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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전의 신화, 한국 복싱 세계 챔피언 1호 김기수
[사람들]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1903년 창립된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의 전신)의 초대 총무 필립 질레트 선교사가 야구, 농구, 스케이트, 권투 등 각종 근대 스포츠를 보급한 이래 수많은 체육 영웅이 탄생했다. 경성운동장 1호 홈런을 친 만능 스포츠맨 이영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런던·헬싱키 올림픽 역도에서 연거푸 동메달을 따낸 김성집, 모든 종목 통틀어 처음으로 세계선수권대회를 제패한 레슬링의 장창선, 한국팀을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준우승으로 이끌고 MVP까지 차지한 박신자…. 한국의 유일한 세계 정상급 스포츠였던 복싱, 인기도 최고 하지만 온 국민을 동시에 환호하게 만든 진정한 스포츠 스타의 효시는 60년 전인 1966년 6월 25일 최초로 프로권투 세계 챔피언에 등극한 김기수였다. 1961년 KBS에 이어 1964년 TBC(동양방송) TV가 개국한 직후여서 많은 국민이 그가 세계 정상에 오르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인 최초의 프로권투 세계 챔피언 김기수 선수의 전성기 모습. (한국권투위원회) 한국계 일본 프로레슬러 역도산이 1950~1960년대 열도를 들썩이게 만든 것도 때맞춰 각 가정에 TV 수상기가 보급된 덕분이고, 미국의 헤비급 프로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1960~1970년대 세계인의 인기를 한몸에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막 등장한 인공위성 생중계 방송에 힘입은 바 크다. 당시 권투는 레슬링이나 유도 등 다른 격투기 종목은 물론이고 구기나 육상 등을 통틀어서도 국내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다. 1948년 런던 올림픽부터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까지 한수안·강준호·송순천·정신조·지용주·장순길 선수가 6개의 메달을 따낼 정도로 그나마 한국이 세계 정상급 수준에 가장 근접한 종목이기도 했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국민의 정치적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고 강대국에 주눅든 국민 사기를 북돋우는 데 스포츠만 한 게 없다고 여겨 엘리트 체육을 집중 육성했다. 남북한 간의 치열한 경쟁의식도 작용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4년 도쿄 올림픽에 이전보다 훨씬 많은 선수단을 파견하고도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두자 태릉선수촌 공사를 벌여 1966년 6월 30일 문을 열었다. 그해 7월 19일 북한 축구 대표팀이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오르자 이듬해 중앙정보부 주도로 양지 축구단을 창단해 맹훈련시키기도 했다. 젖먹던 힘까지 다해 싸우겠습니다, 각하” 김기수의 쾌거에도 정권의 전폭적 지원이 한몫했다. 당시 프로권투에서는 홈링의 이점이 매우 컸다. 기후나 음식 등 컨디션 조절 여건과 관중의 열띤 응원 말고도 심판진의 편파 판정이 흔했다. 원정 경기에서 이기려면 상대를 KO시키거나 다운을 빼앗는 등 압도적인 기량을 과시해야 한다는 것이 통념이었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 챔피언에 도전한 서강일(주니어라이트급)도 1965년 12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홈링의 가브리엘 엘로르데보다 우세한 경기를 벌이고 판정패했다.   김기수 선수의 WBA 챔피언 벨트(위)와 김기수 선수가 사용한 글러브. 글러브에는 그의 사인과 함께 1966년 11월 7일이란 날짜가 적혀 있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김기수 측이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미들급 챔피언이던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한국으로 불러들여 타이틀전을 치르려 하자 벤베누티 측은 대전료로 5만 5000달러를 요구했다. 1인당 GNP(국민총생산)가 131달러에 불과할 때여서 너무 큰돈이기도 했지만 외화 반출을 철저하게 통제하던 시절이라 대통령 재가가 필요했다. 김기수는 청와대로 불려가 대통령을 만났다. 박정희가 자네, 이길 수 있겠어?”라고 묻자 김기수는 자신 있습니다. 젖먹던 힘까지 다해 싸우겠습니다, 각하!”라고 답했다. 이때부터 젖먹던 힘까지 다한다”는 말은 한동안 유행어가 됐다. 정부의 지급 보증으로 대전이 성사됐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코치 보비 리처즈까지 기용하는 등 정부는 총력전에 나섰다. 공동대회장은 권력 실세이던 차지철 국회의원과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이었다. 박정희는 3년 전 개장한 국내 최초의 돔 실내경기장 장충체육관에 고관들을 대동하고 입장해 경기를 관람했다. 함남 북청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1·4 후퇴 때 월남 김기수는 정부가 나서서 홈경기를 주선할 만큼 승산이 있었던 걸까? 챔피언 벤베누티는 어떤 선수였을까? 그날의 경기 장면을 더듬어보기 전에 두 선수의 이력을 살펴보자. 김기수는 1939년 9월 17일 함경남도 북청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1951년 1·4 후퇴 때 월남해 전남 여수에 정착했다. 1954년 여항중학교 육상부 단거리 선수였다가 권투로 전향한 뒤 1957년 전국학생아마추어복싱선수권대회 우승을 계기로 서울 성북고(현 홍익사대부고)로 전학했다. 1958년 도쿄 아시안게임에서 웰터급 금메달을 따내 이름을 알렸다. 한국 복싱 사상 중량급 선수 최초의 국제대회 우승이었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 출전했으나 2회전(16강전)에서 벤베누티를 만나 판정패했다. 생애 첫 패배였다. 한동안 칩거하다가 87승 1패의 아마추어 전적을 끝으로 1961년 10월 1일 프로 무대에 뛰어들었다.   1958년 제3회 도쿄 아시안게임 복싱 웰터급 결승전에서 심판이 김기수 선수의 손을 들어올리고 있다. (대한체육회) 데뷔전에서 이안사노를 TKO로 꺾은 데 이어 두 번째 경기 만에 강세철을 KO로 눕혀 한국 미들급 챔피언에 올랐다. 그 뒤 주로 일본 무대에서 활약했다. 연전연승하며 KO 행진을 펼치자 역도산이 스카우트했다. 역도산은 프로레슬링과 복싱 체육관 리키(力) 파레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1965년 1월 10일 도쿄에서 가이즈 후미오에게 도전해 동양복싱연맹(OBF) 미들급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했다. 벤베누티와 맞붙기 전까지의 프로 전적은 34승 2무였다.   김기수 선수가 1965년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동양 챔피언 벨트를 보여주고 있다. (국가기록원) 벤베누티의 전적은 더 화려했다. 김기수와 16강전에서 맞붙은 로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을 비롯해 아마추어에서 120전 전승 기록을 쌓았다. 1961년 프로에 데뷔해서도 64승(25KO) 무패를 자랑했다. 191㎝의 장신에다 미남형 얼굴이어서 인기가 더욱 높았다. 신문 호외 발행, 카퍼레이드, 기록영화 개봉 두 선수가 격돌한 날은 6·25 전쟁 16주년 기념일이었다. 실향민인 김기수로서는 한 맺힌 날이었다. 장충체육관에는 7000여 관중이 꽉 들어찼다. 대통령 앞에서 이길 자신이 있다고 장담했으니 절대 져서는 안 되는 경기였다. 그러나 전적과 관록으로 보면 벤베누티로 무게추가 기우는 듯했다. 오후 9시 18분 1회전 공이 울렸다. 이튿날 호외를 발행한 동아일보는 지나치게 자기를 과신한 벤은 의외로 김기수의 공격이 날카로운 데 놀라는 듯 신중을 기했으나 3, 4회 및 6, 7회에 김의 레프트 역습으로 오히려 리드를 당했고 상대적으로 자신감을 얻은 김기수는 라이트와 레프트를 구사하여 벤에 육박, 공격의 이니셔티브를 잡기 시작했다”라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도 김기수 선수는 키 큰 벤베누티의 날카로운 레프트훅과 라이트를 교묘히 피하면서 보디블로에 이어 레프트훅을 연타, 유리한 게임을 진행했다”고 경기 장면을 묘사했다.   1966년 6월 25일 WBA 주니어미들급 타이틀전에서 김기수(오른쪽) 선수가 벤베누티 선수의 안면에 라이트훅을 작렬시키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현장에 있던 관중은 승리를 확신하지 못한 채 숨을 죽이고 채점 결과 발표를 기다렸다. 한국 부심 정영수는 72대 69로 김기수의 우세로 판정한 반면 이탈리아 부심 길라디는 68대 72로 벤베누티에 더 높은 점수를 주었다. 승패를 가를 미국 주심 포프의 점수만 남았다. 링 사회자가 벤베누티 68점”이라고 말하자 관중석에서 이겼다”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어 김기수 칠십…”이라고 하는 순간 환호성에 파묻혀 뒷자리 숫자 ‘4’는 들리지도 않았다. 당시 TV 보급률은 1만 가구당 1대꼴이었다. 대부분 국민은 동네 전파사나 다방에 몰려들어 중계방송을 TV로 보거나 집에서 라디오로 들어야 했다. 주심이 김기수의 손을 높이 치켜들어 승리를 선언하자 관중은 일제히 일어나 함성을 질렀다. 링을 내려온 김기수는 귀빈석의 박정희에게 달려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박정희는 얼싸안고 챔피언 벨트를 손수 채워주었다.   김기수 선수의 세계 챔피언 타이틀 획득 소식을 보도한 조선일보 6월 26일자 1면(왼쪽)과 동아일보 호외 1면. 그날이 석간 휴간일인 일요일이어서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등은 호외를 발행했다. (네이버뉴스 라이브러리) 김기수는 이틀 뒤 육군 군악대를 앞세운 오픈카를 타고 시청앞을 출발해 종로와 퇴계로를 따라 퍼레이드를 벌였다. 거리의 시민은 손을 흔들어 축하했고 시청앞에는 사인을 받으려는 인파가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경기 장면을 담은 기록영화 ‘세계의 철권왕 김기수’가 7월 15일 개봉됐다.   김기수 선수와 벤베누티 선수의 세계 챔피언 타이틀전 장면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세계의 철권왕 김기수’ 포스터. (한국영상자료원) 벤베누티 측은 13회가 끝난 뒤 링의 로프가 늘어지는 바람에 6분간 경기가 중단된 것을 문제 삼아 경기 무효를 주장하며 WBA에 제소하겠다고 나섰다. 지친 김기수에게 회복 시간을 벌어주려고 한국 측이 고의로 지연시켰다는 것이다. 벤베누티도 자신이 이긴 경기라며 판정에 강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심판은 이를 일축했으며 WBA도 제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기수는 그해 12월 장충체육관과 이듬해 6월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각각 미국의 프레드 리틀과 알리 파라를 판정으로 이겨 2차 방어까지 성공했다. 그러나 1968년 이탈리아 밀라노 원정 경기에 나섰다가 홈링의 산드로 마징기에게 판정패해 타이틀을 빼앗겼다. 같은 해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OBF 타이틀전에서도 미나미 히사오에게 판정패해 동양 챔피언마저 내줬다. 1969년 삼일절에 미나미를 서울로 불러들여 설욕한 뒤 동양 챔피언 타이틀을 자진 반납하고 미련 없이 글러브를 벗었다. 통산 프로 전적은 49전 45승(17KO) 2무 2패였다. 명동에 4층 건물 사고 챔피온다방 개업 은퇴 후 김기수는 억척스럽기로 소문난 ‘북청 물장수’ 고장 출신답게 매 맞아 번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잘 굴려 서울 중구 명동에 4층짜리 챔피온빌딩을 사고 1층에 챔피온다방을 차렸다. 1996년 9월 간염 판정을 받은 뒤 개신교 신앙생활에 전념하다가 1997년 6월 10일 부인과 2남2녀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이던 해태 타이거즈의 김봉연이 손아래 동서였고, 해태 투수 이상윤은 사위였다. 김기수는 같은 실향민 출신인 해태 감독 김응용과 술친구였다. 이상윤이 감독 친구를 장인으로 둔 덕에 자주 등판한다는 말이 나오자 김기수는 김응용과의 술자리를 딱 끊었다고 한다. 1965년에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 ‘내 주먹을 사라’에 김지미와 함께 주인공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챔피온빌딩은 10층짜리 건물로 재건축됐다. 건물 이름은 그대로이나 챔피온다방 대신 스타벅스가 2, 3층에 들어섰다. 건물을 관리하는 제자 이기현 한국권투위원회(KBC) 이사가 김기수기념사업회 대표를 맡고 있다. 여수시 고소동 여수복싱도장도 김기수기념체육관으로 이름을 바꿨고, 인근에 그를 기리는 벽화 계단이 꾸며졌다.   2025년 전남 여수시 고소동의 김기수기념체육관 인근에 조성된 김기수 벽화 계단. (다대메이커스) 벤베누티는 김기수에게 패한 뒤 미들급으로 체급을 올려 1967년 미국의 에밀 그리피스에게서 챔피언 타이틀을 빼앗았다. 리턴매치에서 패배했으나 3차전에서 다시 승리를 거뒀다. 4차 방어까지 성공했다가 1970년 아르헨티나의 카를로스 몬존에게 12회 TKO로 패한 데 이어 재대결에서도 3회 TKO로 무릎을 꿇어 링을 떠났다. 통산 전적은 82승(35KO) 1무 7패. 김기수의 카퍼레이드를 보고 권투선수가 되겠다고 결심한 중앙고 1학년생이 홍수환이었다. 그는 김기수의 단골 목욕탕을 다니며 친분을 쌓았고, 그의 조언에 따라 열심히 훈련해 1974년 한국인 세계 챔피언 2호가 됐다. 이후 유제두, 염동균, 김성준, 김상현, 박찬희, 김태식, 김철호, 김환진, 장정구, 유명우 등 숱한 ‘김기수 키즈’가 1970~1980년대 한국 복싱의 전성기를 이끌었다.이희용 줌렌즈 hoprav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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