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이후의 역사, 나무가 기억한 600년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소설가 황석영이 9일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열린 장편소설 할매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5.12.9. 연합뉴스
황석영의 장편소설 『할매』는 한 작가의 신작이기 이전에, 이 땅의 문명과 인간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이 소설은 인물을 중심에 세우지 않는다. 사건도, 갈등도, 서사적 반전도 의도적으로 약화된다. 대신 한 자리에 600년을 서 있는 팽나무가 있다. 사람들은 그 나무를 할매 라 부른다. 이 단순한 설정 안에 황석영 문학의 후기 세계관, 나아가 오늘 우리가 직면한 생태 위기와 역사 인식의 전환이 집약돼 있다.
『할매』에서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인간 중심의 세계관이다. 우리는 늘 인간을 역사의 주체로 상정해 왔다. 왕과 권력자, 혁명가와 지도자, 혹은 저항하는 민중을 중심에 두고 역사를 서술해 왔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인간은 중심이 아니다. 인간은 오히려 스쳐 지나가는 존재다. 태어나고, 사랑하고, 다투고, 떠나고, 죽는다. 그 모든 과정은 반복된다. 인간의 삶은 격렬하지만 짧고, 그 격렬함은 자연의 시간 앞에서 무력하다.
할매는 말하지 않는다. 개입하지 않는다. 판단하지 않고, 듣고 기억한다. 인간의 언어와 기록이 닿지 않는 영역에서, 나무는 모든 것을 몸으로 겪는다. 전쟁의 불길, 굶주림의 한숨, 수탈의 채찍, 해방의 환호, 산업화의 굉음까지. 인간은 역사를 만든다고 믿지만, 이 소설은 역사를 견뎌낸 존재가 누구인지를 묻는다. 황석영은 이 질문을 통해 역사의 주체를 인간에서 생명 전체로 확장한다.
생태적 관점에서 『할매』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의한다. 이 소설에서 자연은 배경이 아니다. 무대 장치도 아니다. 자연은 주체이며, 인간은 그 안의 한 요소일 뿐이다. 나무는 인간에게 그늘을 제공하고, 인간은 그 아래서 쉬고 기도하고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그 관계는 결코 수평적이지 않다. 인간은 늘 자연을 소유하려 하고, 이용하려 하며, 통제하려 한다. 그 결과는 파괴다.
황석영은 자연을 신성화하지도, 낭만화하지도 않는다. 할매는 인자하지 않다. 그저 존재한다. 생명은 도덕적이지 않으며,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냉정한 인식이 오히려 깊은 윤리를 만들어낸다. 인간이 자연의 중심이라는 착각이야말로 폭력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할매』는 생태 위기의 원인을 기술이나 정책의 실패에서 찾지 않는다. 인간의 오만한 세계관, 즉 인간만이 의미 있는 존재라는 믿음에서 찾는다.
민중의 관점에서 이 소설은 더욱 깊어진다. 황석영은 오랫동안 민중의 삶을 써온 작가다. 노동자, 농민, 떠도는 자들, 이름 없는 사람들의 역사가 그의 문학을 지탱해 왔다. 『할매』에서도 민중은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영웅으로 호명되지 않는다. 그들은 기록되지 않는 삶을 산다. 세금에 시달리고, 전쟁에 끌려가고, 이념에 휘말리고, 산업화 속에서 밀려난다.
이 소설에서 민중은 역사의 중심이 아니라, 역사의 희생자다. 그러나 동시에 민중은 역사를 지속시키는 힘이다. 왕조는 바뀌고, 국호는 바뀌고, 제도는 바뀌지만, 밭을 일구고 아이를 키우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늘 민중이다. 할매는 그들을 모두 본다.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삶의 무게는 기억한다. 이 기억의 방식은 민중사와 닮아 있다. 민중사는 영웅의 이름을 나열하지 않는다. 고통의 구조와 반복을 기록한다.
황석영은 민중을 미화하지 않는다. 민중 역시 폭력적일 수 있고, 이기적일 수 있으며, 약자를 짓밟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민중의 도덕성을 평가하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왜 민중은 늘 고통받는 위치에 놓이는가. 왜 역사는 반복적으로 가장 약한 자들에게 비용을 전가하는가. 할매는 그 질문을 600년 동안 묵묵히 품고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할매』는 승자의 기록을 거부한다. 교과서 속 역사는 연도와 사건으로 정리된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그렇게 정돈되지 않는다. 굶주림은 연도로 기록되지 않고, 공포는 사건명으로 남지 않는다. 할매가 기억하는 역사는 파편적이며, 감각적이고, 축적된 고통의 형태다. 이 소설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하나의 대답을 제시한다. 역사는 기록이 아니라 기억이며, 기억은 말보다 오래 남는다고.
특히 이 소설은 분단과 전쟁을 다루는 방식에서 독특하다. 이념의 대립이나 정치적 분석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전쟁이 자연과 공동체에 남긴 상처가 묘사된다. 총성과 폭격은 지나가지만, 땅은 오래도록 아프다. 사람들은 죽고 떠나지만, 나무는 그 자리에 남아 모든 것을 견딘다. 이 관점은 전쟁을 인간 내부의 갈등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에 가해진 폭력으로 재인식하게 만든다.
황석영 할매 . 창비
『할매』는 또한 늙음에 대한 소설이다. 현대 사회에서 늙음은 쓸모없음과 동일시된다. 생산하지 못하는 존재, 느린 존재, 시대에 뒤처진 존재로 취급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늙음은 지혜이며, 축적이며, 버팀이다. 할매는 움직이지 않지만 무력하지 않다. 오히려 가장 오래 남아 가장 많은 것을 기억하는 존재다. 황석영은 늙은 나무를 통해 늙은 인간, 늙은 공동체, 늙은 문명의 존엄을 복원한다.
이 작품은 빠름과 효율을 숭배하는 시대에 대한 근본적 저항이기도 하다. 산업화 이후 우리는 속도를 진보의 기준으로 삼아왔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 그 결과는 파괴된 자연과 붕괴된 공동체다. 『할매』는 느림의 윤리를 제시한다. 느리게 자라고, 느리게 기억하고, 느리게 사라지는 존재만이 볼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조용히 증명한다.
황석영은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의 문학을 하나의 원점으로 되돌린다. 인간의 고통을 쓰되, 인간만을 중심에 두지 않는 문학. 투쟁을 말하되, 승리를 약속하지 않는 문학. 역사를 쓰되, 결론을 내리지 않는 문학. 『할매』는 작가 개인의 노작을 넘어, 한국 문학이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 소설을 덮고 나면 독자는 묻게 된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남기고 떠나는가. 이름인가, 재산인가, 기록인가. 아니면 우리가 밟고 지나간 땅의 상처인가. 『할매』는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한 그루 나무를 남겨 놓는다. 그리고 그 나무 앞에서 인간은 더 이상 쉽게 말할 수 없게 된다. 말 대신 침묵하게 되고, 침묵 속에서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할매. 101쪽
『할매』는 위로의 소설이 아니다. 희망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소설은 분명한 윤리를 남긴다. 인간은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며,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일부이며, 자연의 중심이 아니라 한 요소일 뿐이라는 윤리다. 이 인식 위에서만 생태와 민중, 그리고 역사는 비로소 하나의 이야기로 다시 연결될 수 있다. 황석영의 『할매』는 그 연결의 가능성을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제시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