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기, 멈추거나 떠나거나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김혜형 작가, 농부
인간의 집에서 월동을 결심한 오이잎벌레
기온이 떨어지니 벌레들이 실내로 들어온다. 무당벌레들이 비좁은 창틀에 끼어 있기도 하고 신발장에서 노린재가 발견되기도 한다. 어느 틈으로 들어왔는지 검정오이잎벌레 두세 마리가 거실 벽과 다락방 천장을 기어 다닌다.
오이잎벌레는 성충으로 월동하는 곤충이다. 기온이 떨어지면 나무 틈새나 흙속으로 들어가는데 일부는 사람이 사는 따뜻한 실내로 잠입한다. 현관문 여닫는 틈에 잽싸게 들어온 몇 마리를 붙잡아 바깥으로 내보냈는데, 첫서리 내린 후엔 야박하게 내쫓을 수 없어 그냥 내버려뒀다. 우리 집에 들어온 오이잎벌레는 운이 좋다. 다락방과 거실, 주방 천장을 대놓고 돌아다녀도 잠자코 눈으로만 뒤쫓는 인간을 만나는 건 벌레의 일생에 흔한 일이 아니다.
창틀에 붙어 있는 오이잎벌레.
지난여름 우리 텃밭엔 두 종류의 오이잎벌레가 서식했다. 윤기 나는 주황색 딱지날개를 가진 ‘오이잎벌레’와 검정색 딱지날개를 가진 ‘검정오이잎벌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녀석들은 오이잎 또는 호박잎에 붙어서 산다. 오뉴월 텃밭의 오이잎과 호박줄기에 바글바글 달라붙어 오이와 호박을 초토화하는 것이다. 녀석들의 왕성한 식욕은 잎과 꽃을 가리지 않는다. 이들의 습격을 받으면 오이잎도 호박꽃도 너덜너덜해진다.
어린 모종이 줄기도 못 뻗고 말라 죽기도 한다. 땅속 생활을 하는 오이잎벌레 유충들이 뿌리를 갉아댄 탓이다. 용케 살아나도 오이가 비틀어지고 꼬부라지기 일쑤다. 생계형 농사라면 그냥 둘 수 없겠지만 밭작물을 팔아 생계를 잇는 게 아니라서 그러거나 말거나 한다. 오이 몇 개 더 먹겠다고 약 뿌리기는 싫다. 자급형 소규모 텃밭은 체념이 빠르다.
오이잎벌레가 추위를 피해 화분의 호야 잎에 다닥다닥 붙었다.
중력에 저항하는 비밀 장치
다락방 침대에 누웠는데 눈앞에 검정오이잎벌레 한 마리가 기어간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채 유유자적 돌아다니는 녀석을 보며 중력을 생각한다. 설마 중력을 거스를 만큼 가벼운 건가? 그럴 리가 있나. 벌레보다 가벼운 고양이 털도 지구를 향해 떨어지는데. 벌레들이 천장을 평지처럼 걷거나 달릴 수 있는 건 저 작은 몸에 중력에 저항하는 비밀 장치가 있어서다. 이런 걸 궁금해한 사람이 한둘이 아닐 터. 과학자들은 현미경의 도움을 받아 그 원리를 밝혀냈다.
창틀에 거꾸로 붙어 있는 검정오이잎벌레.
곤충의 발은 표면에 달라붙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메뚜기나 개미, 벌 같은 곤충은 발끝에 매끄러운 쿠션 모양의 ‘욕반(arolium)’이 있다. 욕반에서는 끈끈한 점액이 상시 분비된다. 나노미터 두께의 극미한 액체막이 발바닥과 천장 표면의 점성을 높이는데, 걸음을 멈추면 발바닥의 액체가 고르게 퍼져 표면에 밀착하고, 발을 떼려고 힘을 주면 액체의 배열이 바뀌어 점성이 낮아진다. 곤충이 천장을 내달릴 수 있는 건 발끝 욕반의 액체 변화가 찰나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파리나 딱정벌레류의 발은 대부분 털과 발톱으로 이루어져 있다(드물지만 욕반을 가진 딱정벌레도 있다고 한다). 털과 발톱은 벽과 나무 표면의 미세한 틈을 붙들어 지지한다. 오이잎벌레는 딱정벌레에 속한다. 녀석의 탈부착 비밀 역시 발톱과 털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수만 년 곤충 진화의 과정에서 축적된 능력이 오늘 다락방 천장의 검정오이잎벌레 발바닥에서 실현되는 중이다. 신비롭게도 생명체는 저마다 살아가는 재주와 능력이 있다. 이런 능력은 개체가 저 혼자 이룬 것이 아니다.
물갈퀴 대신 흡반을 가진 청개구리
곤충도 아니면서 매끈한 유리 벽을 자유자재 오르고, 연약한 풀줄기에도 찰싹 붙어 매달리는 동물이 있다. 바로 완두콩처럼 작고 귀여운 청개구리다. 청개구리는 개구리 중 유일하게 나무를 탈 줄 알아서 ‘나무 개구리’라고도 불린다. 영어 이름도 tree frog, green frog인 걸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는 눈은 비슷하구나 싶다.
거실 유리창에 붙어 날벌레를 사냥하는 청개구리.
10월 초순까지만 해도 거실 유리창에 청개구리가 붙어 있곤 했다. 청개구리는 환한 불빛이 최적의 사냥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안다. 유리창에 딱 붙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불빛을 향해 날아드는 작은 날벌레들의 움직임에 초집중한다. 나는 실내에서 청개구리의 반투명한 발가락을 관찰한다. 물에 사는 개구리는 뒷발가락 사이에 물갈퀴가 있는데 나무에 사는 청개구리는 물갈퀴 대신 발끝에 동그란 흡반이 있다. 곤충의 욕반처럼 청개구리의 흡반도 끈적한 점액질을 분비한다. 청개구리가 수직의 벽에 찰싹 붙는 건 흡반의 얇은 점액질 덕분이다. 청개구리는 매끈한 유리 표면뿐 아니라 날카로운 가시밭길도 상처 없이 걷는다. 마법 같은 재주다. 가시로 뒤덮인 장미 줄기에 올라가 앉은 청개구리를 보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대체 거길 어떻게 올라간 거니?
장미 줄기 위에 올라간 청개구리. 고행하는 수도자 같다.
죽음을 겪어야 부활이 가능하지
첫서리가 내리는 10월 하순이 되면 청개구리들은 낙엽 밑이나 바위틈, 사람의 집 틈새에 틀어박힌다. 창틀 구석, 외부 콘센트함, 잡동사니 틈바구니에 죽은 듯이 웅크린 청개구리를 가끔 발견한다. ‘동면’에 들어가기 시작한 건데 사실 ‘잠’이라기보다 ‘가사 상태’에 가깝다. 영하의 겨울을 견디기 위해 청개구리는 제 몸을 극단적으로 비활성화한다. 심장박동을 정지시키고, 호흡도 멈추고, 체온을 영하로 낮추고, 신진대사를 극도로 제한한다. 숨만 붙어 있을 뿐 거의 죽은 청개구리다. 동결을 피하기 위해 몸속 녹말을 혈중 포도당으로 바꾸어 어는점을 낮추긴 하지만, 실제로는 몸의 수분이 절반 이상 얼어붙는다. 몸빛도 거무죽죽해진다.
창틀 구석에 틀어박힌 청개구리. 수직의 틈새에서 과연 겨울을 날 수 있을까?
거실 창틀 꼭대기에 초록색 작은 몸뚱이 하나 박혀 있다. 월동한다고 기껏 찾아 들어간 곳이 창틀 맨 꼭대기라니. 저기까지 올라간 데는 타고난 발바닥의 능력이 한몫했겠지만, 선택한 저 자리가 최선인지는 모르겠다. 영하의 찬바람을 막아주기엔 가림막이 너무 낮다. 발가락의 작은 흡반이 언제까지 저 벽을 지탱해 줄지도 미지수다. 한겨울에 툭 떨어지면 생존하기 힘들 텐데. 구부정한 작은 등이 안쓰럽다.
일 년 단위로 갱신되는 지구의 시간에서, 번식을 마친 몸뚱이를 버리지 않고 다음 해로 가져가려면 혹독한 죽음의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 식사와 배설을 멈추고,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멈추고, 심장을 멈추고, 피를 얼려 가며 침잠해야 한다. 거기까지 가야 갱생이, 부활이 가능하다.
유전자만 남기고 몸을 버리는 전략
넓적배사마귀 알집.
죽음 같은 혹독함을 견디느니 차라리 몸뚱이를 포기하고 유전자만 넘겨주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사마귀는 제 유전자를 알집 속에 꽁꽁 숨겨 놓고 검불 같은 몸을 버리는 전략을 택했다. 첫서리 내리는 10월 하순, 테라스 기둥 곳곳에 넓적배사마귀 알집이 붙어 있다. 불규칙한 스펀지 덩어리 같은 왕사마귀 알집에 비하면 넓적배사마귀 알집은 씨앗처럼 야물고 예쁘게 생겼다. 테라스 기둥과 처마 밑에 단단한 알집 하나씩 붙여놓고 암사마귀들은 모두 마지막 죽을 자리를 찾아 떠났다. 테라스에 붙은 알집이 열 개가 넘는데도 어미들의 사체는 눈에 띄지 않는다. 제라늄 화분 속에 고꾸라진 암컷 한 마리를 발견했을 뿐이다.
암사마귀와 수컷의 잔해.
추위가 닥쳐오는데 아직 죽지 못한 지각생 사마귀가 테라스 계단 끝에서 얼쩡거린다. 그 옆에는 다른 사마귀의 잔해가 점점이 남아 있다. 짝짓기한 수컷의 흔적일까? 그렇다면 많이 늦었구나. 지금은 번식기가 아니라 소멸기인데. 먹고 힘낼 때가 아니라, 남겨두고 떠날 때인데.
늦가을, 모든 것이 가야 할 길로 가는 시간
모든 일에는 때가 있어서, 왕성하게 먹으며 몸집을 키울 때가 있고, 정열을 다해 사랑하고 번식할 때가 있고, 질주를 멈추고 뒤를 돌아봐야 할 때가 있고, 곡기를 끊고 저물어야 할 때가 있다. 지금은 늦가을, 살아 있는 것들이 저마다 한 생을 마무리하고 돌아갈 때다. 산 것들이 우수수 지는 시간, 씨앗들이 흙 속에 숨는 시간, 어린 알들이 기운을 모으는 시간, 모든 것이 가야 할 길로 가는 시간. 된서리가 오기 전에 저 암사마귀도 제 할 일을 해내겠지.
한 해를 치열하게 살아낸 목숨들이 저마다의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에서, 서리가 내린 풀숲에서, 눅눅한 낙엽 밑과 바위틈에서, 겨울을 견디기로 한 목숨들과 이생을 끝내기로 한 목숨들이 바쁠 것 하나 없이 너도나도 멈춰서고 있다. 조용하고 쓸쓸하고 평화로운 겨울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