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들어가면 라디오 지지직 , 재난 덮치면 어떡하나 [뉴스] 차를 몰다 보면, 차 안은 이내 나만의 작은 음악당이자 세상과 소통하는 사랑방이 된다. 평소 좋아하는 음악을 나직하게 틀어두기도 하고, 때로는 라디오 속 흘러가는 이웃들의 소소한 사연에 귀를 기울이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지역 경계를 넘어설 때마다 주파수가 미세하게 흔들리면, 그 고장에 가장 잘 맞는 채널을 찾아 다이얼을 돌리는 일 또한 오랜 여정이 주는 또 하나의 재미이기도 하다.
2016년 개봉한 하정우 주연 영화 터널 의 한 장면
그러나 이 기분 좋음이 여지없이 깨지는 때가 있다. 거대한 콘크리트 터널 속으로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느끼게 된다. 달콤한 음악도, 정겨운 아나운서의 목소리도 터널의 두꺼운 벽에 부딪혀 자취를 감춘다. 이내 스피커를 가득 채우는 것은 찌이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시끄러운 기계음뿐이다. 귀를 찌르는 그 불쾌한 잡음을 견디지 못해 결국 라디오 전원을 끄고 나면, 터널을 빠져나갈 때까지 타이어가 바닥을 긁는 굉음, 운전자를 깨우려는 호루라기 소리나 경적 소리 만이 차 안에 덩그러니 남는다.
운전 중 잠깐 겪는 불쾌함 이라며 스스로를 달래고 넘어가기엔, 그 먹통이 된 침묵의 시간 뒤편으로 자꾸 불길한 상상들이 꼬리를 문다. 만에 하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예기치 못한 대지진이나 공격, 혹은 예고 없는 재난으로 인해 이 깊고 어두운 터널 한가운데 고립된다면 어떻게 될까.
불길은 치솟고 사방은 가로막힌 밀폐 공간 속에서, 우리가 분신처럼 쥐고 다니던 스마트폰마저 배터리가 바닥나거나 통신 기지국이 파괴되어 먹통이 된다면 그 공포는 상상조차 하기 싫다. 외부의 구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느 방향으로 대피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완벽한 암흑의 사각지대. 그곳에서 사람이 느낄 고립감과 무력함은 재난 자체보다 더 무서운 흉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 최악의 순간에 우리를 세상과 연결해 줄 유일한 생명줄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차량 라디오 일 것이다. 아무리 첨단 기술이 지배하는 세상이라 해도, 대규모 재난 상황에서 가장 끈질기게 살아남아 먼 곳의 소식을 전하는 것은 아날로그 전파의 몫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대피 지침과 구조대의 목소리가 라디오를 통해 터널 안으로 흘러들어올 수만 있다면, 그 소리는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단순한 방송이 아니라 반드시 살아서 나갈 수 있다 는 구원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도로 위 안전망은 아직 그 온기가 터널 속까지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 한국도로공사(사장 김진숙)는 2010년 재난방송 주관사인 한국방송공사(KBS)와 고속도로 터널 내부의 라디오 수신품질 개선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해 무선방식이 아닌 지역방송국의 신호를 직접 전송받는 유선방식의 중계설비를 구축해 오고 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터널 라디오 를 검색하면, 라디오 재방송 설비 공사 관련 내용들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나 지방도로의 터널 등 현행 법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방치된 작은 터널들이 도처에 널려 있고, 설비가 정식으로 갖춰진 곳이라 해도 정작 들어가 보면 여전히 잡음만 무성한 곳이 많다. 먼 길을 다녀 본 사람들은 다들 잘 알 것이다.
터널 내부에서 사고 발생 시, 기존 라디오 방송을 강제로 중단하고 재난 방송을 강제로 송출할 수 있는데 앞에 사고 발생, 즉시 정차 후 대기 바랍니다” 같은 안내가 라디오를 통해 실시간 전달될 수 있다고 한다. ‘터널 방송 강제 삽입 시스템’이라고 하며, 소방청, 교통관리센터, 경찰청과 연결되어 작동하는데, 이는 사고가 난 뒤에야 운전자가 작동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안전은 법 조문의 숫자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공백 하나까지 촘촘히 메우는 실천으로 완성되는 법인데 말이다. 터널 진입로마다 그 지역에서 가장 잘 들리는 공영방송의 전파를 수신할 수 있는 안테나를 촘촘히 세우는 일. 그것은 운전자의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소음을 없애는 일상의 배려이자, 언젠가 마주할지 모를 위기 속에서 수많은 목숨을 구해낼 생명 안테나 를 심는 일이다.
오늘도 어두운 터널을 나오며 거친 소음 때문에 잠시 꺼두었던 라디오 전원을 다시 켠다. 환한 햇살과 함께 다시 흘러나오는 정겨운 사람 목소리가 고맙다가도, 저 어둠 속에서도 끊이지 않고 흐르는 든든한 안전의 소리를 머지않아 들을 수 있게 되기를 마음 깊이 소망해 본다.
이창수 시민기자 maljig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