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로그인   회원가입   초대장  
페이지투미   페이지투미 플러스
페이지투미 홈   서비스 소개   아카이브   이야기   이용 안내
페이지투미는 사회혁신 분야의 새로운 정보를 모아 일주일에 3번, 메일로 발송해드립니다.

link 세부 정보

정보 바로가기 : 다시는 이 땅에 그런 봄이 오지 않기를…4·3 진혼가

다시는 이 땅에 그런 봄이 오지 않기를…4·3 진혼가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1948년 말 촬영된 사진. 사진 촬영 직후 이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나무위키 1947년 3월 1일, 해방을 맞은 지 채 2년도 되지 않은 제주에서 수천 명의 주민들이 모여 3·1절 기념 집회를 열었다. 사람들은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왔고, 광장에서는 노래와 연설이 이어졌다.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난 기쁨이 아직 식지 않았고,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이 섬 전체에 퍼져 있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 뒤에 놓인 현실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미군정 아래 행정체계는 혼란스러웠고, 경제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식량은 부족했고 물가는 치솟았다. 무엇보다도 경찰의 강압적인 통치 방식은 제주 주민들의 불만을 키우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식민 권력의 도구였던 경찰 조직이 크게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 사람들은 해방을 맞았지만, 삶의 조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떤 이들에게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답답한 현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날의 3·1절 집회는 단순한 기념 행사가 아니라, 억눌린 감정과 기대가 한데 모인 자리였다. 그러나 행사 도중 한 어린아이가 경찰이 타고 있던 말에 치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주민들은 놀라 아이를 살피며 경찰에게 항의했다. 그 순간 긴장은 급격히 높아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은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총성이 울리자 광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여러 주민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피를 흘리는 사람들 사이로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침묵이 흘렀다.   1948년 제주 4.3사건 당시 국군이 무장공비와 함께 폭동을 일으켰다 는 혐의로 주민들을 연행하고 있다. 나무위키 이 사건은 단순한 발포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주 사회의 깊은 균열을 드러낸 사건이었고, 그 뒤 이어질 비극의 출발점이었다. 경찰 발포 사건 이후 제주 전역에서는 항의 시위와 총파업이 이어졌다. 주민들은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요구했고, 경찰의 폭력적 행태를 규탄했다. 그러나 미군정과 경찰은 이러한 움직임을 민중의 절박한 요구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진압은 점점 강경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조사 과정에 폭행과 고문이 자행되었다. 사회적 긴장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졌다. 섬 전체가 보이지 않는 불안 속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48년 4월 3일 새벽, 무장대가 제주 곳곳의 경찰지서를 공격하면서 전면적인 충돌로 번졌다. 무장대는 남한 단독선거 반대와 경찰 탄압 중단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후 벌어진 일은 무장 충돌의 범위를 훨씬 넘어섰다. 국가 권력은 제주를 ‘폭동 지역’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나섰다. 진압군은 군과 경찰뿐 아니라 극우 청년단체인 서북청년단까지 포함된 복합적인 세력이었다. 서북청년단은 북에서 내려온 반공 청년 조직으로 강한 이념적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제주 진압 과정에 이들은 강경한 폭력 행위를 주도한 것으로 여러 증언에서 나타난다.   1948년 11월 경찰 심문을 받기 위해 대기중인 제주도민들.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 당시 토벌대에는 일제강점기 치안 기관에서 활동했던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식민지 시기의 권력 구조가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상태에, 그 권력의 일부가 새로운 국가 권력 속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제주에서는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권력의 폭력이 반복되는 비극이 벌어졌다. 1948년 가을 이후 상황은 더욱 참혹해졌다. 정부는 제주를 ‘빨간 섬’으로 낙인찍고 대규모 진압 작전을 실시했다. 특히 1948년 11월부터 시작된 ‘초토화 작전’은 제주 역사에 가장 비극적인 장면으로 기록된다. 군은 해안선에서 약 5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역을 통째로 ‘폭도 협력 지역’으로 규정했다.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사실상 모두 적으로 간주되었다. 토벌대는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강제로 끌어냈다. 집들은 불길 속에서 무너졌고, 사람들은 총구 앞에 서야 했다. 많은 주민들이 집단으로 모인 자리에서 총살당했다. 어떤 이들은 가족이 보는 앞에서 죽었고, 어떤 이들은 어린 자식의 손을 잡은 채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 어린아이와 노인, 여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산으로 피신한 사람들도 안전하지 않았다. 토벌대는 산속을 샅샅이 수색하며 피난민들을 찾아냈다. 그들은 ‘폭도 협력자’라는 이유로 즉결 처형되었다. 동굴에 숨어든 사람들도 학살을 피하지 못했다. 제주 동부의 다랑쉬굴에서는 토벌대를 피해 숨어 있던 주민들이 발견되어 집단적으로 살해되었다. 동굴 속에는 어린아이와 노인, 여성들이 함께 있었다. 그러나 총포와 화염은 그들을 구분하지 않았다.   1948년 5월 중산간으로 피신한 주민들의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러한 학살은 특정 지역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제주 전역에서 유사한 사건이 반복되었다. 마을 주민들이 무더기로 끌려가 총살당했고, 피난처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발견되면 처형되기도 했다. 그 과정에 수많은 마을이 지도에서 사라졌다. 불에 타 없어진 마을은 백 곳이 넘었다. 마을 공동체가 통째로 사라지는 일도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었다. 어떤 아이는 부모 없이 남았고, 어떤 부모는 자식의 행방을 끝내 알지 못했다. 산과 들에는 이름 없는 무덤들이 늘어났다. 많은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의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살아야 했다. 공식 조사에 따르면 제주 4·3으로 희생된 사람은 약 1만 4000명 이상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실제 희생자가 2만에서 3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 연구에서는 5만 명 이상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당시 제주 인구의 약 10퍼센트가 이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희생자의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는 점이다. 전투 중 사망한 무장대보다,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주민들이 훨씬 더 많이 죽었다. 농사를 짓던 농부, 바다에 나가던 어부, 물질을 하던 해녀, 학교에 다니던 아이들. 그들은 정치적 구호를 외치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저 그곳에서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국가 권력은 그들을 보호해야 할 국민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했다. 이념이 인간보다 앞설 때, 권력이 책임보다 통제를 앞세울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제주 4·3은 분명하게 보여 준다. 제주 4·3은 단순한 지역 폭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 권력이 민간인을 상대로 대규모 폭력을 행사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국가가 국민을 지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국민을 향해 총을 겨눈 비극이었다. 그러나 비극은 학살에서 끝나지 않았다.   강요배 화백의 4·3 연작 동백꽃 지다 가운데 넘치는 유치장 제주의소리 자료사 사건 이후 오랫동안 제주 4·3은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역사로 남았다. 냉전과 반공 체제가 강하게 자리잡은 한국 사회에서 4·3을 이야기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희생자 가족들은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을 두려워하며 침묵해야 했다. 누군가 가족을 잃었다고 말하는 것조차 조심해야 했다. 학교에서도 이 사건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살아야 했다. 어떤 이는 평생 자신이 겪은 일을 자식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기억은 있었지만 말할 수 없는 기억이었다. 그렇게 긴 침묵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진실을 밝히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와 유족들의 노력으로 사건의 실상이 조금씩 드러났다. 2000년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사건의 경과와 희생 규모가 공식적으로 조사되었다. 숨겨져 있던 역사들이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4·3 평화공원(제주시 봉개동)에서 열린 위령제에서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한다 며 국가권력은 어떤 경우에도 합법적으로 행사돼야 하고 일탈에 대한 책임은 특별히 무겁게 다뤄져야 한다 고 밝혔다. 2003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권력의 과오에 대해 공식 사과를 했다. 국가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희생자들에게 사과한 것은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잃어버린 생명은 돌아오지 않는다. 제주 곳곳에는 여전히 무명묘가 남아 있다. 어떤 유족들은 아직도 가족의 유해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제주 4·3은 단순한 과거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는 기억의 역사다. 그 기억은 제주 섬의 풍경 속에도 남아 있다. 한라산 자락의 숲과 오름, 그리고 돌담 사이에는 그 시대의 흔적이 스며 있다. 바람 많은 제주에서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돌담을 쌓아 살아왔다. 돌담은 낮지만 매우 단단하다. 제주 사람들의 기억도 그와 닮았다.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그 안에는 오랜 시간 쌓인 이야기들이 있다. 어떤 어머니는 아이의 이름을 마음속으로만 불렀고, 어떤 노인은 젊은 시절에 잃어버린 형제의 얼굴을 평생 잊지 못했다. 누군가는 산속에서 총성이 울리던 밤을 기억하고, 누군가는 불타던 마을의 냄새를 아직도 떠올린다. 그 기억들은 한 사람의 기억이 아니라 공동체의 기억이다. 그리고 그 기억이 모여 오늘의 제주를 만들었다.  3일 오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평화교육센터에서 열린 4·3희생자 신원확인 보고회에서 유족들이 헌화하고 있다. 2026.2.2. 연합뉴스 봄이 오면 제주에는 동백꽃이 핀다. 붉은 꽃이 통째로 떨어지는 동백은 오랫동안 4·3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사람들은 동백꽃이 떨어진 자리를 바라보며 오래 전의 시간을 떠올린다. 그곳에는 이름 없는 영혼들이 잠들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진혼가란 단순히 죽은 이를 애도하는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의 노래이며 동시에 다짐의 노래다. 우리는 그들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 그리고 다시는 국가 권력이 국민의 생명을 짓밟는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담아 그 노래를 부른다. 역사를 돌아보면 인간은 종종 같은 실수를 반복해 왔다. 권력과 이념이 인간의 존엄 위에 군림할 때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언제나 평범한 사람들이다.   동백꽃 지다. 박철 시민기자 제주 4·3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교훈도 바로 그것이다. 국가 권력은 국민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 기본 원칙이 무너질 때 역사는 언제든 다시 비극으로 돌아갈 수 있다. 바람이 많은 섬에서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온다. 그 파도는 과거의 시간을 넘어 오늘의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잊지 말라고. 그날의 사람들을 기억하라고. 제주 4·3의 진혼가는 바로 그 기억을 위한 노래다. 이름 없이 사라진 사람들, 돌아오지 못한 가족들, 그리고 긴 침묵 속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을 위한 노래다. 우리가 그 노래를 계속 부르는 한 그들의 삶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언젠가 이 땅의 사람들이 전쟁과 학살이 아니라 평화와 공존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날이 온다면, 그날 제주 4·3의 영혼들은 조금 더 편안히 쉴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그들을 위한 작은 진혼가다. 바람과 바다, 그리고 돌담 사이에서 아직도 떠돌고 있을 이름 없는 영혼들을 향한 조용한 노래다. 부디 그들이 평안하기를.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잊지 않기를. 그래서 다시는 이 땅에 그런 봄이 오지 않기를.   동백꽃이 떨어지다 -박철 오름을 넘는 바람 속에서 붉은 동백이 조용히 떨어진다 누군가는 그것을 꽃이라 부르지만 누군가에게 그것은 잊지 못할 이름이다 어린이는 총소리도 모른 채 어머니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자리 세상에서 가장 안전해야 할 자리 그러나 그날 바람은 차가웠고 사람의 발걸음은 숨죽였으며 밤은 너무 길었다 오름 아래 돌무더기가 쌓여 간다 누가 묻혀 있는지 누가 울고 있는지 누가 돌아오지 못했는지 돌들은 알고 있다 붉은 동백은 한 번에 피지 않는다 한 송이씩 떨어지며 섬의 기억을 깨운다 어린이의 울음 어머니의 젖가슴 오름의 돌무더기 그 사이에서 제주는 아직도 조용히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최근 3주간 링크를 확인한 사용자 수

검색 키워드


주소 : (12096) 경기도 남양주시 순화궁로 418 현대그리너리캠퍼스 B-02-19호
전화: +82-70-8692-0392
Email: help@treeple.net

© 2016~2026. TreepleN Co.,Ltd. All Right Reserved. / System Updated

회사소개 / 서비스소개 / 문의하기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