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와 수호전 대신 홍루몽 읽어라 류짜이푸 별세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Inf.news 갈무리
1980년대 중국의 자유주의적 문화 운동에 앞장섰고, 우리에게는 중국을 대표하는 고전 삼국지 와 수호전 을 독창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던 문학평론가 겸 작가 류짜이푸(劉再復)가 지난 24일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홍콩의 밍바오는 유가족의 말을 인용해 류짜이푸가 이날 저장성 항저우에서 지병으로 세상과 작별했다고 전했다.
류짜이푸의 딸 메이는 위챗에 온 가족이 아버지의 별세로 슬픔에 잠겨 있다”며 아버지는 33년간의 미국 생활 동안 중국 지식인으로서 위엄을 지키며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적, 정신적 터전을 세웠다”고 적었다.
고인은 1941년 푸젠성 난안에서 태어나 1963년 샤먼대 중문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소장과 잡지 ‘문학평론’ 편집장을 역임하면서 중국의 새로운 문화예술 연구를 이끄는 대표적 지식인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 종결과 개혁·개방 정책의 영향으로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과 중국의 전통 미학 등 새로운 사상 전반에 대한 청년층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1989년 톈안먼 민주화 항쟁 이후 류짜이푸는 망명 생활을 하면서 중국 문학에 관한 연구와 강의를 이어갔다. 시카고 대학교, 스톡홀름 대학교, 콜로라도 대학교, 홍콩 시립대학교 등 여러 대학의 석좌교수와 방문교수로 활동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성격 결합에 관하여 , 루쉰의 미학적 사상에 관한 수필 , 붉은 방의 꿈 사서 가 있으며, 딸 류젠메이와 함께 세상을 이해하는 서한집 을 공동으로 썼다. 홍루몽 등 중국 고전 연구로도 이름높다.
중국 사상가인 리쩌허우(李澤厚, 2021년 작고)와 함께 출간한 대담집 고별 혁명 (Farewell to Revoulution, 1995)에서 혁명이 아니라 비폭력적이고 점진적 개혁을 통해 사회를 바꿔나갈 것을 주장했다. 이 책은 타인을 ‘반동’이라고 규정하지 않는 새로운 사회운동을 주장하며 공산혁명, 문화대혁명, 톈안먼 항쟁에 이르기까지 중국 현대사에 대한 통렬한 반성을 담아 중국 지식인들에게 큰 논쟁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별 혁명 은 1995년 홍콩, 1999년 대만, 2003년 한국에서 번역 출간됐다. 물론 본토에서는 출간되지 않았다.
어려서는 수호전 을 보지 말고, 늙어서는 삼국지 를 보지 마라 는 말이 있다. 아큐정전 의 루쉰도 삼국지 의 분위기와 수호전 의 분위기가 당대 중국에 남아 있다 고 지적할 정도였다. 고인은 저서 쌍전 (雙典)에서 삼국지 와 수호전 이 반역과 폭력, 권모술수를 정당화하며 중국인의 마음을 통치해 왔다”고 주장하며 이를 대신할 중국 문화의 원형을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책도 2012년 한국에 번역 출간됐다. 국내에서는 삼국지 대신 홍루몽을 읽어라 는 마케팅 구호로 낯익다.
류짜이푸는 열한 살 위였지만 진한 우정을 나눈 리쩌허우가 2021년 4월 20일 91세를 일기로 미국에서 먼저 세상을 등지자 깊은 슬픔에 잠겨 추모사를 남겼다. 그는 고통에 처한 형제들이 함께 도망치고, 함께 혁명에 작별하며, 개혁이 중국의 길임을 확인한다. 스승이자 친구로서 함께 낙원을 만들어가며, 떠돌림이 세상의 원리임을 이해했는데 라고 안타까운 심경을 드러냈다. 그는 한때 중국사회과학원 동료였으며, 이후 미국에 거주하며 가까운 친구가 됐던 리쩌허우에 대해 중국 본토 현대 인문학의 대표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라고 평가했다.
미국 콜로라도주에서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누던 시절의 류짜이푸(왼쪽)와 리쩌허우. Inf.news 갈무리
두 사람은 고별 혁명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20세기 중국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고 그 전체적인 성격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사건은 혁명이었다. 우리가 말하는 혁명은 대규모 폭력(이른바 민족 혁명은 제외)과 같은 급진적 수단으로 기존 체제와 권위를 전복하는 강력한 행동을 의미한다.
저자들은 혁명이 아닌 개혁 을 옹호하며, 영국식 개혁을 지지하고, 프랑스식 격렬한 혁명을 반대한다 며 계급 모순 해소는 계급 조화, 협상, 상호 타협, 협력—즉, 혁명이 아닌 개혁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 고 말했다.
2021년 9월 3일 한겨레신문에 따르면, 국내에 돋보이는 중국문학을 꾸준히 소개한 김태성 번역가는 1995년의 어느 날, 콜로라도에 머물던 중국의 석학 류짜이푸가 콜로라도대 객좌교수로 초빙된 리쩌허우를 한 주에 한 번씩 만나 중국의 지난 100년을 돌아보는 대담을 하고 이를 책으로 펴냈다는 소식을 듣고 번역했다. 저작권 문제를 풀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이다.
김 번역가는 몇 년을 고심하다가 류짜이푸가 홍콩 시립대 객좌교수로 부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홍콩으로 날아가 번역한 책을 양면인쇄해 가제본해서 가져가 류짜이푸 교수에게 보여주면서 계약을 하자고 하니까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기꺼이 서명하더라”고 들려줬다.
이렇게 맺은 인연으로 류짜이푸를 두 번째 만났을 때, 한국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뛰어난 작가이니 꼭 책을 내달라”고 부탁받은 이가 지금은 세계적인 소설가로 대우 받으며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옌롄커다. 김태성 번역가는 그에게 건네받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웅진지식하우스 2008)를 시작으로 일광유년 (자음과모음 2021)까지 10권의 옌롄커 소설을 옮겼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는 소설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영화로 만들어졌으나 흥행에는 신통찮은 성적을 거뒀다. 임병선 에디터 byeongseon1610@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