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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진적 개혁? 그건 악마의 걸작 엘리자베스 헤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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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은 언제나 비슷한 방식으로 영웅을 고른다. 키가 크고, 턱이 각지고, 의회 연설을 잘하고, 가급적 남성이면 더 좋다. 그리하여 영국 노예제 폐지 운동 하면 으레 등장하는 이름이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다. 그는 실제로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인물의 생각을 바꿔놓은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당시 여자가 무슨 정치냐 는 소리를 들어가며, 팸플릿 하나를 들고 설탕 가게 문을 두드린 미망인 엘리자베스 헤이릭(Elizabeth Heyrick, 1769~1831). 이름조차 생소한 이 여성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엘리자베스 헤이릭의 얼굴과 발언이 새겨진 티 타월(Feminist gifts | Radical Tea Towel) 설탕 한 봉지가 혁명이 되다 엘리자베스 헤이릭은 1769년 12월 4일 영국 레스터에서 태어났다. 본래 성은 콜트먼(Coltman)으로, 아버지 존 콜트먼은 모직 제조업자이자 유니테리언 신자였고, 어머니 엘리자베스 카트라이트(1737~1811)는 시인이자 작가였다. 꽤 진보적인 집안이었던 셈인데, 그 덕에 어린 시절부터 개혁 성향의 지식인들과 어울렸고,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1703~1791)가 집에 방문하기도 했다. 1789년, 그녀는 변호사로 훈련받은 뒤 군에 입대한 존 헤이릭(1762~1797)과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8년 만인 1797년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남편 사후 그녀는 퀘이커교도가 되었고, 이때부터 그녀의 진짜 인생이 시작된다. 애도의 시간은 짧았다. 슬픔을 사회개혁의 연료로 바꾼 것이다. 그녀는 노동자의 생활임금과 노동환경개선, 동물복지, 체벌 폐지, 감옥 개혁, 정치 개혁을 주제로 20편이 넘는 팸플릿을 썼다. 요즘으로 치면 노동·환경·인권·사법개혁을 동시에 외친 운동가인 셈이다. 번아웃이라는 말이 없었던 시대에 태어나서 다행이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대목은 따로 있다. 1807년 영국에서 노예무역이 폐지되자, 윌버포스와 토머스 클라크슨(1760~1846) 같은 주요 폐지론자들은 노예무역이 없어졌으니 노예제 자체도 서서히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야말로 두고 보면 되지 않겠느냐 는 낙관론이었다. 하지만 농장주들은 그런 낙관론을 비웃기라도 하듯 기존의 노예들을 더욱 가혹하게 부렸다. 헤이릭은 1824년 출판한 팸플릿 「즉각적 폐지, 점진적 폐지가 아닌(Immediate, not Gradual Abolition)」에서, 노예무역이 폐지된 지 17년이 지났음에도 사실상 노예거래와 노예제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정면으로 지적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했다. 점진적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의 태도는 악마 정책의 걸작 이라고. 근거 있는 독설이었다. 그녀는 윌버포스를 비롯한 주요 폐지론자들이 의회에서 지나치게 느리고 조심스럽게 운동을 이끌어왔다고 비판하며, 서인도 농장주들이 이 중대한 문제의 논의에서 너무 큰 자리를 차지해 왔고, 폐지론자들은 이 신사들에게 지나치게 정중하고 타협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고 썼다. 이 팸플릿은 처음에 익명으로 출판되었다. 문체가 너무 힘차고 논리가 단단해서 독자들은 이것이 남성의 글일 거라 생각했고, 심지어 하원에서도 남성의 저작으로 인용되었다. 이 에피소드야말로 당시 사회가 여성의 지성을 얼마나 의심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칭찬받으려면 남자인 척해야 했던 세상이었으니.   엘리지베스 헤이릭(findmypast) 말보다 실천, 설탕 가게를 직접 두드린 여자 헤이릭은 팸플릿만 쓰고 방 안에 앉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서인도제도에서 생산된 설탕 불매 운동을 조직했고, 레스터의 식료품점들을 직접 방문하며 노예노동으로 생산된 설탕을 진열하지 말 것을 설득하고 다녔다. 요즘 말로 하면 풀뿌리 현장캠페인 이다. SNS도 없던 시절, 두 발로 걸어 다니며 운동을 만들었다. 레스터에서는 1825년 무렵 시 인구의 약 25%가 서인도산 설탕구매를 중단했다. 대형 농장주들의 이익에 타격을 주기 위해 소비자의 지갑을 무기로 삼은 것이다. 경제적 압박 없이는 법적 변화도 없다는 것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또한 헤이릭은 1825년 버밍엄 여성반노예제협회를 창립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이 단체는 세계최초의 여성 반노예제 단체였으며, 루시 타운젠드(1781~1847), 메리 로이드(1795~1865), 수재너 와츠(1768~1842) 등과 함께 활동했다. 1809년에는 더비셔 본솔에서 소를 이용한 투우 오락을 막기 위해 직접 그 소를 사들여 인근 농가의 거실에 숨겨두기도 했다. 화난 군중이 돌아갈 때까지. 이 장면을 상상해보라. 성난 군중과 한 여성, 거실에 숨은 황소. 이것이 바로 헤이릭식 직접 행동이었다.   1700년대 서양인들이 흑인 노예를 다루는 모습을 그린 그림.(The Abolition of the Slave Trade | Royal Museums Greenwich) 그녀의 유산, 대서양을 건너다 헤이릭의 팸플릿은 퀘이커교 인맥을 통해 미국에도 전해졌고, 1830년대에 여러 판본이 출판되었다. 프레더릭 더글러스(1818~1895),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1805~1879), 루크레티아 모트(1793~1880) 같은 미국의 저명한 폐지론자들이 그녀의 작업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1833년 개리슨은 글래스고 공개연설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즉각 해방이라는 원칙을 세상에 처음 가져다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영국의 한 여성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헤이릭… 그녀는 자유의 고결하고 재능 있고 타협하지 않는 벗이었습니다. 그러나 헤이릭 본인은 자신의 투쟁이 결실을 맺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1831년 10월 18일 세상을 떠났고, 노예제 폐지법은 2년 뒤인 1833년에야 통과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란 이런 것이다. 싸움을 만든 사람이 승리를 보지 못하고, 승리를 기억할 때는 다른 이름이 앞에 선다.   엘리자베스 헤이릭 평전(김성수 시민기자 소장) 한국사회에 던지는 불편한 질문 자, 이제 불편한 부분으로 넘어갈 차례다. 헤이릭의 이야기에서 가장 날카로운 대목은 이것이다. 점진적으로 하면 된다 는 말이 실제로는 지금은 하지 않겠다 는 말과 다르지 않다는 것. 그 논리는 기득권자들이 변화를 지연시키기 위해 쓰는 가장 세련된 도구였다. 헤이릭은 이것을 악마의 걸작 이라 불렀다. 한국사회를 돌아보자. 지금은 경제상황이 안 좋으니까 나중에 , 아직 사회적 합의가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으니까 , 단계적으로 검토해야 하니까. 비정규직 차별, 성별 임금 격차, 이주노동자 인권, 기후대응... 수십 년째 점진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현안들이다. 헤이릭이 지금 한국에 태어났다면, 분명 두꺼운 팸플릿을 들고 국회 앞에서 서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 헤이릭이 설탕 불매운동을 조직한 방식은 오늘날 불매운동의 원형이기도 하다. 법이 안 바꿔주면 우리가 소비로 바꾼다 는 논리. 실제로 이 방식은 효과가 있었다. 시 인구의 4분의 1이 설탕 구매를 끊자, 농장주들의 수익이 타격을 입었고 분위기가 달라졌다. 시민의 소비 선택이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200년 전에 이미 증명했다. 마지막으로. 헤이릭의 글은 처음에 여성이 쓴 것이라고 밝히지 않았다. 밝혔다면 무시당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성별을 숨겨야 했던 시대.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여성운동가들, 노동조합 지도자들, 소수자 인권활동가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내용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 누구냐를 먼저 본다고.   엘리자베스 헤이릭의 원본 실루엣.(Women s History Month - Jocelyn Robson - Pen & Sword Blog) 역사는 점진적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헤이릭을 기리는 한 전기 작가는 그녀를 자신의 성별뿐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사회적 자유의 가장 고귀한 선구자 중 한 명 이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그녀의 이름은 교과서에 없다. 윌버포스가 있고, 클라크슨이 있고, 링컨이 있고, 더글러스가 있다. 헤이릭은 그 이름들의 뒤에, 혹은 아예 각주 안에 묻혀 있다. 역사가 영웅을 선별하는 방식은 여전히 공정하지 않다. 하지만 그녀의 논리는 살아 있다. 불의에 대한 점진적 대응은 불의의 연장이라는 것. 변화는 합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합의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혼자서 설탕가게 문을 두드리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것. 엘리자베스 헤이릭은 62년을 살았다. 하지만 그 62년이 만들어낸 파문은 대서양을 건너고, 두 세기를 넘어,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까지 닿아 있다.   나는 남자이자 형제 아닌가? 1787년 경 제작된 이 상징적인 이미지는 노예제 폐지 운동의 국제적인 상징이 되었다.(Women s History Month - Jocelyn Robson - Pen & Sword Blog)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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