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으로 게슈타포 장교들 승복시킨 루퍼스 존스 [뉴스] 1938년 12월, 베를린. 나치의 비밀경찰 본부인 게슈타포 청사 안에 세 명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일흔다섯 살의 미국 철학자였다. 담당 장교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세 노인은 고개를 숙이고 침묵기도를 시작했다. 독재권력의 심장부 한복판에서 말이다. 장교들이 돌아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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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노인은 그제야 자신들이 침묵을 지킨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깨달았다고 한다.
이 노인의 이름은 루퍼스 존스(Rufus Matthew Jones, 1863~1948). 미국 메인주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퀘이커 신앙공동체 안에서 자란 철학자이자 신학자, 사회운동가였다. 그의 삶은 조용했지만 그가 남긴 파문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다.
루퍼스 존스(위키피디아)
퀘이커라는 이상한 사람들
먼저 배경설명이 필요하다. 퀘이커는 17세기 영국에서 조지 폭스(1624~1691)가 시작한 그리스도교 계열 신앙모임으로, 친우회 (Friends)라고도 불린다. 교회 건물도 없고, 성직자도 없고, 정해진 예식도 없다. 그냥 모여서 침묵하다가 영(靈)이 움직이면 말하는 방식이다. 처음 보는 사람은 당혹스럽겠지만, 이들의 핵심원리는 단순하다.
모든 사람 안에 신성한 빛이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함부로 죽이거나, 가두거나, 굶겨서는 안 된다.
존스는 이 전통을 학문적으로 정리하고 대중에게 알린 사람이다. 하버드대에서 공부하고 하버포드(Haverford) 대학에서 40년 넘게 철학과 심리학을 가르쳤다. 저서만 56권. 평론과 글을 합치면 셀 수도 없다. 그런데 그가 유명해진 이유는 책보다는 행동 때문이었다.
루퍼스 존슨(www.quakersintheworld.org)
전쟁터에서 총 대신 빵을 든 사람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에 참전했다. 퀘이커는 전통적으로 전쟁에 나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거부한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 다. 당시 미국정부는 이들을 겁쟁이나 반역자로 볼 수도 있었다. 존스는 다른 길을 찾았다. 전쟁터에서 총을 들지 않는 대신, 부상자를 돌보고 피난민을 먹이고 전쟁고아를 살피는 일을 하겠다는 제안을 정부에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미국 친우봉사단(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봉사단)이다. 1917년 설립, 존스가 초대 의장. 제1차 세계대전 후 패전국 독일에서는 수백만 명의 어린이가 굶주렸다.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1874~1964)가 요청했고, 봉사단은 독일 어린이 급식사업(Quäkerspeisung)을 시작했다. 전성기인 1920~1924년에는 하루 최대 120만 명의 아이에게 밥을 먹였다. 적군의 아이들에게.
이 장면을 잠시 상상해보자. 엊그제까지 서로 총을 겨누던 나라의 어린이에게, 전쟁에서 진 나라의 배고픈 아이들에게, 밥을 퍼주는 사람들.
저 사람들은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독일 사람들도 처음엔 의심했을 것이다. 그 왜 의 대답이 바로 존스의 철학이었다.
1928년의 허버트 후버(위키피디아)
게슈타포 앞에서 침묵한 노인
그리고 1938년으로 돌아온다. 11월 9일 밤, 수정의 밤 (Kristallnacht)이라 불리는 유대인 학살 소동이 벌어졌다. 유대인 가게 수천 곳의 유리창이 깨지고, 회당(synagogue)이 불탔으며, 3만 5천 명이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다. 존스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봉사단 이사회를 열고 결정했다. 직접 가자.
당시 그의 나이 일흔다섯. 대서양을 건너 베를린에 도착했다. 그런데 배가 미국 항구를 떠나기도 전에 필라델피아의 한 신문이 이 방문 계획을 폭로해버렸다. 나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 1897~1945)는 신문에 비웃는 글을 썼다.
저 세 명의 동방 박사님들을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으로 기대하지 마시오.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아무리 존경받는 종파라 해도.
1933년의 요제프 괴벨스(위키피디아)
괴벨스가 웃었다. 그런데 결국 누가 웃었을까?
게슈타포 장교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존스 일행은 침묵기도를 드렸다. 장교들이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요청이 승인되었습니다.
전쟁 후 존스가 회고했다.
우리에게 한 약속은 지켜졌고, 문이 열려 수많은 유대인이 독일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루퍼스 존스(American Quaker theologian - A Man In A Suit And Glasses – HEBSTREIT)
노벨평화상, 그리고 말년의 조용한 위엄
1947년, 봉사단과 영국퀘이커 단체는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에 걸쳐 수백만 명을 먹이고 전쟁피해자를 도운 공로였다. 노벨위원회는 이들을 인류의 형제애를 구체적으로 실천한 사람들 이라 불렀다. 존스는 이듬해 6월 16일, 85세에 하버포드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까지 글을 쓰고, 강의를 하고, 사람들을 만났다.
56권의 책 중 어떤 것도 베스트셀러가 되지는 않았다. 유명한 명언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가 세운 봉사단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활동 중이다.
루퍼스 존스(Quaker theologian, pacifist, educator | Britannica)
한국에서 이 이야기를 읽는 이유
자, 이제 이야기를 조금 가까이 당겨보자.
존스의 삶에서 우리가 건져낼 것은 무엇인가. 첫째, 그는 권력의 논리가 아닌 사람의 논리로 일했다. 적의 아이도 배가 고프다 는 것. 둘째, 그는 말이 아니라 몸으로 갔다. 일흔다섯 살에 나치 본부까지 찾아간 사람이 이것은 좋지 않다 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데 그쳤을까? 셋째, 가장 중요하게, 그는 침묵의 용기를 알았다. 게슈타포 앞에서 침묵한 것은 겁이 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사회를 보자.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만 명의 이주노동자가 열악한 조건에서 일한다. 나이 든 노숙인들이 지하도에서 겨울을 난다. 탈북주민들은 두 개의 사회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그게 무슨 소용이냐 고 묻는다. 존스의 대답은 간단하다. 해보면 안다.
또 하나. 존스는 신앙과 사회운동을 분리하지 않았다. 그는 신비주의자였지만 탁상공론을 하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의 종교단체들 중 일부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쌓으면서 내세를 준비하라 고 외친다. 존스라면 뭐라고 했을까. 그의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신은 지금 여기 사람들 안에 있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그 사람들을 도우면 된다.
마지막으로, 존스가 퀘이커 내부의 두 분파를 통합하려 평생 노력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19세기 중반 미국 퀘이커는 진리에 대한 해석 차이로 크게 갈라졌다. 존스는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기보다 서로 함께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봉사단 창설이 바로 그 첫 협업이었다. 지금 한국의 진보진영이 새겨들을 만한 대목이다.
같이 밥 먹을 수 있으면, 같이 일도 할 수 있다.
루퍼스 존스(왼쪽)와 클래런스 피케토프(Rufus Jones and Clarence Pickettof th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AFSC) | Holocaust Encyclopedia)
사랑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아라
괴벨스는 존스 일행을 동방 박사 셋 이라며 비웃었다. 그런데 동방 박사는 어떤 사람들인가.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별 하나 보고 떠나는 사람들 아닌가. 비웃음이 오히려 칭찬이 됐다.
루퍼스 존스는 총 한 번 들지 않고, 권좌에 앉지도 않고, 제복을 입지도 않았다. 그러나 두 번의 세계대전을 가로질러 수백만 명을 먹였고, 독재의 한복판에서 조용히 기도했으며, 죽기 전날까지 글을 썼다.
사랑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아라 (To see what love can do)
봉사단의 초기 표어였다고 한다.
그 표어는 지금 대한민국의 어디쯤에서 살아 있을까?
루퍼스 존스(Quakers – Page 5 – Special Collections & University Archives)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