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로그인   회원가입   초대장  
페이지투미   페이지투미 플러스
페이지투미 홈   서비스 소개   아카이브   이야기   이용 안내
페이지투미는 사회혁신 분야의 새로운 정보를 모아 일주일에 3번, 메일로 발송해드립니다.

link 세부 정보

정보 바로가기 : 난쟁이 기사와 거짓말쟁이 사제를 낳은 오크햄 마을

난쟁이 기사와 거짓말쟁이 사제를 낳은 오크햄 마을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영국 한복판에, 인구 1만 2000 명 남짓한 조그마한 마을이 있다. 잉글랜드에서 가장 작은 군(county)인 러틀랜드(Rutland)의 고을 소재지, 오크햄(Oakham)이다. 지도에서 찾으려면 돋보기가 필요할 정도다. 그런데 바로 이 보잘것 없어 보이는 마을에서, 영국 역사를 뒤흔든 가장 기묘하고 드라마틱한 두 인물이 태어났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기사(騎士)와 역사상 가장 뻔뻔한 거짓말쟁이가 같은 마을 출신이라는 사실, 이게 오크햄이다.   1839년에 지어진 오크햄의 빅토리아 홀은 지역 사회 행사장이자 공공 회관으로 사용된다.(위키피디아) 천 년이 넘는 뿌리, 오크햄의 역사 오크햄에는 색슨 시대부터 왕실 영지가 있었고,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에도 행정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이어갔다. 1180년에는 노르만 귀족 워클린 드 페레르스(Walkelin de Ferrers)가 지금의 장터를 끼고 있는 오래된 영주 저택을 요새화하면서 오크햄 성(城)이라 이름을 붙였다. 건축 역사가 니콜라우스 페브스너는 이 건물은 온전하게 보존된 영국 성(城)의 홀(hall)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며, 엄밀한 의미의 성이 아니라 요새화된 영주 저택에 속했다는 점에서 이중으로 흥미롭다 고 평했다. 쉽게 말하자면, 성이라고 하기엔 좀 작고 그냥 집이라 하기엔 좀 거창한,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건물이다.   오크햄 성(위키피디아) 이 성의 가장 유명한 명물은 바로 의식용 편자(horseshoe) 소장품이다. 중세 후기 이래, 귀족이나 왕족이 처음 오크햄을 방문할 때는 반드시 편자를 영주에게 바쳐야 하는 전통이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편자는 1470년 에드워드 4세가 부근의 로즈코트 들판 전투(Battle of Losecoat Field) 승리를 기념하며 바친 것이다. 현재 성 안에는 230개가 넘는 화려한 의식용 편자가 전시되어 있다. 이 전통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이 관습은 페레르스(Ferrers) 가문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문의 이름 자체가 프랑스어로 편자를 박는 장인 (farrier)을 뜻하는 단어에서 왔으며, 가문의 문장(紋章)도 편자를 사용하고 있다. 한국 시각으로 해석해보자. 귀족이 마을을 처음 방문할 때마다 뭔가를 내놓아야 한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구조 아닌가? 우리나라에서도 권력자가 지역구를 처음 방문할 때 선물 공세가 오가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다만 오크햄은 그 선물을 공개적으로 전시하며 누가 언제 왔는지 기록을 남겼다. 투명성이라는 면에서는 오히려 훌륭한 선례다.   오크햄 성안의 의식용 편자.(위키피디아) 파이 속에서 나온 기사, 제프리 허드슨 제프리 허드슨(Jeffrey Hudson, 1619~1682)은 영국 왕비 헨리에타 마리아(Henrietta Maria of France, 1609~1669)를 모신 궁정 난쟁이(court dwarf)였다. 오크햄에서 태어난 그는 왕비의 난쟁이 이자 최소 경(Lord Minimus)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당대의 경이로운 존재로 여겨졌다. 그의 아버지 존 허드슨은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George Villiers, Duke of Buckingham)를 위해 황소를 키우고 관리하는 일을 했다. 부모와 형제자매 모두 보통 키였으나 제프리만 극단적으로 작은 키를 갖고 태어났다. 여덟 살 무렵에도 키가 약 45센티미터에 불과했다. 제프리 허드슨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버킹엄 공작 부인이 주최한 만찬 중에 커다란 파이 속에서 튀어나오는 공연을 펼친 후 왕비 헨리에타 마리아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다. 파이 속에서 나온 기사, 이보다 더 극적인 데뷔가 있을까. 그러나 그의 삶은 단순히 왕실의 장식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영국 내전에서 왕당파 편에 서서 싸웠고, 왕비를 따라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결투에서 상대방을 죽인 후 왕비의 궁정에서 쫓겨났다. 이후 바르바리 해적에게 붙잡혀 25년간 북아프리카에서 노예 생활을 했다. 1680년 석방될 때까지 런던 게이트하우스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약 1682년에 이름도 없는 가톨릭 빈민묘지에 묻혔다. 1681년 찰스 2세가 연금을 지급한 기록이 마지막 생존 증거다. 이 파란만장한 삶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까. 허드슨은 신체적 조건 때문에 평생 눈요깃거리 취급을 받았지만, 실제로 말을 타고 싸웠고, 결투를 했으며, 외교 임무를 수행했다. 작다 는 것이 약하다 는 뜻은 아니었다. 오크햄의 라틴어 구호 역시 작은 것 안에 많은 것이 있다 (Multum in Parvo)다. 크기로 사람을 재단하는 우리 사회, 대기업 출신이냐 지방대냐, 수도권이냐 지방이냐 따지는 일을 겨냥해 허드슨의 삶이 조용히 일갈한다.   안토니 반 다이크의 작품, 《헨리에타 마리아 왕비와 제프리 허드슨 경》(1633년).(위키피디아) 오크햄의 제프리 허드슨 오두막에 있는 명판, 영국에서 가장 작은 군의 가장 작은 사람 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거짓말로 35명을 죽인 사나이, 타이터스 오츠 타이터스 오츠(Titus Oates, 1649 ~1705)는 이른바 교황도당 음모(Popish Plot) 를 조작한 잉글랜드 사제다. 그 역시 오크햄 출신이다. 1678년, 오우츠는 예수회 사제들이 찰스 2세를 암살하고 그의 가톨릭 형제 요크공작을 왕좌에 앉히려 한다는 방대한 음모론을 꾸며냈다. 이 이야기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것 투성이였지만, 신교도 대학살이 임박했다는 공포가 런던을 뒤덮었고, 의회와 법원은 오츠의 증언을 신뢰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연속적인 체포와 재판을 진행했다. 3년에 걸쳐 런던은 위증에만 근거한 조작재판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츠의 주장은 가톨릭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며 반(反)가톨릭 휘그당을 강화시켰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그의 증언으로 35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 대부분은 무고한 가톨릭 사제들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다녔으나 지도교수가 이 학생은 대단한 바보였고, 빚만 지고, 돈이 없어 쫓겨났으며 끝내 학위를 받지 못했다 는 기록을 남겼을 정도였다. 그랬던 그가 나중에 나라를 뒤흔들었다. 학점이 나쁘다고 큰일을 못하는 건 아니라는 교훈, 다만 그 일이 반드시 좋은 일일 수는 없다. 결말은 어떻게 됐을까. 제임스 2세 즉위 후 오츠는 재판을 받아 위증죄로 종신형에 처해졌으며, 성직자 복장을 벗기고 런던 거리를 끌려 다니며 채찍질을 당하는 형벌을 선고받았다. 그가 쓰고 다닌 모자에는 두 건의 위증죄로 완전한 증거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은 타이터스 오츠 라고 쓰여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1688년 명예혁명 후 풀려나 여생을 누리다 1705년에 세상을 떠났다. 타이터스 오츠의 이름이 귀에 익은가? 거짓정보로 여론을 조작하고, 법정에서 위증하며,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이야기, 3백년 전 영국이야기인데, 어쩐지 오늘 우리 뉴스 화면이 스쳐 지나간다. 가짜뉴스의 역사는 SNS보다 훨씬 길다는 것, 오츠가 몸소 증명했다. 타이터스 오우츠.(위키피디아) 5개의 구멍이 뚫린 족쇄(stocks)와 다른 명소들 오크햄 학교는 1584년 로버트 존슨 주교가 설립했으며, 그가 업핑햄 학교(Uppingham School)도 함께 창설했다. 버터 십자가(Butter Cross)는 적어도 1611년 이전부터 존재했다. 원래 오크햄 마을 장터의 중심지로 지어진 버터 십자가는 농부와 마을 사람들이 버터, 우유, 계란과 같은 유제품을 팔기 위해 모이는 공간이었다. 버터 십자가 라는 이름은 이러한 특정 거래를 반영한다. 버터 십자가는 흥미롭게도 구멍이 다섯 개 뚫린 족쇄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형틀은 적어도 500년 동안 욕설이나 음주와 같은 경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처벌하고 망신을 주기 위해 사용되었다. 두 명의 남자 발이 네 개의 족쇄 구멍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다섯 번째 구멍은 아이나 여성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용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왜 정확하게 다섯 구멍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혹자는 다리가 두 개 반인 범죄자를 위한 것이라 농담하지만, 오크햄 사람들은 그냥 웃고 넘긴다. 500년이 지나도 웃음거리가 되는 유물, 이런 게 진짜 문화재 아닐까.   오크햄 버터 십자가(Butter Cross)는 적어도 1611년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흥미롭게도 구멍이 다섯 개 뚫린 족쇄를 갖추고 있다.(위키피디아) 오크햄 버터 십자가. 뒤 왼쪽 건물이 오크햄 학교.(위키피디아) 2024년 4월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사후 동상이 오크햄 도서관 정원에서 제막되었다. 세계 최초다. 높이 2.1미터에 받침대 주변으로 청동 개 코기(Corgi) 세 마리가 함께 조각되어 있다.   2024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사후 동상이 오크햄 도서관 정원에서 제막되었다. 동상 받침대 주변으로 청동 개 코기(Corgi) 세 마리가 함께 조각되어 있다.(위키피디아) 오크햄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첫째, 작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존심이다. 러틀랜드 오크햄 사람들은 자신들이 영국에서 가장 작은 군에 산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1970년대에 행정통합으로 러틀랜드를 없애려 하자 가짜 전함을 트럭에 싣고 레스터셔 주 의회 청사 앞까지 끌고 가 폭죽을 쏘는 항의시위를 벌였다. 지방소멸을 걱정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다 는 것은 지울 이유가 아니라 지킬 이유다. 둘째, 역사속 창피한 인물도 지우지 않고 기록하는 용기다. 오크햄은 허드슨의 오두막에 표지판을 달고, 오우츠의 이름도 역사기록에 당당히 남겼다. 우리가 친일행적을 지우고, 불편한 역사를 교과서에서 덜어내려 할 때, 오크햄은 우리마을 출신 중에 영국 역사상 가장 악질적인 인물도 있었다 고 담담하게 말한다. 부끄러운 역사를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는 첫걸음이다. 셋째, 전통과 유머를 함께 품는 능력이다. 편자를 바쳐야 하는 귀족의 의무, 다섯 구멍의 족쇄, 파이 속에서 나온 기사, 오크햄의 역사는 진지함과 우스꽝스러움을 동시에 껴안는다. 권위를 세우면서도 스스로를 놀릴 줄 아는 사회, 그것이 수백 년을 버티는 힘 아닐까. 오크햄의 이야기는 가장 국지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이며, 가장 작은 것이 가장 거대할 수 있다 는 사실을 웅변한다. 우리 동네가, 혹은 우리 자신의 삶이 초라해 보일 때 작은 것 안에 많은 것이 있다 는 오크햄의 슬로건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신의 작은 일상 안에도 세상을 뒤흔들 수 있는 거대한 서사가 이미 숨어 있을지 모른다. 작지만 많은 것을 품은 오크햄처럼 말이다.   오크햄 성의 대연회장과 그 너머로 보이는 올 세인츠 교회의 첨탑.(위키피디아) 오크햄의 올 세인츠 교회.(위키피디아)


최근 3주간 링크를 확인한 사용자 수

검색 키워드


주소 : (12096) 경기도 남양주시 순화궁로 418 현대그리너리캠퍼스 B-02-19호
전화: +82-70-8692-0392
Email: help@treeple.net

© 2016~2026. TreepleN Co.,Ltd. All Right Reserved. / System Updated

회사소개 / 서비스소개 / 문의하기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