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오케스트라처럼 펼쳐지는 무성영화 ‘란 12.3’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내용이 형식을 규정하지만, 형식 역시 내용을 규정한다. 어떤 때는 후자가 더 강하다. 형식을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 가의 여부가 내용을 더 크게 부각한다. 감독 이명세가 2024년 12월 3일의 불법 비상계엄 사태를 자기식대로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내용만큼 중요한 것이 형식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자신만의 형식과 방식으로 그날 그가 뉴스를 봤을 때의 (자신만의) 흥분감, 쇼크, 그리고 분노를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컨대 707특수임무단이 국회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이상하게도 진혼곡이나 성가대의 착 가라앉은 수난곡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허밍으로 따라 부르기까지 하지 않았을까?) 트랜스 듀오 ‘카에노와 덴조’의 리믹스 버전인 ‘왓 고우즈 업’같은 곡을 떠올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음악감독을 찾아야 해. 그래야 새롭게 기록할 수 있어.”
실제 푸티지(자료 화면)를 섞으면서 영화 전체를 (그것도 다큐를!) 그런 음악의 느낌으로 편집하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야 12.3 친위 쿠데타 같은 새롭지 않은 얘기, 너무나 많이 알려진, 그래서 누구나 다 아는 얘기를, 또 다른 새로움의 기록으로 전달할 수 있으리라고 봤을 것이다. 이명세의 기조, 톤앤매너는 명확해 보인다. 긴박함. 극도의 서스펜스를 표현해낼 것. 전체 구조를 찰리 채플린 때처럼 무성영화의 기법으로 만들어 낼 것 등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가까운 제작 스태프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래서 음악이 중요해. 진짜로 음악이 중요해. 무성영화도 음악이 중요하잖아. (조)성우하고 얘기해야 해. 걔하고 통화해야 해.”
이명세의 이번 영화 을 누구는 ‘시네마틱 다큐멘터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건 그저 다 하는 소리일 수 있다. 이 영화가 순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고백하는 얘기이며 반대로 완전한 시네마도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는 표현일 뿐이다. 은 다큐멘터리에 대한 전통적 논쟁에 대해 다시 한 번 불을 붙일 수 있는 한편(감독의 주관이 적극적으로 개입돼 있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 연출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다큐멘터리가 그 어느 지점에 서 있든, 대중들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대중들은 사실에 충실하되 재미가 있고 지루하지 않으며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다큐를 원한다. 은 철저하게 상업영화의 권역 안에서 평생 연출작업을 해 온 중견 감독이 자기 스타일대로(마치 처럼) 다큐를 찍었고 우려와는 달리 사실과 역사를 전혀 훼손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수많은 대중들을 모으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은 5월 1일 현재 전국에서 16만 2천 명 이상의 관객을 모으고 있다. 메이저 배급사 NEW( 등 배급)가 따라붙었으며 현재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김어준의 유튜브 매체 가 제작을 한 만큼 막강한 홍보마케팅을 구사하고 있다. 20만 이상으로, 바람을 타면 다큐멘터리로서는 보기 드문 큰 흥행을 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1980년 5월 광주 오버랩한 12.3 국회 침탈, 그 공포
은 굳이 말하자면 무성영화이다. 의 많은 대사, 예컨대 윤석열과 김용현의 대화들이나 곽종근 특수전사령관의 음성 등은 모두 자막으로 처리했다. 무성영화는 아무래도 연극적 요소를 많이 가미할 수밖에 없고 장면 중간에 연극의 은막처럼 꾸민 스크린 카드를 통해 전달할 대사를 관객들에게 읽게 한다. 일본식 한자어로 말하면 일종의 ‘간막 자막’인데 영어로는 이를 인터타이틀(intertitle)이라고 한다. 은 인터타이틀 기법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의 가장 큰 특징은 다큐 전체를 하나의 음악으로, 마치 대형 오케스트라 콘서트처럼 묶어 내는 식의 놀라운 디자인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건 마치 영화 (1994)에서 베토벤(게리 올드만)이 폭풍우가 치는 오솔길을 마부가 무섭게 말을 채찍질하며 달려가는 모습과 소리만으로 ‘운명’을 작곡한 것처럼 감독 이명세와 음악감독 조성우는 이번 다큐멘터리를 하나의 거대한 오케스트라 연주회처럼 기획하고 연출했으며 중간중간의 스코어들을 만들어 냈다. 영화는 언뜻 보기에 음악이 다 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스코어들 하나하나를 배치하고, 잘라내고, 증폭시키는 것은 연출의 몫이었던 만큼 설계자로서의 감독 이명세는 말 그대로 제1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국회에 헬기가 착륙하는 장면을 5.18 광주 학살 때 전일빌딩 앞에 헬기가 접근하는 푸티지와 오버랩하고, 12월 3일의 특공대가 국회에 진입할 때와 1980년 5월 금남로와 충장로 등 광주 거리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을 구타하는 장면을 교차 편집할 때 말로의 노래 을 선곡한 것은 신의 한 수 격 편집과 음악의 배치였다. 이명세 감독의 연출은 이 한 장면만으로도 어린 관객들, 정치 저 관여층의 머릿속에 12.3 친위 쿠데타가 얼마나 위험하고 공포스러운 사건이었는가를 각인시킬 것이다.
쿠데타 폭로 위한 과한 색채감, 역모 기록 위한 연출
그런 측면에서 은 확실하고도 자극적인 프로파간다 영화이다. 프로파간다라는 측면에서 혹자는 이 작품에 평가를 유보하는 경향을 보일 수도 있겠으나 정작 감독 이명세는 그런 논란 따위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태도였을 것이다. 다큐는 종종 확실한 자기 선택, 선명한 주장을 내세워야 한다. 12.3 쿠데타에 관한 한 이견은 존재할 수 없다. 이명세의 이번 다큐가 다소 과한 색채감을 가지고 있고 뤼미에르의 이 아닌 조르주 멜리에스의 을 추구하는 작품이라 한들, 정당한 역사관에서 벗어나 있지 않은 한, 다큐가 경계해야 할 지나친 표현주의 기법을 썼다고 나무랄 필요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오프닝 타이틀에는 작은 글씨로 ‘AI로 제작된 장면이 일부 들어있다’라고 쓰여있다. AI는 다큐멘터리가 결합해서는 안 되는 기술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AI는 애니메이션 수준이다. 다만 민주당 서영교 의원이 단전 단수 문제로 불안해하면서 국회 직원과 대화하는 모습, 그때 서영교의 표정을 꼭 AI로 재현해야 했을까는 다소 의문으로 남는다. AI보다 의도적 연출이 들어간 경우는 상당 부분 인서트 숏에서 발견할 수 있었는데 국회의장실 여성 정무비서관이 국회 전체에 불을 켜고 다니는 씬은 실제 영상을 반복해서 편집한 연출이고 비상계엄 해제 발의안을 갖고 의안과로, 7층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더불어민주당 남성 당직자의 모습은 연출해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샅샅이 찾아보면 이 영화에는 교묘한 연출 장면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감독 이명세 역시 교묘한 연출가이다.
‘좀 피곤하다’ 보다 ‘나쁘지 않다’에 방점 찍을 만한 새로운 형식
은 다큐멘터리라기보다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만든 극영화에 가까운 작품이다. 어쩌면 그 구분 자체가 무색한 새로운 형식과 장르의 영화이다. 상업 극영화의 짜릿함과 재미가 ‘무뚝뚝한(?)’ 다큐멘터리와 결합하면 어떤 하이브리드, 어떤 이종(異種)의 영화가 나올 수 있는가를 이명세 감독이 최초 격으로 선보인 작품이 바로 이 이다. 어떤 형식이든 이제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영화가 사람들에게 사실과 진실을 알리는 일을 해내야 할 때, 요즘 같은 세태에 정통적이고 전통적인 기법의 제작방식을 고수한다 한들 효능감이 그리 높지 않을 것이다.
평소 영화 보기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어떤 주부가 우연찮게 가족들을 다 끌고 을 본 모양이다. 영화를 다 본 후 그녀의 한 줄 평이 기막히다. 나쁘지 않은데 좀 피곤해요.” 화면 전환이 너무 빠르고 커트가 너무 잘게 잘려져 있기 때문이다. 보통 뉴스는 한 컷당 4초 정도이다. 다큐의 한 컷 길이는 더 길다. 이명세의 이번 다큐는 컷 감각이 거의 1초 단위이다. ‘피곤하다’는 반응은 그래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보다는 이런 영화, 이런 다큐는 처음 경험해 봤음을 고백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저 한 줄 평에는 ‘나쁘지 않다’에 방점이 찍혀져 있다. ‘나쁘지 않다’는 곧 지루하지 않다는 말이며 정치적으로 왜곡돼 있지 않은데다 아이들에게 선뜻 보여 줄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정작 아이들, 젊은 세대들은 저 엄마와 달리 피곤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쁘지 않은데 좀 피곤해요, 는 새롭고 실험적인 영화가 관객을 많이 모을 때 나오는 1차 반응들이다. 의, 비교적 빅 흥행이 예상되는 이유이다. 이명세 감독의 귀환을 축하하는 바이다. 은 지난 4월 22일 개봉했으며 현재 전국 스크린 수(650개~750개)를 개봉 초기의 수대로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