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신적 뿌리를 잘라내는 트럼프… 나는 왕이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 자료사진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7세기 초 시작된 영국의 북아메리카 대륙 정착 이후 형성된 미국의 정체성을 다시 쓰고 있다. 그가 평생을 간직한 트럼프 명칭 콤플렉스(사람의 눈이 가는 곳에는 트럼프 가 새겨져야 하는)의 연장인 듯하다. 미국의 정체성을 자기중심으로 수정해 트럼페리카(Trumperica, 트럼프와 아메리카의 합성)를 건국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사고 체계는 미국의 팽창, 침략, 우월주의에 기초한다. 뿌리는 같지만, 그의 행동 양식에서는 과거와의 단절이 발견된다.
우리는 세상을 다시 시작할 힘을 갖고 있다. 지금과 비슷한 상황은 노아 시대 이후 여태껏 없었다. 새로운 세상의 탄생이 손 안에 있으며 인류는…(We have it in our power to begin the world over again. A situation, similar to the present, hath not happened since the days of Noah until now. The birthday of a new world is at hand, and a race of men…)”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 당시 혁명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문건(소책자)이 세상에 나왔다.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의 상식 (Common Sense)이다. 노아의 홍수는 창조주의 은혜에서 벗어나 타락한 인류를 물로 쓸어버렸다는 성서의 서사이다. 미국의 독립을 통해 역사를 다시 쓸 기회가 왔다는 주장이다. 미국을 통해 세상도, 인류도 다시 태어난다. 페인은 새로운 세상과 인류를 지배하는 힘을 자유라 했다.
가공할 군사 폭력을 과시한 베트남 전쟁의 주역으로 역사에 기록된 린든 B. 존슨 대통령까지도 미국을 세계 역사상 최초로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건국된 국가”라고 평가했다. 이상적 존재 목적으로 정체성을 형성한 나라라는 뜻이다.
‘특별한 목적’은 미국의 국가적 운명을 ‘명백한 운명 (Manifest Density)으로 승화시켰다. 전쟁과 점령, 이 공간에서 자행된 생명, 인종, 문화 파괴는 주어진 운명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불가피한 요소로 정당화됐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의 땅’은 걸어 들어가는 곳이 아니었다. 싸워 차지해야 하는 땅이었다. 미국도 구약의 맥락에서 역사적 소명을 이해했다.
미국의 놀라운 팽창 역사를 보여주는 지도. 미국인들은 이런 팽창 욕구를 신이 준 명백한 사명 으로 정당화했다. (Public Domain)
이 과정에 일종의 트로츠키식 영구적 팽창주의가 탄생했다. 위의 지도를 보면 미국의 팽창은 한 지역에 국한되어 자기만족에 빠질 수 없었다. 다음의 확장, 점령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이미 차지한 땅이 포위되어 위협당할 수 있다. 19세기 중반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북미 대륙을 차지하고 나서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 이유이다. 그래서 태평양으로 진출해야 했다.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 이념적 배경이 된다.
태평양에 세력권을 형성한 미국은 남중국해를 넘어 인도차이나를 노렸다. 베트남 전쟁의 원인이다. 베트남 전쟁 또한 특별한 목적” 안에 있었고 따라서 엄청난 폭력을 정당화했다.
미국은 총기 소지를 인권으로 규정한 나라이다. 미국의 폭력성으로 인해 원주민 사회는 파괴를 넘어 종말에 가까운 인종 말살을 경험했다.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기존 사회를 파괴해야 한다는 미국의 외교, 전쟁 논리는 지금도 건재하다.
미국 역사의 폭력과 파괴성은 진보성으로 포장, 합리화됐다. 미국 정체성에 녹아 있는 진보적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더 빨리 앞서 나가 역사를 선도해야 한다는 집착증은 스포츠계의 도핑과 같다. 도핑은 반칙이 아니라고 믿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MAGA)라는 도핑을 하고 있는데 미국의 근육만 튀어나오고 에너지가 상승하면 세계 공동체에 보탬이 된다고 믿는다.
보디빌딩에 도핑이 많은 이유는 관객들이 원해서이다. 비정상적으로 튀어나온 근육에 관중은 열광한다. MAGA의 추종자들이다. 보디빌딩 선수들은 안다. 도핑을 멈추면 근육이 물렁살로 변한다. 살을 근육으로 바꾸는 것이 이 스포츠의 관건인데 관중은 각고의 노력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균형 잡힌 육체미와 관계없이 근육만 키운다.
트럼프는 베네수엘라, 그린란드, 캐나다, 이란, 중국, 한국 등 대륙을 가리지 않고 개입, 침략, 간섭, 위협을 가한다. 이 모두가 도핑 보디빌더 트럼프가 관중의 열광을 얻기 위해 찔러대는 주사약이다.
트럼피즘은 미국의 공격적 역사의 근본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역사 전개 방식에 변화를 불러왔다. 역사를 공적인 공간에서 개인의 공간으로 끌어왔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정신사가 위기를 맞고 있다. 이 시리즈는 트럼프가 자행하고 있는 미국 정체성의 굴절과 수정, 파괴를 분석한다.
메이플라워 서약
영국의 왕권이 미치지 못하는 정착지에 도착한 필그림들이 1620년 11월 자치적 공동체 건설을 서약하는 장면 (Jean Leon Gerome Ferris, The Mayflower Compact, Public Domain)
1620년 역사적 실수가 미국의 정체성을 잉태시켰다. 1620년 9월 영국을 떠난 청교도 원리주의자격인 필그림들이 11월 지금의 매사추세츠 케이프 코드에 도착했다. 문제가 생겼다. 영국을 떠나기 전 이들이 확보한 정착 권리 증서에 명시된 정착지는 버지니아 북부였다. 당시의 지역 경계를 따르면 남부 뉴욕이다.
여러 난관에 부닥쳐 필그림들은 본래 목적지에서 200~300 마일 북쪽에 도착했다. 정착 허용 범위에서 벗어났으니 이들은 법적으로 왕권의 보호 밖에 있었다. 모국과의 법적인 연결고리가 없어졌다고 할 수 있다. 왕권이 미치지 않는 곳이니 남은 선택은 자치였다. 이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는 인식 아래 배에서 약조를 맺었다. ‘메이플라워 서약’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 아래에 서명한 우리는 대영제국, 프랑스 및 북아일랜드의 신, 국왕, 신앙의 수호자 등등의 은총을 통해, 숭배하는 군주인 국왕 제임스 1세(잉글랜드 왕)의 충실한 신민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독교 신앙의 진흥 및 국왕과 국가의 명예를 위해 버지니아 북부에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항해를 계획했고, 개척지에서 [공동체의] 질서와 지속성, 또 위의 목적의 촉진을 위해서 하나님과 서로의 앞에 엄숙하게 서로 계약을 체결하며, 우리 스스로 민간 정치체제를 결성할 것을 결정했다. 이것을 제정하여 우리 식민지의 총체적인 이익을 위해 식민지의 사정에 가장 잘 맞다고 생각되는 정당하고 평등한 법률, 조례, 법, 헌법이나 직책을 만들어, 우리 모두 당연히 복종과 순종할 것을 약속한다. (위키피디아)
키워드는 우리 스스로”이다. 자치를 말한다. 왕권은 종교 권력과 공권력이 따라주면 유지된다. 스스로 다스림은 합의가 필요하다. 고작 200단어밖에 안 되는 ‘메이플라워 서약’에 민주 헌정의 정신이 정리되어 있다.
공동체 운영 체계는 포괄적 의미의 법제, 조례, 구체적으로 명문화된 입법, 헌법과 이를 집행하는 관료조직으로 짜여있다.
이런 공동체 운영 시스템은 복종(Submission)과 순종(Obedience)을 요구한다. 이 두 단어는 신앙적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전자는 받아들이고 후자는 따르는 것이다. 신앙을 받아들여야 그 신앙이 요구하는 일상의 행동 지침을 기꺼이 행동으로 옮긴다. 신앙심 없는 이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면 흉내는 내도 진정은 될 수 없다.
한데 이 법에 복종하고 순종하려면 정당하고 평등해야 한다. 정당성은 상식과 합리 위에 서 있고, 평등은 모두에게 공정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정당하고, 평등한 법에 대한 자율적 복종과 순종을 민주사회의 근본으로 제시한 메이플라워 서약. 트럼프 통치는 이 정신을 위협하고 있다. (Public Domain)
필그림들이 꿈꾼 이 땅의 이상향은 하나 된 공동체였다. 이 꿈은 하늘을 향한 믿음으로 가능하다고 믿었다. 하늘(신앙)과 땅(실존)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가 된 필그림 공동체의 중간 연결고리가 자치 능력이다.
자치는 높은 수준의 질서를 요구한다. 왕의 권위와 왕에게 맹종하는 공권력의 위협, 종교 권력의 심판론으로 영원히 유지되기 어렵다. 더욱이 필그림 정착지는 영국에서 3000마일 떨어져 있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맺은 계약” 관계가 질서 유지의 힘이다. 계약은 자유가 없으면 강압일 뿐이라고 토머스 제퍼슨이 초고를 쓴 미국 독립선언서가 말한다.
정부는 사람들 사이에 세워지며, 그 정당한 권력은 통치받는 자들의 동의에서 비롯된다. (Governments are instituted among Men, deriving their just powers from the consent of the governed) 동의 없는 계약이 무효가 되는 것이 혁명이다. 미국 독립선언서는 혁명을 공동체 구성원들의 권리(right)를 넘어 책무(duty)라고까지 규정한다.
필그림 공동체도 백인 우월주의에 매달렸다. 신천지를 개척한다며 초기 그들의 정착에 결정적 도움을 준 인근 원주민들과의 마찰, 충돌, 전쟁을 촉발했다. 엄격히 따져 원주민 사회 파괴의 시작은 필그림 공동체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필그림 사회는 미국의 이상적인 정체성 형성에 기초를 다졌다. 왕 없이도 살 수 있다. 이 자치에 대한 자기 확신을 메이플라워 서약을 맺은 뒤 약 두 세기 반, 에이브러햄 링컨은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로 명쾌하게 정리했다.
미국의 정체성을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 로 규정한 에이브러햄 링컨. 이 연설을 한 게티즈버그에서 찍힌, 유일하게 남아있는 그의 모습이다. (The Abraham Lincoln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
요즘 트럼프 행정부를 향해 외치는 비판적 구호 중 NO KING (왕은 없다)이 대표적이다. 트럼프가 파괴해 가는 미국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YES KING (왕이 있다)라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 시대의 말로 바꾸면 짐이 곧 국가다 (L État, c est moi)가 된다.
트럼프는 지금 미국의 정신적 뿌리를 잘라내고 있다. 이를 위해 그가 쓰는 톱에는 ‘ICE (Immigration Customs Enforcement: 이민세관단속국), ‘USBP (United States Border Patrol: 미 국경순찰대) 이름표가 어지럽게 붙어있다. 이들은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두 명의 무고한 시민을 총격으로 살해했다.
지금은 사람들의 영혼을 시험하는 시대이다.” 토머스 페인이 쓴 ‘미국의 위기(The American Crisis)’의 첫 문장이다. 억압, 압제의 시대는 사람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혁명의 욕구를 시험한다. 선택을 촉구한다는 뜻이다. 트럼프 정치가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의 폭력적인 공권력은 미국의 정체성과 가치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 총격으로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한 ICE와 USBP에 대한 항의 시위 장면. (이길주 뉴욕 통신원 촬영)
트럼프는 미국의 국가적 정체성의 중심이 되는, 왕 없이도 사는 자치 사회의 가치를 깨고 있다. 이를 거부하는 한 시민의 저항 모습. (이길주 뉴욕 통신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