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스튜어드십 코드, 이제 ‘좋은 말’에서 ‘작동하는 규칙’으로 가야 한다 [칼럼] 한국 스튜어드십 코드 개정안이 마침내 공개됐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말 그대로 기관투자자가 국민과 고객 등 타인의 자산을 맡아 운용하는 수탁자로서 마땅히 이행해야 할 책임을 정한 원칙이다. 국민연금, 공제회, 보험사, 자산운용사 같은 대형 기관투자자는 단순히 주식을 사고파는 단기 보유자가 아니다. 이들은 자본시장 전체의 시스템 위험을 관리하고 경제 전반의 지속가능성을 뒷받침해야 하는, 이른바 ‘보편적 소유자(Universal Owner)’이자 거대한 자본의 관리자다.
이런 점에서 이번 개정안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기존 스튜어드십 코드가 주로 주주총회에서의 의결권 행사와 기술적인 대응 중심에 머물렀다면, 이번 개정안은 수탁자 책임의 지평을 대폭 넓혔다. 기업의 경영전략, 재무 성과, 지배구조뿐 아니라 ESG(환경·사회·지배구조)를 비롯한 지속가능성 요소를 기관투자자가 상시 점검해야 할 핵심 경영사항으로 명시했다. 나아가 주주제안, 소송 참여, 관여(Engagement)활동의 결과에 따라 투자의 확대, 유지, 축소, 배제, 그리고 철회까지 실행할 수 있도록 수탁자 책임 활동의 범위를 구체화했다.
이는 우리 자본시장이 나아가야 할 지극히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보인다. 기후위기로 인한 자산 가치 하락, 공급망 인권 리스크, 산업안전 사고, 생물다양성 훼손 등은 이제 단순한 평판이나 윤리의 문제를 넘어 기업의 존속을 흔드는 본질적인 재무적 위험이 되었다. 특히 글로벌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나 공급망 실사법(CSDDD) 등 환경(E) 관련 규제가 목전의 현실로 다가온 지금, 어떤 기업이 탄소집약적 구조에 갇혀 있는지, 이사회가 장기 기후 리스크를 감독할 역량이 있는지는 장기투자자의 수익률을 좌우하는 핵심적인 판단 요소다. ESG를 수탁자 책임의 본문 안으로 끌어들인 것은 시대적 변화에 대한 최소한의 응답이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관여활동의 결과를 실제 투자 의사결정에 반영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둔 점이다. 그동안 한국의 책임투자와 ESG는 지나치게 ‘좋은 말’의 성찬에 머물렀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웠다. 화려한 선언문과 보고서는 넘쳐났지만, 실제 자산배분, 포트폴리오 비중 조정, 위탁운용사 평가 과정에서 ESG 점검 결과가 얼마나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는지는 불분명했다. 기업과 수없이 대화했음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고 중대한 위험이 반복되는데 자산 배분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그것은 스튜어드십이 아니라 의례적인 행정 관리에 불과하다. 대화의 결과가 실질적인 투자 판단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책임투자는 완성된다.
그런 점에서 이번 개정안에 몇 가지 보완할 점이 보인다. 우선, 반영할 수 있다”는 선의에 기댄 권고 성격의 문구만으로는 오랜 시장 관행을 바꾸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아니라, ‘어떤 리스크가 발생했을 때, 어떤 단계를 거쳐 투자를 축소하거나 배제(divestment)할 것인가’에 대한 예측 가능한 기준이 제시돼야 한다. 기관투자자는 관여활동의 타임라인과 단계별 대응 기준을 시장에 명확히 공개해야 한다. 그래야 기업도 수탁자의 경고를 실질적인 재무 위험으로 인식해 대화에 진지하게 임할 것이고, 수익자 역시 자신의 자산이 어떤 원칙에 따라 운용되는지 신뢰할 수 있다.
자산군을 국내 상장주식에서 채권, 인프라, 부동산, 비상장주식, 해외자산까지 확대한 조치 역시 자본의 흐름을 반영한 현실적인 변화다. 오늘날 대형 기관투자자의 영향력은 주식시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채권자는 기업의 자금조달 비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인프라 투자자는 국가 에너지 시스템의 장기 방향을 좌우한다. 부동산 투자자는 건물의 에너지 효율과 탄소배출 위험을 관리해야 하며, 비상장 자산 투자자는 지배구조와 사업전략에 훨씬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다. 스튜어드십의 문법은 자본이 흘러 들어가는 모든 영토로 확장되어야 마땅하다.
다만 이러한 자산군 확장이 단순한 선언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자산별 특성에 맞는 정교한 보충지침이 뒤따라야 한다. 주식 중심의 주주활동 논리를 채권이나 대체투자에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동산 투자에서는 기후변화로 가치가 급락하는 ‘좌초자산(Stranded Asset) 위험’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채권 투자에서는 발행 조건이나 금리 프리미엄에 ESG 요소를 어떻게 연계할 것인지에 대한 실질적인 가이드라인이 조속히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던 한국적 토양에서 ‘협력적 관여활동’을 명시한 점도 긍정적이다. 그동안 국내 기관투자자들은 법적 불확실성과 공동보유 논란, 기업과의 관계 악화 우려로 인해 공동 행동을 극도로 꺼려왔다. 그러나 기후위기나 고질적인 지배구조 실패처럼 거대한 시스템 리스크는 개별 투자자 하나의 힘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 해외 주요 연기금과 자산운용사들이 공동 서한과 공동 대화를 통해 기업의 체질 변화를 압박하듯, 우리 시장도 함께 질문하고 함께 책임지는 관행이 안착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 감독당국은 기관투자자들이 과도한 법적 불안감 때문에 침묵하지 않도록 구체적인 법적 세이프하버(Safe Harbor·면책 규정)를 제공해야 한다. 자본시장법상의 공동보유 공시의무 나 경영권 관여 논란 에 대해 어느 선까지가 정당한 수탁자 책임 활동인지 에 대한 명확한 지침이 없다면, 협력적 관여라는 좋은 제도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보고와 점검 체계의 실효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매년 수탁자 책임 활동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한 제도가 단순한 정기적 행정 절차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법적 강제력이 없는 연성 규범(Soft Law)인 만큼, ‘공개와 평판’이 핵심적인 작동 원리다. 시장은 어느 기관이 충실하게 이행했는지, 어느 곳이 형식적인 보고에 그쳤는지 비교 가능하게 알아야 한다. 단순 나열식 보고를 넘어 시장 참여자들이 직접적으로 이행 수준을 비교할 수 있는 평가와 공시 구조가 만들어져야 시장 규율이 작동한다.
불투명한 지배구조와 낮은 주주 보호, 그리고 기후 리스크 방치는 오랫동안 한국 자본시장의 발목을 잡아온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핵심 원인이었다. 이번 스튜어드십 코드 개정안은 이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자본시장의 체질을 바꿀 수 있는 훌륭한 나침반을 제안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나침반을 들고 실제로 항해를 시작하는 일이다. 지금 한국 자본시장에 필요한 것은 서랍 속에 넣어둘 또 하나의 세련된 선언문이 아니다. 투자 판단을 바꾸는 작동하는 규칙, 투명하게 공개되는 수탁자의 책임, 그리고 리스크 앞에서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 책임 있는 자본의 행동이다.
이번 스튜어드십 코드 개정이 한국 자본시장 발전의 기폭제가 되기 바란다.
☞ 양춘승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상임이사
양춘승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상임이사는 국내 ESG 전문가로 꼽힌다. 양춘승 상임이사는 서울대 경제학 학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에너지정책학 석박사 출신으로 2007년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설립을 주도했고 현재까지 상임이사를 맡고 있으며, 국민연금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한 바 있다. 양춘승 이사는 2008년에 국내 최초로 글로벌 금융기관 주도의 기후 관련 정보공개프로젝트인 CDP를 국내에 도입해 운영 중이다. 이후 RE100, EV100(전기차 전환 캠페인), PCAF(탄소회계 금융협의체), SBTi 등 국제적인 이니셔티브를 도입하며 우리나라 금융과 기업의 지속가능성 경쟁력 제고에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