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지배자들의 자해적 무기 ‘러시아 혐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벨랴코프 일리야 수원대 인문사회대 교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고 서방과의 완전한 단절을 선동하기 위해 이른바 ‘루소포비아(Russophobia, ‘러시아 혐오’)’라는 개념을 적극 휘두른다. 전 세계가 정치적인 이유로 러시아 문화를 ‘캔슬(취소)’하고 러시아인들을 물리적으로 공격하거나 일상적인 서비스를 거부하며 혐오하고 있다는 서사다.
세계가 러시아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공격한다”
러시아 언론의 보도 행태를 보면 헛웃음이 나온다. 예를 들어 태국에서 러시아 관광객이 강도를 당하면 그가 러시아인이기 때문에 표적이 된 것 이라며, 태국인들은 절대 미국 관광객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식으로 억지를 부린다. 또 유럽의 은행에서 러시아 국적자의 계좌 개설을 거절하거나 미국의 택시 기사가 승차 거부를 하면 온 나라의 언론이 들고일어나 서방이 얼마나 인종차별적이고 문화차별적인 공동체인지 보라 며 세상이 끝날 듯한 이슈로 둔갑시킨다. 한마디로 철저히 왜곡된, 아무 근거 없는 국가 프로파간다(선전 선동)다.
이 ‘러혐’ 카드는 러시아 정부 입장에서 매우 편리한 도구다. 일단 국내 대중에게 꽤 잘 먹힌다. 해외 언론의 정당한 비판도 전부 ‘러혐’으로 돌리고 정부가 내놓는 억지 정책들도 ‘이 거대한 혐오에 맞서기 위한 조치’로 훌륭하게 포장된다. 즉, 러시아 정부가 전 세계와의 전쟁에서 고군분투하며 용감하게 싸우고 있다는 프레임을 씌우는 것이다.
러시아 내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러혐’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떠나, 러시아 밖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뻔한 선동이다. 푸틴 정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와 공포, 불신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그것이 러시아의 전통문화에 대한 ‘캔슬’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는 내 개인적인 경험은 물론, 해외에 거주하는 지인들의 증언과 언론 보도를 종합해 내린 확고한 결론이다.
당장 한국만 봐도 그렇다. 한국 역시 서방 국가들과 연대해서 대러시아 경제 제재에 동참했지만 러시아 문화 예술 행사마저 막진 않았다. 러시아 미술전, 음악회, 뮤지컬, 심지어 코미디언과 가수의 내한 공연까지 열리고 있다. 주한 러시아 기관들은 한국도 전 세계와 나란히 러시아 문화를 캔슬 하고 있다 며 우는 소리를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한국은 본래 러시아에 꽤 우호적인 국가였다. 2022년 러시아의 일방적인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여론이 악화된 것은 당연하지만 ‘문화 캔슬’에 해당하는 현상은 찾아보기 어렵다. 러시아 문학과 문화에 관한 책을 출간한 나는 지금도 관련 특강과 방송을 이어가고 있고 한국 대중은 여전히 깊은 관심을 보여준다. 현재의 러시아 정권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해서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 문학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치인들은 그렇다고 주장하지만 말이다. 평소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는 나로서는 유럽의 유명 박물관을 갈 때마다 여전히 훌륭한 러시아 명작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고 오디오 가이드에서 러시아어 서비스가 정상적으로 제공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다.
러시아 문화 캔슬 하는 장본인은 러시아 정부 아닌가
바로 여기에 거대한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지금 전 세계에서 러시아 문화를 가장 앞장서서 ‘캔슬’하고 혐오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러시아 자신이다. 러시아 내부에서는 극심한 검열로 영화의 주제와 내용을 통제하고 출판의 자유를 사실상 짓밟았다. 세계가 인정하는 러시아 고전문학의 일부 작품들마저 줄줄이 금서 조치를 당하고 있으며 인터넷 검열과 언론 통제는 일상이 되었다. 자국 내 표현의 자유를 철저히 파괴한 이들이 전 세계가 우리 문화를 캔슬 하고 있다 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모습을 보면 웃음 밖에 안 나온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옛말은 딱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BBC 러시아어 서비스 ‘ 우리 모두 리스트에 빠져 허우적대.” 러시아에서 금서가 어떻게 사라지는가’ 기사 중 관련 사진. 2025.6.11
물론 서방의 강도 높은 경제 제재로 인해 해외로 도피한 러시아인들의 삶이 힘겨워진 것은 사실이다. 러시아 은행 발급 카드는 해외 결제가 막혔고 온라인 서비스 이용이나 송금 등 금융 거래도 꽉 막혀 있다. 게다가 러시아와 관련된 정치나 경제적 활동에 국제사회의 시선이 워낙 예민해지다 보니 일부 기관들이 방어적으로 대응하는 과정에서 간혹 ‘문화를 캔슬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정치 제재의 여파일 뿐이다. 그 누구도 그 어느 곳에서도 러시아의 전통문화와 언어, 역사와 미술을 금지하지 않는다. 러시아 문화를 가장 잔인하게 억압하는 곳은 역설적이게도 러시아 그 자체다. 러시아 정부야말로 지나친 사회 통제와 예술 검열, 그리고 바른말을 하는 공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캔슬’을 통해 자국의 문화를 가장 심각하게 왜곡하고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