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불씨 던진 데카르트는 계엄 보며 뭐라 할까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중부 투렌 지방의 작은 마을 라에(La Haye, 훗날 그의 이름을 따 데카르트 로 개명)에서 태어나 54년을 살다 간 이 남자는, 한마디로 말하면 의심의 달인이었다. 그것도 보통 의심이 아니라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 나를 속이는 전능한 악마가 있는 건 아닐까? 까지 밀어붙이는, 오늘날로 치면 극단적 회의주의자였다. 요즘 인터넷 댓글창에서 다 거짓말이야! 를 외치는 분들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차이가 있다면 데카르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걸 의심하다가 마침내 한 가지 사실을 붙잡았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의심하고 있는 나는 분명히 존재하잖아? 이것이 그 유명한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 우리말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다. 철학 역사상 가장 짧고 가장 강력한 반전이었다. 17세기 판 어, 근데 이거 하나는 확실한데?
데카르트.(위키피디아)
의심하는 인간, 철학을 다시 짓다
데카르트가 살던 시대는 혼돈 그 자체였다.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유럽을 피바다로 만든 30년 전쟁이 한창이었고, 가톨릭 교회의 권위는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를 종교재판에 세울 만큼 여전히 살벌했다. 실제로 데카르트는 1633년 갈릴레이가 유죄판결을 받자 겁을 집어먹고 출간을 스스로 포기할 정도였다. 그는 용감한 혁명가라기보다는 머리가 비상하게 좋은, 그러나 몸은 사리는 유형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1637년 펴낸 《방법서설》은 세상을 뒤흔들었다. 핵심은 간단하다. 권위가 그렇다고 해서 믿지 마라. 교회가 옳다고 해서 믿지 마라. 전통이 그래왔다고 해서 믿지 마라. 스스로 명확하고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것만 믿어라.
이것이 근대 철학의 출발점이 된 합리주의다.
여기서 잠깐. 17세기 유럽에서 교회 말을 무조건 믿지 마라 고 쓴 책을 낸다는 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검찰 말을 무조건 믿지 마라 고 기사를 쓰는 것보다 훨씬 위태로운 일이었다. 그런 시대에 데카르트는 조심조심, 그러나 분명하게 인간 이성의 깃발을 꽂았다.
데카르트가 태어난 곳, 라 아예 앙 투렌.(위키피디아)
수학, 철학, 그리고 좌표계
데카르트는 철학자이기 이전에 수학자이기도 했다. 우리가 중학교 때 배우는 좌표계(x축, y축)가 바로 그의 이름을 딴 데카르트 좌표계 다. 어떤 날 천장에 붙어 있는 파리를 보다가 저 파리의 위치를 숫자로 표현할 수 없을까? 라는 생각에 좌표계를 발명했다는 일화는 너무 유명하다. 파리 한 마리 덕분에 수학과 기하학이 결합되고, 훗날 아이작 뉴턴(1643~1727)의 운동법칙부터 오늘날의 인공지능 알고리즘까지 이어지는 수학의 대로가 깔렸으니, 그 파리는 가장 위대한 파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또한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을 주장했다. 정신과 육체는 서로 다른 실체라는 이야기인데, 이 주장은 이후 300년 넘게 철학자들의 밥줄이 되었다. 그럼 정신과 육체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라는 질문에 아직도 인류는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으니, 데카르트는 죽어서도 철학과 대학생들에게 숙제를 계속 내주고 있는 셈이다.
얀 밥티스트 위닉스가 1649년에 그린 르네 데카르트의 초상화.(위키피디아)
스웨덴에서의 허무한 최후
말년의 데카르트는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Christina, 1626~1689)의 초청을 받아 스톡홀름으로 간다. 여왕은 새벽 5시에 철학 강의를 해달라고 요구했다. 평생 오전 11시까지 침대에서 생각하는 것을 가장 큰 낙으로 삼았던 데카르트에게 이것은 거의 고문이었다. 결국 그는 스웨덴의 혹독한 추위와 새벽 기상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1650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다. 향년 54.
그의 죽음이 남긴 교훈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생체 리듬을 어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권력자의 무리한 요구는 정중히 사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도.
스톡홀름에서 크리스티나 여왕과 대화하는 데카르트.(위키피디아)
데카르트가 역사에 남긴 것들
그의 영향은 단순히 철학 교과서에 머물지 않는다. 존 로크(1632~1704),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로 이어지는 근대 합리주의 철학의 물꼬를 텄고, 이는 곧 계몽주의로 이어졌다. 볼테르(Voltaire, 본명 프랑수아마리 아루에 François-Marie Arouet, 1694~1778)와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가 왕권과 교권에 맞서 인간의 이성으로 세상을 바꾸자! 외칠 수 있었던 것도, 그 이성의 토대를 데카르트가 닦아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계몽주의는 1789년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불씨가 되었다.
요약하면, 데카르트가 파리 한 마리를 쳐다보며 멍 때리지 않았다면 프랑스혁명도 없었을지 모른다. 물론 이건 과장이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파리의 생제르맹 데프레 성당에 있는 데카르트의 묘(중앙)와 비문의 상세한 모습.(위키피디아)
그래서 대한민국은?
자, 이제 본론이다. 대한민국의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
2024년 12월 3일, 대통령이 느닷없이 계엄령을 선포했다가 국회와 시민의 힘으로 6시간 만에 뒤집혔고, 이후 탄핵과 구속 수사로 이어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거리에는 촛불과 태극기가 다시 맞섰고, 법원 앞에는 군중이 몰렸으며, 방송과 유튜브는 각자의 진실을 외쳤다. 이 혼돈 속에서 많은 시민들이 묻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무엇이 진실인가?
데카르트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좋은 질문이야. 그 의심에서 시작해.
데카르트의 방법론은 명확하다. 첫째, 확실하지 않은 것은 일단 믿지 마라. 둘째, 문제를 잘게 쪼개서 분석하라. 셋째,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순서 있게 나아가라. 넷째, 빠뜨린 것이 없는지 다시 검토하라.
이 네 가지를 오늘 대한민국 언론소비에 적용해 보자. 포털 첫 화면에 뜨는 기사를 그냥 믿는가? 유튜브 썸네일(Thumbnail)의 자극적 제목에 먼저 반응하는가?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의 말은 무조건 옳고, 싫어하는 쪽의 말은 무조건 거짓이라고 느끼지는 않는가? 데카르트라면 이 모든 것에 잠깐, 정말? 이라고 물었을 것이다.
물론 모든 걸 의심하다 보면 아무 것도 못 하는 마비 상태에 빠질 수 있다. 데카르트 자신도 그랬다. 하지만 그는 의심을 통해 결국 하나의 확실한 토대를 찾아냈고, 그 위에 새로운 지식 체계를 세웠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헌법을,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를 다시 쌓으려면 먼저 지금까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정말 옳은가? 물어야 한다.
2016~2017년 촛불혁명은 그런 의미에서 한국판 데카르트적 성찰이었다. 대통령이 하면 합법이다 는 명제를 국민이 광장에서 의심하고 검증하고 뒤집었다. 2024~2025년의 계엄 사태 역시 또 한 번의 집단적 질문이었다. 군인이 국회를 막으면 우리는 그냥 있어야 하나? 시민들은 그러지 않았다.
스톡홀름 아돌프 프레드릭스 키르카 내부의 르네 데카르트 기념관.(위키피디아)
의심은 파괴가 아니라 건설이다
데카르트 철학이 한국 사회에 주는 가장 큰 가르침은 이것이다. 의심은 허무주의가 아니다.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곧 혼란은 아니다. 오히려 제대로 된 의심, 근거 있는 질문, 논리적 검증이야말로 더 단단한 사회를 만드는 토대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어른이 하는 말은 따라야 해 , 전문가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 우리 편이 하면 괜찮아 라는 중세시대 권위주의가 곳곳에 살아 있다. 검찰이든 법원이든 언론이든 종교단체든 정치 지도자든, 어떤 권위도 데카르트적 질문 앞에서는 자유롭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데카르트의 인생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교훈. 그는 새벽 5시 기상을 요구하는 권력자의 부름에 응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아무리 좋은 자리, 아무리 높은 권력의 초청이라도, 내 삶의 리듬과 원칙을 버리면서까지 따를 필요는 없다. 지금 이 순간, 무언가에 끌려 다니고 있다고 느끼는 모든 이들에게 데카르트의 마지막 겨울이 조용히 말을 건넨다.
생각해. 네가 생각하는 한, 너는 존재한다.
데카르트 초상화.(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