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그림으로 그리움을 그리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늘 바빴다. 거꾸로 들어선 아이도 순산하게 한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으니, 이리 읍내는 물론이고 김제 등 이웃 도시에서도 어머니를 찾는 산모들이 많았다. 산모가 오는 게 아니라 산모를 찾아가야 하는 일이었으니 어머니는 집을 비울 때가 많았다. 6남 4녀, 형제는 많았지만, 그의 유년 시절엔 형과 누나는 직장을 다닌다거니 상급 학교에 다니기 위해 서울로 떠나고 없었다. 이리(지금의 익산) 집에는 엄마와 미취학 아동 민기 둘뿐이었다. 게다가 엄마는 늘 일에 치여 민기는 혼자일 때가 많았다. 동요 ‘섬집 아기’ 속 그 아기 신세였다.
휑한 집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란 노는 것뿐인데, 전쟁 직후 궁벽한 시골에 놀거리가 있을 리 만무였다. 또 워낙 내성적이었던 터라 이웃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 마당에서 붓(작대기)을 잡고 화판(맨땅)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그의 유일한 놀이였다. 풀 나무 새 구름 벌레 등 보고 그릴 건 많았지만, 그가 그리는 것은 마음에서 떠오르는 것들이었다. 사실 세상의 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기보다는 생각나는 것들을 그린다. 그에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마음속 그리운 것들을 그렸다는 것이었다.
누나 형 그리고 잠시만 떨어져 있어도 그리워지는 엄마. 때론 어머니의 결혼식 사진 속, 실물로는 한 번도 못 본 낯선 아버지도 있었다. 민기는 끊임없이 그리고 지우고, 또 그리고 지웠다. 그러다 보면 작대기에서 흘러나오는 선은 직선에서 사선으로, 사선에서 곡선으로, 직선은 면으로, 곡선은 원으로 발전했다. 면에도 조금씩 그림자가 들어가고, 그림자도 짙거나 엷어졌다. 동그라미엔 밝고 어두움이 들어가고, 그러다 보면 표정이 되었다. 표정은 기쁘거나 들뜬 것에서 슬프거나 실망한 것으로, 때론 전체적으로 시무룩해지기도 했다. 그건 아이 마음의 빛깔에 따라 달라졌다.
김민기의 어린시절 그림. 사진 출처: 서울문화투데이
또 같은 대상이라도 그림 속에서는 한 번도 같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면 그릴수록 보이지 않던 것이 나타나고, 알 수 없던 표정과 느낌과 이야기가 살아났다. 속상했던 이야기, 말 못 했던 이야기, 무언가 간절했던 표정이 포함됐다. 아이는 자신이 그린 것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때때로 아이는 저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왜 이런 변화가 나타나는 것인지 아이는 알 수 없었다.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렸고, 그리면서 이야기를 나눴고, 그러면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었다. 아이는 대학에 가서야 비로소, 알 듯 말 듯했던 그 이유를 이렇게 정리하게 됐다. 다음은 2011년 과의 인터뷰에 나오는 대목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술이라고 하는 행위는, 사물의 본체에 관한 탐구 작업, 그것을 알기 위한, 그것을 인식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해서 대학도 미술 대학에 들어갔습니다만, 그림 그릴 때를 돌아보면 그림이란 게 일종의 사물에 대한 인식론이었던 거 같아요. 저는 ‘사물을 어떻게 보는가?’에서 그림을 시작했죠.”
이 과정에서 저는 ‘그림’이라는 말을 이렇게 해석하게 됐습니다. 그림이란 ‘그리움’에서 온 것, 사물의 본체, 사물의 실체에 대한 그리움을 스스로 확인하는 과정이 그림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곤 했지요.”
그린다는 것과 그리워한다는 것, 그림과 그리움 그리고 본체. 그것은 그리움 많은 아이가 그림에 푹 빠진 이유였다. 그는 그림을 통해 그리운 것들을 불러냈다. 겉모습이 아니라 그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려 했다. 철 들고 나서 그의 작업이 다양한 장르로 확장되면서 이런 예술 정신은 노래, 마당극, 굿, 뮤지컬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근원적인 무언가를 찾는 것, 어머니 아이 그리움 사랑 평화….
사이렌소리, 내가 빚은 소리의 원음
유년 시절 김민기가 벗할 수 있는 게 그림 말고 하나 더 있었다. 소리였다.
그는 전쟁 통에서 태어났다. 영유아기는 소리에 가장 민감한 시기. 세상이 그를 맞이한 것은 이 두 개의 상반된 소리였다. 어머니 품에서 듣던 박동 소리나 숨소리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사이렌 등 그를 감싸주는 이 모든 것을 빼앗아 찢어버리는 소리가 있었다. 사이렌은 시도 때도 없이 울렸다. 실제 상황이라며 울리고, 훈련이라며 울렸다. 그가 태어나서 3년 넘게 전쟁은 계속됐고, 전후에도 방공훈련은 계속됐으니, 유년의 일상을 지배하던 것은 바로 그 소리였다. 특히 지하 방공호에서 듣던 사이렌의 낮고 음울하고 컴컴한 소리는 오래도록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휴전하고서도 등화관제는 계속됐다. 저녁을 먹기가 무섭게 두꺼운 군용 담요로 문이란 문은 다 가려야 했다. 깜박이던 백열전등마저 꺼지면 집안은 온통 어둠이었다. 그때부터 그가 벗 삼을 것이라곤 소리뿐이었다. 별빛조차 내쫓아 버릴 듯이 울려대는 사이렌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더 짖어대는 아래 윗집 개들의 소리, 장난감 병정이 행진하는 것 같은 괘종시계의 똑딱이는 소리, 비 올 때면 지붕 밑 물받이 홈통에서 떨어지는 빗물 소리….
따로 또 같이 들리기도 했던 이런 소리들은 사이렌 소리에 베인 그의 상처를 따듯하게 어루만지고, 떨리는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아마도 이 소리는 훗날 그 자신이 빚어냈던 소리들의 원음이 되었을 것이다.
김민기는 1993년 이런 유년의 기억을 소개했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자신의 음반 을 내고, MBC라디오 프로그램(3월 28일)에 출연했을 때였다.
내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최초의 기억은 두세 살 때, 캄캄한 방공호 속에서 듣던 공습경보 사이렌 소리의 공포였습니다.”
저 자신도 노래를 만들 땐 잘 몰랐는데, 이번에 음반 만들면서 지난 노래들을 쭉 다시 접하게 되니까 그 노래(작은 연못)의 경우는 방금 말씀하신 그런 느낌(남과 북의 대립)이 저한테도 있었던 것 같더라고요. 어렸을 때의 기억이나 전쟁 직후의 모습들이 저한테 은근히 진하게 남아 있었거든요. 나는 저도 모르게 그것과 비슷한 내용을 ‘작은 연못’에 담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전설이며 역사이고, 다시 전설이 된 김민기. 사진출처: 학전
어머니는 민기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자 이리에서 하시던 일들을 접고, 서울로 올라오셨다. 김민기는 서울 종로구, 지금의 재동초등학교로 학교를 옮겼다.
어느 날 앞집으로 아버지가 의사라는 가족이 이사 왔다. 그 집 아이는 학교가 끝나고 귀가하면 늘 바이올린을 연습했다. 그게 너무 부러웠다. 민기는 저도 모르게 바이올린 소리를 따라 휘파람을 불었다. 얼마나 열심히 따라 불었던지, 훗날 그는 휘파람의 ‘달인’이 되었다. 자신의 연주곡 ‘눈길’(1971년의 앨범 수록)이나 노래 ‘그 사이’ ‘천 리 길’(1993년 수록)을 녹음할 때 간주로 들어가는 휘파람은 본인이 직접 분 것이었다.
재동초등학교는 서울에서도 일류중학교에 학생을 많이 보내기로 소문난 학교였다. 평준화 이전, 이 학교 졸업생은 한 해 평균 100여 명이나 경기중학교에 입학했다. 특별히 열심히 하지도 않았는데, 김민기는 이런 친구들에 ‘묻어서’ 경기중학교에 입학했다.
미술반 등 12개 특활반에서 활동
경기중, 고교 시절 김민기는 ‘특별한’ 학생이었다. 특별활동이란 활동은 모두 쫓아다녔다. 학교에는 16개의 특활반이 있었다. 김민기는 이 가운데 12개 특활반에 이름을 올렸다. 유년기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서 그랬는지, 김민기는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게 좋았고, 어울리는 시간이 좋았다.
12개 특활반에 전념할 순 없었다. 그가 빠져 지냈던 것은 보이스카우트와 미술반이었다. 보이스카우트는 방학 때마다 캠핑을 떠나 친구들과 야영하는 게 좋았고, 미술반은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좋았다.
게다가 학교에선 특활반 활동 비용을 대부분 지원했다. 보이스카우트의 캠핑 비용은 학교나 협회에서 지원했고, 미술반 활동에 드는 붓, 물감, 켄트지 등 모든 재료는 학교에서 지원했다. 학생은 그저 그리기만 하면 됐다. 그래도 둘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역시 미술반이었다.
그는 경기중, 고교에 다닌 게 아니라 경기중, 고 미술반에 다녔다”라고 할 정도로 미술반에 빠져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학창 시절 내 기억 속에 다른 활동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심지어 수업 시간에도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와 그림을 그리려 했던 것들만 기억난다.”
마당 한 구석에서 작대기로 땅에 그림 그리던 아이가 도착한 곳이 미술반이라면, 보이스카우트 활동은 앞으로 그의 음악 활동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미술반 활동에 비하면 ‘곁다리’였지만,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하면서 노래와 연주의 소양과 실력은 더 깊어지고 늘었으며, ‘한국 포크’의 이정표가 된 노래 ‘친구’가 탄생했다.
중학생 때였다. 보이스카우트는 전통이 있고 규모도 큰 특활반이어서 별도의 동아리 방이 있었다. 그곳엔 누가 연주하던 것인지 모를 우쿨렐레가 하나 있었다. 바이올린만 한 크기의 네 줄짜리 악기였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우쿨렐레는 그의 차지가 되었고, 동아리 방에만 가면 한구석에 앉아 줄을 튕겼다. 솜씨가 제법이었다. 눈여겨보던 선배들은 동아리 방에서나 캠핑에서나 쉬거나 놀 때면 김민기를 찾았다.
사실 노래는 김민기에게 ‘부전공’ 정도의 취미였다. 온종일 입을 닫고 살 수 있는 김민기였지만, 그래도 귀로 듣고, 입안으로 우물거릴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걸 채워준 게 노래였다. 형과 누나에게는 뉴스나 음악 프로그램을 듣던 라디오가 있었다. 형, 누나가 없을 때면, 라디오는 민기의 것이 되었다. 그는 음악 프로그램 애청자가 되었다.
김민기와 통기타와의 만남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동계진학이라지만, 절반 정도는 탈락하던 시절이었다. 음대를 다니던 누나가 고교 합격 선물로 기타를 사줬다. 우쿨렐레를 튕기며 포크송을 흥얼거리던 동생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던가 보다. 누나는 그 선물이 막내의 삶을 완전히 바꾸리라는 걸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게 1966년이었으니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통기타가 유행하기 시작할 때였다. 고교생 정도만 되어도 팝송 한두 곡은 주절거려야 패에 끼던 시절이었다.
김민기와 기타와의 만남은 필연이면서 운명이었다. 2009. 10.29. 연합뉴스
누나는 평소 막내의 음악성이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피아노 전공인 그가 집에서 피아노를 칠 때면 막내는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조용히 듣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치는 오타를 귀신같이 짚어내곤 했다. 막내는 음대생에게도 드문 절대음감이었다.
당시 통기타가 유행하기 시작하긴 했지만, 기타 하면 일렉트릭 기타였다. 그룹사운드가 쓰는 일렉트릭 기타나 베이스 기타가 기타였다. 일렉트릭은 울림통이 없어 전기적 장치가 필수였다. 베이스 기타는 밴드에 맞게 콘트라베이스를 축소한 네 줄짜리 악기였다. 축소했다지만, 갖고 놀기엔 너무 크고 음역이 한정돼 있었다. 베이스건 일렉트릭이건 모두 쇠줄이었다.
누나가 선물한 통기타는 삼익에서 내놓은 시제품이었다. 쇠줄 대신 나일론 줄을 사용했고, 여섯 줄이었으며 울림통이 컸다. 클래식 음악이나 싱어송라이터들이 혼자서 노래도 하고 반주도 할 때 쓰는 것이었으니 김민기가 갖고 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김민기는 통기타에 대해 이미 웬만큼 알고 있었다. 당시 미국 본토에서 한참 유행하던 포크송들이 미군의 소리 방송(AFKN) 등을 통해 한국에 소개됐고, 대학가의 일부 진취적인 학생들은 통기타를 치며 프로테스트 포크를 불렀다. 공중파 방송에서도 반전 가요를 제외한, 나긋나긋한 포크송을 자주 송출했다. 김민기는 특히 1960년대 미국 포크를 이끌었던 그룹 ‘피터, 폴 앤 메리’의 노래를 좋아했다. 그를 통해 자연히 클랜시 브라더스, 밥 딜런, 조안 바에즈 등의 반전 포크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노래는 사실 부전공도 아니고 심심풀이였다. 주 관심사는 여전히 그림이었다. 그가 미대에 진학하여 화가의 길을 가리라는 것을 그 자신이나 가족 모두 의심한 적이 없었다. 고3 여름방학, 동급생들은 입시에 전념하고 있을 때 그는 보이스카우트 서울협회의 캠포리(정기 야영활동)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던 그 삶의 미래를 흔드는 사건과 마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