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반동 사이 인간의 품격 지키려 한 샤토브리앙 [사람들] 세상이 뒤집혀도 사람은 사람이어야 한다
역사는 늘 극단을 좋아한다. 한쪽은 모든 것을 갈아엎자 고 외치고, 다른 한쪽은 아무것도 바꾸지 말자 고 버틴다. 그 사이에서 사람부터 살펴보자 고 말하는 이는 대개 양쪽 모두에게 미움을 산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정치가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 1768~1848)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그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귀족이었지만 왕실의 무능을 외면하지 않았고, 혁명의 이상을 이해했지만 혁명이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는 것도 비판했다. 왕정을 지지했지만 왕에게도 쓴소리를 했고, 종교를 옹호했지만 그것을 권력의 몽둥이로 쓰는 일에는 거리를 두었다.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어느 편의 열성 지지층 도 아니었다. 그래서 양쪽 모두에게 미운 털이 박혔다. 정치판에서는 이런 사람을 흔히 배신자 라고 부르지만, 역사는 가끔 그들을 양심 이라고 기록한다.
안네 루이 지로데 드 루시-트리오손의 샤토브리앙 초상화, 1809년(위키피디아)
혁명의 열기 속에서 인간을 잃지 말자
1789년 프랑스혁명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거대한 깃발을 올렸다. 그러나 혁명은 곧 공포정치로 이어졌다.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1758~1794)의 시대에는 혁명의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이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샤토브리앙 역시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망명길에 올랐다. 영국에서 가난과 병을 견디며 그는 오히려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제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인간을 잃으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점이었다.
그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숲은 늙지 않는다. 늙는 것은 인간이다.
자연을 바라보며 인간문명의 오만을 돌아본 이 말은 오늘날에도 묵직하다. 첨단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지만, 사람의 탐욕은 여전히 원시적이다.
샤토브리앙이 어린 시절을 보낸 콩부르 성(위키피디아)
낭만주의는 꽃구경이 아니었다
샤토브리앙은 흔히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러나 그의 낭만은 꽃밭에서 시를 읊는 감상주의가 아니었다. 그는 저서 《기독교의 정신》을 통해 산업과 권력이 밀어내는 인간의 감정과 상상력, 자연에 대한 경외를 되살리려 했다. 또한 《무덤 너머의 회상록》에서는 자신의 삶뿐 아니라 시대전체를 성찰했다.
후대의 빅토르 위고(1802~1885), 알퐁스 드 라마르틴(Alphonse de Lamartine, 1790~1869), 알프레드 드 뮈세(Alfred de Musset, 1810~1857) 등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문학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비판이라는 생각 역시 그의 유산 가운데 하나다.
젊은 샤토브리앙, 앤 루이 지로데트 작품 1790년경(위키피디아)
나폴레옹에게도 할 말은 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는 영웅인가, 독재자인가. 아마 오늘날 인터넷 댓글이라면 하루 만에 수만 개가 달릴 논쟁이다. 샤토브리앙은 처음에는 나폴레옹에게 기대를 걸었다. 혼란을 수습할 지도자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앙기앵 공작 루이앙투안앙리 드 부르봉콩데(Louis-Antoine-Henri de Bourbon-Condé, duc d Enghien, 1772~1804)가 재판다운 재판도 없이 처형되자 그는 즉시 모든 공직을 사임했다. 권력은 효율을 자랑했지만 그는 정의를 물었다. 권력은 늘 급해서 그랬다 고 말한다. 역사는 늘 그래도 하면 안 됐다 고 답한다.
콩데 장군의 군대에 있는 샤토브리앙을 그린 그림(위키피디아)
정치는 편 가르기가 아니라 품격이어야 한다
1814년 부르봉 왕정이 복귀하자 샤토브리앙은 외교관과 장관을 지냈다. 하지만 샤를 10세(Charles X, 1757~1836)가 언론을 탄압하고 의회를 무시하자 그는 또다시 등을 돌렸다. 왕이든 황제든 공화국이든 권력이 시민을 억압하면 비판해야 한다는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정치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원칙을 바꾸지 않는 일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정치인은 당적을 자주 바꾸면서 원칙은 분실신고조차 하지 않는다. 정당은 갈아타는데 양심은 환승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샤토브리앙이 살아 있었다면 정치는 철새가 아니라 등대가 돼야 하는 일 이라고 한마디 남겼을지 모른다.
프랑스 귀족원 의원으로서의 샤토브리앙 1828년(위키피디아)
역사가 남긴 가장 큰 유산
샤토브리앙은 보수주의자였지만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혁명이 남긴 자유도 인정했고, 전통이 지닌 가치도 인정했다. 그는 사회가 오래 버티려면 둘 가운데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둘을 조화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오늘날 세계는 다시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한쪽은 모든 전통을 낡았다며 폐기하려 하고, 다른 한쪽은 모든 변화를 적으로 본다. 둘 다 편하지만 둘 다 위험하다. 극단은 생각을 줄여 준다. 대신 사회도 함께 줄어든다.
샤토브리앙의 마지막 거처였던 뤼 뒤 박(rue du Bac) 120번지.(위키피디아)
오늘의 한국이 배워야 할 것
한국 사회 역시 진영정치의 피로가 깊다. 정책보다 진영이 앞서고, 사실보다 구호가 앞선다. 상대를 설득하기보다 제거대상으로 삼는 문화도 쉽게 눈에 띈다. 사회관계망에서는 하루에도 수없이 편을 정하라 는 압박이 이어지고, 정치권은 그 흐름을 부추길 때가 적지 않다.
샤토브리앙이라면 아마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정치는 사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진영을 위한 것인가.
그의 삶은 한 가지 교훈을 남긴다. 민주주의는 선거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권력을 비판할 자유, 소수의 목소리를 들을 여유, 상대를 악마로 만들지 않는 절제가 함께 있어야 한다.
특히 언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언론이 권력의 확성기가 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귀를 잃는다. 반대로 사실을 바탕으로 권력을 감시하고 시민의 다양한 목소리를 전하는 언론은 사회의 균형추가 된다. 진실은 언제나 어느 한 진영의 전유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확인하고 검증해야 할 공공재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경험한 사회다. 과거를 모두 부정하지도, 현재를 모두 신격화하지도 않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절실하다. 샤토브리앙은 혁명도 경험했고, 제국도 보았으며, 왕정 복고도 겪었다. 그는 그 모든 체제를 통과한 뒤 결국 사람을 이야기했다.
결국 역사는 제도를 바꾸는 사람보다 사람을 지키는 사람을 더 오래 기억한다.
샤토브리앙의 저서 (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