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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마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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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미성 재즈 가수 재즈는 처음에 모든 연주자들이 테마(멜로디)를 연주하고 나서 돌아가며 즉흥연주(솔로)를 하게 되는데 이때 연주자들이 보고 있는 것은 악보의 음표들이 아니라 각 마디 위에 적힌 코드들이다. 이것은 곡의 구조를 알려주는 사인이다. 재즈연주를 들으며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필(feel)의 원천은 ‘빈 마디’다. 연주자들은 빈 마디를 연주하고 있는 것이다. 연주자들은 그 빈 마디를 채우기 위해 수 년, 수십 년을 고민하고 연습한다. 그러나 필은 결코 완성되지 않고, 자연스러워질 뿐이다. 빈 마디를 너무 많이 채웠다면 몇 마디는 그대로 쉬어가도 좋다. 각 연주자들은 보이지 않는 음표로 자기만의 ‘서사’를 만들고, 그 미세한 신화를 완성하기 위해 연습, 연습, 그리고 또 연습한다. 재즈 연주의 형식이 흥미로운 것은 처음에 다 함께 테마를 연주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 다음 각자의 솔로를 전개하며 문제를 다시 제시한다는 점이다. 제시라기보다는 오히려 제안에 가깝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너의 의견은 어때?”라는 연주를 시작하면 “음~ 가만 있어보자. 잠깐 들어보고 알려줄게”라는 연주로 화답하는 것이다. 문제 해결과 문제 제시가 뒤바뀌는 상황. 이것이 재즈의 매력이다. 재즈는 “말없는 것을 고백해야 하는 예술” 또는 “연약함에 대한 음악” 이렇게 각자의 이야기를 마친 후 처음의 테마(이야기)로 돌아간다. 사실, 테마를 끝내고 시작되는 빈 마디의 연주는 낯설고 두렵기 마련이다. 이 두려움을 완화시킬 방법은 테마 베리에이션이다. 기존 멜로디와 닮아 있으면서 약간 다른 각색의 과정이다. 베리에이션을 연습하다 보면 곡의 흐름을 더 가까이 인지할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방법은 동기부여(motivation)이다. 테마를 만들 만한 실마리(멜로디)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단발적으로 사라지는 멜로디가 아니라 기·승·전·결의 맥락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코드와 리듬, 화성진행에 대한 분석을 마친) 이런 과정을 통해 연주자의 솔로(글쓰기에서의 서사)가 완성된다. 빈 마디. 이것은 다름아닌 삶이라는 ‘텅 빈 서판 (Tabula Rasa)'이다. 살아있는 한 연주든 일상이든 마디와 서판을 채워나가야 한다. 비우고 채우기, 때로 채우고 비우기. 그 지난한 선택은 각자의 몫이고 운명이다. 그림에 대한 푸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재즈는 “말없는 것(빈 마디)을 고백(연주)해야 하는 예술”이다. 자코메티 '걷는 사람' 재즈 색소폰연주자 조슈아 레드맨(Joshua Redman)은 “재즈는 연약함에 대한 음악”이라고 말한다. 무대에 오를 때 무엇을 연주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올라가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다른 연주자 와 잘 연결되기 위해서는 열린 상태로 들을 준비가 된 상태로 자신의 약함을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나는 재즈에 대해 이처럼 멋진 표현을 들어본 적이 없다. ’연약함‘에 대한 음악이라니! 빈 마디를 직면해야 하는 연주자들에게 연약함은 숙명과도 같다. 빈 마디는 그러나 비워진 채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텅 빈 카오스의 공간은 연주자들에게 있어 결정적 자유와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상상의 유토피아다. 빈 마디 안에서 연계된 상상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한다. “이야기하기 위해 인내하라. 그 후엔 이야기를 통해 인내하라”는 페터 한트케의 명언은 매 순간 빈 마디의 보이지 않는 선율을 구상하는 재즈 연주자들에게 가장 현실적인 조언으로 들린다. 빈 마디는 타인을 향해 늘 열려 있는 공간이다. 채워져 있는 것은 열리지 않는다.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들이 여전히 빛나는 것은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악보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그의 철학이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워냄으로써 채워지는 빈 마디가 재즈의 진정한 힘 모든 연주자들이 빈 마디의 서사(즉흥연주)를 마치고 처음의 테마로 돌아갈 때, 그전까지 연주자들이 펼쳐 보였던 솔로는 소멸한다. 모든 것을 비워냄으로써 채워지는 빈 마디. 이것이 재즈의 힘이다. 낯선 세계로 향한 결핍과 연약함, 진정한 힘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영혼의 빈 마디가 가장 많았던 쳇 베이커. 그는 삶의 벼랑 끝에서 걸어 나올 수 있는 자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를 가졌다. 실패와 방황과 마약으로 피폐해진 영혼, 연약하지만 꾸밈없는 그의 노래는 언제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무심히 계속 듣게 되는 노래. 그는 실패하지 않았다. 나는 너무 매끈한 브랑쿠시의 조각 ’새‘ - 이보다 매끈할 수는 없다 - 보다는 위태롭게 허공을 가로지르는 거칠고 우울한 자코메티의 조각 ’걷는 사람‘에게 더 끌린다.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가녀린 청동조각들. 우리 내면의 해구를 들여다보는 듯한 그의 인물들은 감상의 불편함을 견딜 수만 있다면 그들이 던진 질문에 답하고 싶은 마음마저 들게 한다.   쳇 베이커. 브리태니커 자코메티는 완성된 작품들의 조각들을 계속 발라내고 제거해 나간다. 작품이 해체되고 뼈대만 남을 때까지. 뼈대, 이것이 자코메티의 빈 마디다. 자코메티는 작품을 만들 때 그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충실하게 표현하려고만 했으며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싶어서 매일 시도를 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작품 속에서 본질을 끄집어내려는 그의 철학과 작업과정은 지극히 재즈적이다. 나는 또 연약함이 느껴지는 글들을 좋아한다. 가령 로맹가리의 소설 <그로칼랭>에 나오는 구절.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약한 사람이다. 그래서 잘났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냥 인정하는 것뿐이다. 내가 너무 약하게 느껴져서 뭔가 잘못됐다 싶을 때도 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서 이렇게만 말해둔다.” 혹은 말라르메의 발표되지 않은 시들. 그가 진정으로 아꼈던 시는 사람들에게 “이러저러한 것을 쓰고 있다. 이러저러한 것을 구상 중이다”라고 얘기하는 시간들이었다. (처음부터 그는 발표할 마음이 없었다) 실제로 말라르메는 발표되지 않은 소설들로 유명한 작가다. 그리고 삶 자체가 빈 마디였던 방랑시인 바쇼의 하이쿠들. 결국 나의 취향은 어딘가 연약한 혹은 질문을 던지는, 불안한 작품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불안한 취향들이 모여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 순간은 무대에서 연주를 하게 될 때다. 하루 수십 번 우리 영혼을 죄어오는 조바심. 이것을 당장 내려놓자! 연주자들의 솔로를 계속 듣다보면 빈 마디를 채우는 것은 음표가 아니라 개인의 촘촘히 짜여진 서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다시 한번 테마를 연주하면서 그 이전까지 빈 마디를 채워나갔던 연주자들의 솔로는 과연 사라졌을까? 답은 아니다, 이다. 찰리 파커, 존 콜트레인, 빌 에반스, 덱스터 고든…. 많은 재즈 뮤지션들의 솔로는 다시 기보화되어 악보집으로 나와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연주되고 있다. 전통의 계승과 서사의 진화가 진행되는 순간이다. 얼마 전 이슈가 되었던 책 <서사의 위기>에서 한병철 교수는 서사가 사라지고 스토리텔링과 데이터만 남은 문화현상에 대한 문제점들을 제시한다. 서사와 신화가 사라지고 잡담만 남는 세상이 온다면 상상만 해도 두렵다. 다행히 아직 ’서사‘가 살아 숨쉬는 케렌시아(안식처)가 있다. 개인의 서사가 삶의 형태처럼 펼쳐질 수밖에 없는 곳, 바로 여기 눈앞에 있는 재즈 악보의 빈 마디들이다. 이곳에서는 건너뛰거나 삭제, ’좋아요‘를 누를 필요가 없다. 우리의 상상을 지켜줄 서사의 힘, 그것은 빈 마디에 있다. 삶은 그 자체로 서사가 되어 채워나갈 수 있는 빈 마디다. 그러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 하루에도 수십 번 우리의 영혼을 죄어오는 조바심. 이것만 내려놓으면 된다. 그러나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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