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과 혼란의 세계로 돌아가지 말라”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놀랍고 흥미롭게도 다큐멘터리 의 첫 장면은 하야오가 평생 작품을 같이 해 온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와 료칸(일본식 고급여관)에서 옷을 벗고 함께 탕 속에 있는 장면이다. 흐릿한 물속으로 거장의 몸이 보일락 말락 해서 살짝 당황스럽다. 1941년생인 하야오는 이 장면을 찍을 당시 76세였으며 다큐는 2017년부터 2023년까지 그의 장편 애니메이션 의 제작 과정을 담고 있다. 제작기라는 작품의 성격과 달리 이번 다큐는 첫 장면처럼 의외의 파격이 많다. 흥미롭다. 다큐멘터리가 매우 재미있다며 ‘매우’라는 부사를 쓸 수 있는 작품이 있다면 바로 이 와 같은 작품이다. 2시간의 러닝타임이 훌쩍 지나간다.
인생 마지막 작품 만들면서 드디어 열린 뇌의 뚜껑
(내 작업은) 지적인 것이 아니야. 이건 뇌의 뚜껑이 열려야만 할 수 있는 거야. (근데 뇌 뚜껑이 안 열리고 있어!)” 하야오는 중간에 자신의 작업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순간이 있는데 이 다큐가 딱 그 지점을 포착한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회사 스튜디오 지브리의 전속 다큐멘터리 작가 아리카와 카쿠가 주목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르는 를 만들 요량으로 은퇴를 철회하고 2013년에 복귀한 후 10년에 이르는 제작 기간 중 2018년 드디어 ‘뇌 뚜껑이 열린다.’ 그건 한 예술가가 광인과 정상인의 경계를 오가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의미하며 작품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다큐는 인간 미야자키 하야오를 만날 수 있다는 데에도 의미가 있지만 바로 그 ‘예술의 경계’를 목도하게 된다는 것 역시 중요한 지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영화는 그래서 매우 흥미롭다. 예술작품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렇기에 아티스트들이 작품 속에 있다가 일상으로 복귀하는 과정이 쉽지 않다는 것, 그걸 해 내는 것 자체가 ‘예술임’을 느끼게 해 준다.
평생의 동료들을 주요 배역으로 갈아넣은 자전적 스토리라인
미야자키 하야오가 를 만들면서 그 ‘중간계’에서 방황했던 건, 이 애니의 스토리라인이 자전적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소년 마히토 (목소리 연기: 산토키 소마)는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이다. 그는 마히토의 극 중 아버지(기무라 타쿠야)처럼 태평양 전쟁 당시 군수공장 임원(당시 공장장)이었던 미야자키 카즈치의 아들로 유복하게 살았다. 카즈치는 애니메이션에서 보여주듯 일본 전투기 ‘제로센’의 부품을 만들어 부를 쌓았다. 영화에서는 아버지가 캐노피(조종석 덮개)를 만드는 사람으로 나온다. 이 아버지 캐릭터는 그의 전작 (2013)에 나오는 주인공 지로(안노 히데아키)이다. 에서 주인공 마히토가 폭격으로 엄마 히미를 잃었듯이 하야오도 전쟁 중 친모를 잃었다. 하야오의 작품에 나오는 여성상이 지극히 따뜻한 모성애로 가득 차 있는 이유이다. 하야오는 그 결핍으로부터 평생 자유롭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신 그는 평생을 자신과 함께 작업했던 동료이자 멘토들에게서 그것을 보상받으려 했고 이번 다큐에서 이들은 상당히 깊이 있게 다뤄진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들 중 몇몇을 의 주요 배역으로 ‘갈아 넣었다’. 가장 먼저, 평생을 제작 동반자로 살아 온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는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 마히토를 위험에 빠뜨리거나 반대로 위기에서 구해 오는 왜가리로 나온다. 영화 속 왜가리는 입 속에 자신의 분신인 또 다른 왜가리를 갖고 산다. 이중의 정체성이다. 하야오가 볼 때 그게 꼭 자기 프로듀서인 스즈키의 아이덴티티였던 것이다. 실제로 제작자와 감독의 관계는 이중적인 측면이 있다. 제작자는 감독을 존중하지만, 감독의 고집을 비난하곤 한다. 역으로 감독도 같다. 특이한 것은 스즈키 토시오가 이 다큐의 촬영 기간인 7년간 점점 배가 나온다는 것, 그것도 올챙이 배처럼 나와서 실제로 왜가리의 외모를 닮아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원제는 ‘하야오 미야자키 그리고 왜가리(Hayao Miyazaki and the Heron)’이다. 영화에서는 왜가리, 다큐에서는 스즈키 토시오가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영향 준 파쿠 상과 얏칭, 집사
미야자키 하야오는 늘 불면증에 시달리고, 잠을 자더라도 쪽잠을 자는 정도인데 잠이 안 와서 고통을 받을 때마다 스즈키를 찾거나 그에게 전화를 건다. 처음의 료칸 장면에서도 하야오는 잠이 안 온다며 스즈키에게 같이 자 달라고 한다. 이렇게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으면 보이진 않지만 머릿속에 손이 들어와 마구 헤집어. 머릿속이라기 보다는 거무스름한 곳에서 영화 조각을 꺼내지. 서로 붙여서 이으면 뭔가 나올 텐데.” 이 잠꼬대 같은 독백 이후 나오는 컷이 부제 같은 문장이 쓰인 장면이다. 이렇게 쓰여 있다. 내 머리는 고장난 듯하다.” 이상하게도 이 오프닝 시퀀스에는 뭉클한 뭔가가 있다. 마치 반 고흐의 머릿속처럼 하야오도 ‘수없이 떠다니는 이미지’로 고통받았음을 느끼게 한다.
다큐에는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영향을 준 세 사람이 나온다. 한 명이 그 유명한 파쿠 상이다. 지브리 공동 창업자이자 역시 애니메이션 감독인 다카하타 이사오이다. 파쿠 상이 죽은 뒤 하야오는 급격한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후반에 나오는 큰할아버지 캐릭터(히노 쇼헤이)가 바로 이 파쿠 상이다. 영화 속 큰할아버지는 마히토가 대를 잇기를 원한다. 그는 꾸짖듯 말한다. 혼돈과 혼란의 세상으로 돌아가겠느냐?!”
파쿠 상은 우리말로 하면 ‘쩝쩝이’ 정도이다. 빵을 우물우물 먹는 모습을 애칭으로 바꾼 것이다. 하야오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 중에는 ‘얏칭’이라는 애칭으로 불린 야스다 미치요도 있다. 지브리의 색채 미술감독이다. 그녀는 ‘작품 한편 더’를 주문해 하야오가 은퇴를 번복하게 한 주인공이다. 에서 키리코 역(시바사키 코우)으로 나온다. 섬에서 만나는 중성적인 뱃사람인 여인 키리코는 소년 마히토에게 인생을 살아가는 방향을 가르쳐 준다. 야스다 미치요가 그랬다는 것이다. 하야오에게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여인은 다케바야시 아키라이다. 하야오의 작업실에서 그에게 식사와 커피를 만들어 주고 생활을 돌보는 개인 비서이자 집사 같은 여성이다. 그녀도 죽는다. 하야오는 충격에 빠진다. 이 아키라의 캐릭터는 영화 속에서 ‘일곱 명의 할머니 집사’로 구현된다.
‘저주의 바다’에서 헤엄친 보상으로 받은 아카데미상
애니메이션 는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아버지가 새엄마(죽은 엄마의 여동생. 이모 나츠코)와 재혼해서 아들을 데려오는 것부터 시작된다. 죽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에 시달리는 마히토는 방황한다. 반항하는 의미로 자기 머리를 돌로 짓이기기도 한다. 그는 이모이자 새엄마인 나츠코의 ‘애정’을 피해 왜가리를 따라 이(異)세계로 간다. 거기서 그는 온갖 존재들을 만나게 된다. 어린 시절의 생모 히미가 나타나 마히토를 돕는다. 이모이자 새엄마인 나츠코도 이(異)세계로 들어와 출산을 준비하나 몸 상태가 좋지 못하다. 마히토는 처음으로 이모를 엄마로 받아들인다. 마히토는 이(異)세계에서 어린 엄마를 만나 자기 자신을 거듭나게 한다. 영화 는 전쟁을 겪는 소년 마히토의 눈물겨운 성장기이다.
다큐멘터리 역시 하야오가 를 치열하게 만들던 2017년부터 2023년까지의 ‘눈물겨운’ 회고록이다. 하야오는 자신의 작업을 가리켜 ‘저주의 바다’로 부른다. 그는 저주받았을지언정,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들은 정반대의 바다를 헤엄치는 경험을 얻는다. 미국 아카데미는 2024년 에 장편애니메이션상을 시상했다. 이 영화는 일본에서 2023년 7월 개봉과 동시에 4억 엔을 벌어들였다. 한국에서는 같은 해 10월에 개봉해 2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으며 흥행했다. 이 전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는 지난 15일 국내에서 개봉됐다.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극장가에 숨어 있는 작품이다. 아까운 다큐멘터리이다. 다큐멘터리는 늘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