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J. 심슨 무죄 밝히는 데 기여한 법의학자 헨리 리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헨리 리 박사가 1995년 8월 26일(현지시간) O.J. 심슨 이중 살인 재판 중 증거물인 혈흔이 종이봉투로 옮겨진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1995.8.26 AP 자료사진 연합뉴스
O. J. 심슨 살인 재판을 비롯해 주목받는 사건에 참여하며 현대 범죄 현장 수사를 대중의 관심사로 끌어올린 미국의 유명한 법의학자 헨리 리가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현대의 셜록 홈즈 , 화인신탐 (华人神探) 등으로 불렸다.
그가 50년 넘게 가르쳤던 뉴헤이븐 대학교의 성명은 고인이 짧은 병환 끝에 지난 27일(현지시간) 네바다주 헨더슨에 있는 자택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고 밝혔다고 미국 CBS 뉴스가 전했다.
중국 출신인 리 박사는 1995년 심슨 재판에서 혈액 증거 처리 방식을 문제 삼은 증언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또 1996년 콜로라도에서 6세 존 베넷 램지 살인 사건, 임신한 아내 레이시를 살해한 혐의를 받은 2004년 스콧 피터슨의 살인 재판, 그리고 2007년 음반 프로듀서 필 스펙터의 살인 재판에서 활약했다.
리의 연구는 말년에 큰 의심을 받기도 했다. 2023년 연방 법원 재판 과정에 1985년 두 명의 코네티컷 남성을 수십 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만든 살인 사건 재판을 조작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중국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눈부신 부상
1938년 11월 22일 중국 장쑤성 루가오에서 태어난 리(李昌钰)는 유복한 상인의 아들이었으나 1949년 대만으로 피신하던 이들이 너무 많은 화물을 선적하는 바람에 침몰해 1000명의 승객 가운데 30여명만 살아남은 태평륜 사건 에 부친을 잃고 가문이 몰락해 스스로 학비를 벌어 공부해야 했다.
먼저 세상을 등진 부인과 함께 대만으로 이주해 경찰행정학 학위를 취득하고 경찰관이 됐다. 이후 경정에 올랐는데 대만 역사상 최연소 경정이었다. 그와 부인은 달랑 수중에 50 달러만 지닌 채 1964년에 미국으로 이주해 법의학과 생화학 분야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중국에는 그의 이름을 딴 다층 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리는 코네티컷에서 1986년 승무원 헬레 크래프트의 실종 사건을 조사하며 처음 주목받았는데, 그녀의 집 근처에서 발견된 뼈 조각, 엄지 끝, 치아 크라운 쓰레기, 머리카락 조각을 이용해 당국이 크래프트의 남편이 그녀의 시신을 훼손해 나무 파쇄기(우드칩퍼)에 버렸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도움을 줬다. 검찰은 시신이 없었는데도 리의 증언 덕에 유죄 판결을 받아냈다.
그는 2000년 코네티컷주 경찰청장 직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을 전한 기사를 통해 가끔은 나를 셜록 홈즈나 찰리 찬과 비교하지. 그건 단지 허구의 인물일 뿐 이라고 말하며 현실에서는 과학자, 탐정, 대중이 함께 협력해야 한다. 광고할 시간도 없다 고 말했다.
리 장관은 계속해서 많은 주목을 받는 사건을 맡았는데 워터게이트 재조사,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 암살 사건 재조사 과정에도 이름을 올렸다. 2020년 주 판사가 1985년 두 남성의 살인 유죄 판결을 취소했다. 리는 수건에 묻은 혈흔이 두 남성의 것이라고 증언했다. 남성들이 유죄 판결에 항소해 검사를 실시한 결과, 그 얼룩은 피가 아니었다.
헨리 리 박사가 2주 전 천수이볜 대만 총통의 암살을 시도한 이가 남부 타이난 시에서 발사한 총탄이 자동차 유리창에 남긴 자국을 조사하기 위해 2004년 4월 9일 돋보기로 들여다보고 있다., 2004,4.9 AP 자료사진 연합뉴스
자신의 명성과 업적 수호
2023년 연방 판사는 리 박사의 증언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명성을 방어하기 위해 증거를 조작하지 않았고, 변호인 측 전문가들이 수건을 검사한 20년 사이에 혈흔이 변질됐을 수 있다고 시사했다.
리 박사는 결국 경력의 대부분을 코네티컷에 기반을 두고 보냈으며, 주 법의학 연구소장으로도 활동했다. 뉴헤이븐 대학교에서는 법의학 프로그램을 학과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리 교수는 이후 학교 내에 자신의 이름을 딴 법의학 연구소를 설립해 법의학 및 형사 사법 전문가들을 교육하고 사건 상담을 제공했다. 또 2004년 당시 법정 TV의 Trace Evidence: The Case Files of Dr. Henry Lee 라는 범죄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진행했다.
옌스 프레데릭센 뉴헤이븐 대학교 총장은 리 박사는 정말 뛰어난 인물이었다 면서 그가 우리 대학뿐만 아니라 법의학과 사법 집행 분야에 기여한 바는 비범하고 비할 데 없다. 그의 유산은 그가 빛나는 경력 동안 영향을 준 여러 세대의 학생들과 법 집행 전문가들 속에 계속 살아 있다 고 밝혔다.
리 교수는 지난해 이 대학의 봄 졸업식에서 졸업생들에게 끈기가 필요하며, 믿으면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은 없다 고 말했다. 동양인으로 실력만으로 미국 주류사회에 이만큼 성공적으로 진입한 이를 찾기 힘들었다.
40권이 넘는 책의 저자 또는 공동 저자인 리 박사는 생애의 마지막 날들에 실종자 수사에 관한 책을 마무리하고 있었다고 대학 성명은 전했다. 국내에도 몇 권이 번역돼 있는데, 앞으로 그의 유작이 출간될 것으로 보인다.
종양 판정을 받았지만 자연치료를 택하며 저술에 몰두했다며 따로 사망 원인을 밝히지는 않았다. 장기 기증(눈만 제외) 서약을 했으며, 장례는 번거롭게 하지 않고 자신의 정신을 계승하는 데 초점을 맞춰달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