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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걷는 인간, 세계에 다시 몸을 내놓다

걷는 인간, 세계에 다시 몸을 내놓다
[사람들]
나는 10년 전부터 스스로에게 열두 가지 맹세를 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성취를 기록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 맹세들은 오로지 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이었다. 그중 하나가 일주일에 네 번 이상, 천천히 들판을 걷거나 산골짜기를 오른다. 나를 이어주는 모든 관계를 생각하며 기도한다”는 것이다. 이 맹세는 가장 많이 나를 나답게 만들어 주고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약속이기도 하다. 걷기는 언제나 패배한 하루의 마지막에서 나를 불러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을 때, 말이 마음을 배신했을 때, 생각이 생각을 소모시킬 때, 나는 걷기 위해 신발을 신었다. 걸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루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걷기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오래전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을 읽으면서부터였다. 브르통은 말한다. 걷기는 자신을 세계로 열어 놓는 것이다.” 이 문장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그는 걷기를 신체 활동이나 건강 관리의 수단으로 축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걷기는 인간이 세계 속으로 다시 진입하는 가장 오래되고도 근본적인 방식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걷는 존재로 태어났고, 걷는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해 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걷지 않게 되었고, 그와 함께 세계와의 관계도 점점 축소되었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너무 빨리 이동한다. 이동의 속도는 빨라졌지만, 이동의 밀도는 얕아졌다. 차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동안 우리는 공간을 통과할 뿐, 공간에 머물지 않는다. 발이 땅에 닿는 시간이 줄어들수록, 우리는 장소를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브르통은 바로 이 지점을 짚는다. 걷기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장소와 관계를 맺는 행위라는 것이다. 발로 걷는다는 것은, 몸 전체를 세계에 노출시키는 일이다. 바람의 방향을 느끼고, 흙의 습도를 감지하고, 나무의 냄새와 계절의 소리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걷는 동안 인간의 감각은 다시 깨어난다. 시각은 풍경을 스캔하는 도구가 아니라 머무는 기관이 되고, 청각은 소음을 걸러내는 필터가 아니라 존재의 울림을 듣는 통로가 된다. 브르통이 말하는 ‘능동적 명상’이란 바로 이런 상태를 가리킨다. 나는 걷기를 식사처럼 생각한다. 하루 한 끼라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 몸이 신호를 보내듯, 며칠 동안 걷지 못하면 마음이 먼저 반응한다. 초조해지고, 언어가 거칠어지고, 타인의 말이 쉽게 마음에 걸린다. 걷기는 나에게 감정의 소화를 돕는 과정이다. 생각이 너무 많을 때, 나는 생각을 해결하려 들지 않고 걷는다. 그러면 생각은 다리의 리듬에 맞춰 저절로 정리된다.        다비드 르 브르통(스트라스부르 대학 사회학과 교수) 『걷기 예찬』이 특별한 이유는, 이 책이 걷기를 미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브르통은 걷기가 언제나 평온하거나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걷는 동안 인간은 자신의 불안과 마주하고, 기억과 충돌하고, 때로는 지루함과 싸운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걷기는 진정한 의미를 획득한다. 걷기는 자신을 외면하지 않는 연습이며, 세계를 도구화하지 않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오솔길은 땅 위에 새겨진 기억이다. 수많은 보행자들이 남긴 발자국의 잔여이며, 인간의 시간이 자연과 겹쳐진 흔적이다. 길은 단순히 목적지로 가는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지나간 자리다. 나는 숲길을 걸을 때마다,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걸었던 이들을 떠올린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걸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존재는 분명 이 길 위에 남아 있다. 걷기는 혼자가 되는 일이지만, 동시에 가장 깊이 연결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나는 혼자 걷는 동안 오히려 나를 이루는 관계들을 더 선명하게 떠올린다. 가족, 친구, 스쳐간 얼굴들, 이미 떠난 이들까지. 걷는 동안 그 관계들은 부담이 아니라 기도로 바뀐다. 브르통이 말하듯, 걷기는 세계로 나를 여는 행위이며, 동시에 나를 통해 세계가 다시 숨 쉬게 하는 행위다. 이 책을 읽는 경험 자체가 하나의 산책과 같다. 문장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속도가 느려지고 생각의 호흡이 길어진다. 그것은 의무나 결심이 아니라, 몸이 먼저 알아차린 요청이다. 다비드 르 브르통이 걷기를 ‘인식의 예찬’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분명하다. 걷기는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인식을 머리의 작용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브르통에게 인식은 전신의 사건이다. 인간은 발로 세계를 읽고, 다리로 거리를 가늠하며, 호흡으로 공간의 깊이를 측정한다. 현대인은 대부분 앉아서 세계를 이해한다. 책상 앞, 화면 앞, 회의실 안에서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 생각은 종종 자기 자신을 반복하는 데 그친다. 걷기는 사고를 이동시킨다. 장소가 바뀌면 생각의 방향도 바뀐다. 풍경은 질문을 던지고, 길은 사유를 분산시킨다. 그래서 걷는 동안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다르게 보게’ 된다. 브르통은 걷기를 반(反)효율의 행위라고 말한다. 걷기는 가장 느린 이동 방식이며, 가장 많은 우회를 허용한다. 그러나 바로 그 비효율성 속에서 인간은 잃어버린 감각을 회복한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게 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길 위에 존재하게 된다. 나는 걷기를 ‘빈 창’이라고 부른다. 아무것도 띄우지 않은 화면처럼, 걷는 시간은 어떤 성과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 빈 창이 없다면, 나의 하루는 끊임없이 채워져 있을 것이다. 걷기는 비워내는 시간이 아니라, 비워둘 수 있는 여백을 허락하는 시간이다. 길 위에서 나는 수행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그것은 종교적 의미의 수행만을 뜻하지 않는다. 걷는 동안 나는 나 자신을 다루는 법을 배운다. 조급함이 올라올 때 속도를 늦추고, 생각이 날뛰면 숨을 고르고, 피로가 몰려오면 멈춘다. 걷기는 자기 통제의 훈련이 아니라 자기 존중의 연습이다. 브르통이 걷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다시 몸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발로 세계를 읽고, 다시 길 위에서 자신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걷기는 과거로 돌아가는 향수가 아니라, 미래를 다시 설계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이다. 어떤 때는 하염없이 걷고 싶을 때가 있다. 목적도, 계획도 없이 그저 걷고 싶어진다. 그런 순간 나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걷는 순례자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왜 걷는가. 답은 단순하다. 걷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브르통은 걷기를 삶의 태도로 확장한다. 걷는 인간은 세계를 소유하지 않고 통과한다. 정복하지 않고 만난다. 이는 현대 사회가 잃어버린 윤리이기도 하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하고, 너무 빨리 결과를 요구한다. 걷기는 그 흐름에 저항하는 가장 조용한 방식이다. 나는 매일 숲길을 걸으며,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본다. 어제와 오늘의 나무는 같지 않고, 같은 길도 같은 얼굴을 하지 않는다. 걷기는 변화에 대한 감각을 되살린다. 그래서 걷는 사람은 완고해지지 않는다. 그는 늘 이동 중이기 때문이다. 『걷기 예찬』은 말한다. 걷는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살아 있음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라고. 나는 이 문장에 깊이 고개를 끄덕인다. 걷는 동안 나는 삶을 관리하지 않고, 삶과 동행한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혼자서 걷는 것은 명상, 자연스러움, 소요의 모색이다. 옆에 동반자가 있으면 이런 덕목들이 훼손되고,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며, 의사소통의 의무를 지게 된다. 침묵은 혼자 떨어져 있는 보행자에게 없어선 안 될 기본적 바탕이다. -49p  박철 시민기자 pakchol@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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