쓰면서 시민의 주권과 여론을 중시했던 마키아벨리가, 어째서 오늘날에는 권력자 중심의 냉혹한 권모술수를 뜻하는 ‘마키아벨리즘’의 주창자로 오해받게 되었을까. 기묘한 일이다.   미켈란젤로와 갈릴레오 그리고 마키아벨리가 안장돼 있는 이탈리아 피렌체 산타크로체 대성당과 그 앞 광장. @이원영 필자는 지난 십여 년 동안 두 번의 촛불 현장을 뜨겁게 체험하면서, 자연스레 이런 의문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런 광장 민주주의가 드러내는 시민주권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 에너지는 어떠한 방향성과 경로를 통해 사회와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가. 첫 번째 촛불 이후 탄생한 정권의 실패가 두 번째에는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무엇을 달리해야 하는가. 그 가능성을 역사 속에서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마키아벨리를 만나게 된다. 그는 독재자를 위한 책을 쓴 자가 아니다. 그가 군주론에서 펼친 것은, ‘권력’이라는 실체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전제 위에서, 그 실체를 다룰 위치에 있는 자가 어떻게 하면 그것을 보다 잘 다룰 수 있는지에 관한 냉정한 분석이다. 권력이 갖는 비이성적이고, 때로는 생태계처럼 자기 증식적·팽창적인 속성을 직시하면서, 그 힘을 공동체 전체에 기여하도록 이끌기 위해서는 때로 도덕적으로 냉혹해 보이는 선택도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런 주장을 펼치면서도 그의 논지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시민들의 향배’가 자리하고 있었다. 시민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꿰뚫어 보고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면, 부하나 궁정에 떠도는 온갖 평판과 비난에는 개의치 말라는 뜻의 권력론을 전개한 것이다. 그래서 현대에 이르러서는 공화주의와 시민정치를 논할 때 마키아벨리를 새롭게 읽고 재평가하는 흐름 역시 적지 않다. 그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 잔혹한 권력교사인가, 시민의 편인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말라.” 마키아벨리에 대한 대중적 평판은 대체로 이 한 문장에 수렴한다. 잔혹한 권모술수의 교사, 냉혹한 독재자들의 멘토. 그러나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를 차분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 통속적 이미지가 감당하지 못하는 다른 얼굴이 떠오른다. 그는 군주 개인의 심리보다 ‘권력’이라는 힘의 구조를 분석하고자 했고, 그 힘의 최종 기반을 귀족이 아니라 인민, 시민에게 두려 했던 사상가였다. 권력을 도덕의 언어로 저주하거나 미화하는 대신, 냉정하게 객관화하려 했기 때문에 오히려 오해를 산 측면도 있다. 마키아벨리가 던진 기본 질문은 분명하다. 어떤 통치가 선한가?”가 아니라 어떤 권력이 오래 지속되고, 어떤 권력은 왜 허망하게 무너지는가?”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는 군주의 덕성, 인민의 욕망, 제도와 법, 군사력과 재정, 그리고 우연(fortuna)과 능력(virtù)의 상호작용을 하나하나 분해한다. 권력을 둘러싼 인간들의 행동을 실제 역사 속에서 관찰하고, 그 반복 패턴을 포착하려는 시도, 바로 이것이 그가 말하는 정치학이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때때로 잔인해 보이지만, 그 잔인함은 권력을 객관화하려는 냉정함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인민의 욕망이 더 명예롭다 그가 쓴 군주론과 로마사논고를 관통하는 한 줄기는, 귀족과 인민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있다. 그는 두 집단을 선과 악으로 나누지 않는다. 대신 욕망의 구조로 구분한다. 귀족은 지배하고 싶어 하고, 인민은 지배당하지 않으려 한다. 여기까지는 차갑게 중립적인 분석처럼 보인다.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양자의 욕망 사이에 분명한 가치판단을 덧붙인다. 인민의 목표는 귀족의 목표보다 명예롭다. 왜냐하면 귀족의 목표는 지배하고 억압하는 것인 반면, 인민의 목표는 억압받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그의 정치사상을 시민 편으로 기울게 만드는 결정적 문장이다.   피렌체 시내를 가로지르는 아르노 강. 마키아벨리는 매일처럼 이 강을 건너다녔다. @이원영 이 평가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인민을 단지 다루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공화국 자유의 정당한 기반으로 본다는 점에 있다. 인민의 욕망은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욕망’이기에, 훨씬 보편적이고 정당한 욕망이다. 여기서 인민은 단순한 수동적 피해자가 아니라, 자유를 향한 적극적 주체로 등장한다. 마키아벨리는 공화국의 제도와 법이 이 인민의 욕망을 반영하고 보호할 때 비로소 안정적인 정치질서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귀족의 권력을 견제하는 장치, 인민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제도는 그래서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군주에 대한 그의 조언도 이 인민의 시선으로부터 출발한다. 군주는 인민의 미움과 경멸을 무엇보다 두려워해야 한다. 재산과 명예, 가족의 안전을 함부로 침해하지 말아야 하며, 불필요한 모욕과 잔혹함으로 인민의 분노를 자초해서는 안 된다. 악명 높은 두려움과 사랑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두려움이 낫다”는 조언조차, 인민의 미움과 증오가 임계점을 넘을 때 권력이 어떻게 붕괴하는지를 현실적으로 보라는 경고와 함께 읽힐 때 다른 의미를 띤다. 결국 그는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군주는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지도자의 권력은 자신이 아닌 평범한 인민들에게 기반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권력은 이미 위에서 아래로 ‘하사’되는 힘이 아니다. 아래에서 위로 떠받쳐 올려지는 힘, 그리고 언제든 철회될 수 있는 위임이다. 마키아벨리가 ‘잔혹한 군주’의 교사가 아니라, 권력의 토대를 인민에게 두려 했던 시민주의 정치사상가로 읽히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자유로운 땅에서 좋은 것들이 나온다 로마사논고에서 마키아벨리는 시선을 더 넓혀, 공화정 로마를 비롯한 고대 공화국들의 역사를 실험실처럼 펼쳐 보인다. 여기서 그는 공화국의 위대함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의 결론은 인상적이다. 모든 고대의 좋은 것들은 자유로운 삶으로부터 나왔고, 지금의 무질서는 노예적 삶에서 비롯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부문에서 자유로운 땅과 지방은 크게 번성했다. 왜냐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자유를 도덕적 숭고함의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 자유는 인구의 증가, 재능의 집중, 상공업과 예술의 번성과 직결되는 사회·경제·문화적 조건이다. 자유로운 땅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만큼 다양한 능력과 야망이 부딪히며 새로운 성취를 낳는다. 반대로 노예적 삶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사람들의 힘이 억눌리고, 창의와 진취성이 말라버린다. 자유는 단지 기분 좋은 상태가 아니라, 문명 전체의 생산성을 좌우하는 객관적 토양이다. 권력을 객관화한다는 그의 시도는, 이렇게 자유와 번영의 상관관계를 냉정하게 짚어보는 작업과도 맞닿아 있다. 로마의 귀족과 평민 사이의 갈등에 대한 그의 해석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로마의 위대함을 ‘조화로운 화합’에서 찾지 않는다. 오히려 귀족과 평민 사이의 격렬한 불일치, 갈등과 소요가 자유의 원천이었다고 단언한다. 평민이 부당한 억압과 채무노예제에 맞서 집단 탈퇴를 감행하고, 그 압력이 호민관 제도라는 방패를 낳았다고 본다. 그렇다. 갈등은 제거해야 할 악이 아니라, 제도 속에 포획해야 할 에너지다. 이것이 바로 공화국이란 갈등을 없애는 정치가 아니라, 갈등을 제도화하는 정치라는 그의 통찰이다. 법을 통해 완성되는 시민의 자유 그렇다면 자유는 어떻게 지켜지는가. 마키아벨리는 자유를 감정의 상태로 설명하는 대신, 법과 제도의 문제로 옮겨 놓는다. 그가 말하는 ‘진짜 자유’는 이렇게 정의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란,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지 않게 해주는 법 이 시민들의 요구로 언제든지 만들어지고 지켜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전한 개념이 될 수 있다.” 자유는 누군가가 나를 억압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그 억압을 막아 주는 구체적인 법과 제도가 시민의 요구와 참여 속에서 만들어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여기서 시민은 더 이상 국가가 마련해 준 법에 순응하는 피지배자가 아니다. 법을 요구하고, 고치고, 새로운 법을 만들어 내는 주체다. 권력은 이 주체가 행사하는 집합적 힘이 제도화된 형태에 불과하다.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공화국은 좋은 군주가 있으면 잘 굴러가는 나라”가 아니라, 시민이 법을 통해 서로의 지배를 제한하는 나라다. 특정 개인의 덕성에 의존하지 않고, 시민의 요구와 감시 위에 법이 서 있을 때 비로소 자유가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권력의 객관화는 곧, 법과 제도, 그리고 그것을 움직이는 시민의 힘을 하나의 구조로 보는 시선이다. 이 시선에서 보면, 군주조차 법과 시민의 요구에 종속된 하나의 요소이다. 위기 상황에서 권력을 집중시키는 독재관 제도의 사례에서도 그는 문제는 권력 집중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누가 어떤 규칙 속에 통제하느냐”에 주목한다. 비상권력조차 시민과 원로원의 합의와 감시 아래 있을 때 정당성을 얻는다. 그는 군주에게 인민의 미움을 두려워하라”고 반복해서 주문하면서, 권력의 최종 심급이 인민임을 사실상 인정한다. 오늘의 민주주의에서 시민주권은 헌법 조문에 새겨진 문구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선거, 촛불, 각종 사회운동과 일상적인 정치적 말하기 속에서, 시민들은 이미 권력은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올라간다”는 사실을 증명해 왔다. 어느 권력도 지지율과 신뢰를 잃고 살아남을 수 없다. 마키아벨리식으로 말하자면, 지도자의 권력은 자신이 아닌 평범한 인민에게 기반한다. 군주는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그를 떠받치고 끌어내리는 힘의 원천은 언제나 시민이다. 마키아벨리가 꿈꾼 것은, 어쩌면 권력을 객관화하는 눈을 가진 시민”이었을 것이다. 권력을 도덕적 수사로 미화하거나 악마화하는 대신, 누가 누구를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지, 어떤 법과 제도가 그 지배를 가능하게 하거나 제한하는지 냉정하게 들여다보는 시민 말이다. 일테면 시민인권위원회가 추진하는 ‘주권자 국민에 의한 사법개혁’은 그가 꿈꾸는 것과 다르지 않다.


최근 3주간 링크를 확인한 사용자 수

검색 키워드


주소 : (12096) 경기도 남양주시 순화궁로 418 현대그리너리캠퍼스 B-02-19호
전화: +82-70-8692-0392
Email: help@treeple.net

© 2016~2026. TreepleN Co.,Ltd. All Right Reserved. / System Updated

회사소개 / 서비스소개 / 문의하기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