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에 도청 장치 폭로해 닉슨 하야 이끈 버터필드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알렉산더 P. 버터필드가 1973년 7월 16일(현지시간) 미국 상원 워터게이트 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결정적인 증언을 하고 있다. 1973. 7. 16 AP 자료사진 연합뉴스
리처드 M.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 등 곳곳에 몰래 녹음 장치를 숨겨놓은 사실을 의회에서 증언해 그가 하야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알렉산더 P. 버터필드가 지난 9일(현지시간) 99세로 세상을 등졌다고 워터게이트 특종 보도를 했던 일간 워싱턴 포스트(WP)가 전했다. 고인은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라호야에 있는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구체적인 사망 원인을 밝히지 않은 부인 킴 버터필드가 WP와 뉴욕 타임스(NYT) 등에 확인해줬다.
고인과 함께 닉슨의 워터게이트 은폐 혐의를 세상에 알리는 데 한몫을 한 존 딘 전 법률고문도 사망 사실을 AP 통신에 확인했다. 딘은 고인이 비밀을 지키기로 맹세한 무언가를 밝힐 무거운 책임이 있었다.그는 일어나서 진실을 말했다 고 돌아봤다.
워터게이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정치 스캔들 중 하나였다. 그 사건 이후 ~ 게이트 란 식으로 정치 스캔들을 표현하는 것이 자리잡았다. 또 미국 역사에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지 못한 채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난 것도 닉슨이 유일했다.
이 대목에서 당시 타임라인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반 세기 전의 일이라 사람들 기억이 흐려졌는데, 민주당전국위원회(DNC) 사무실이 설치된 건물에 3류 도둑들 (정부 고위직들이 그렇게 표현했다)이 불법 침입한 것으로 시작해 최고 권력자가 하야할 때까지 거의 2년 2개월이 걸렸다. 흔히들 밥 우드워드 WP 기자의 특종 보도 때문에 닉슨이 사임한 것으로 혼동하는데, 그보다 버터필드의 폭로가 더 직접적이었다. 그 기간 엎치락 뒤치락이 상당했다.
1972년 6월 17일 워터게이트 빌딩 침입 혐의로 5명 체포
6월 19일 워싱턴 포스트, 첫 특종 보도
6월 20일 닉슨 대통령과 해리 로빈스 밥 홀더먼 비서실장 워터게이트 대책 논의(도청 시스템에 의해 녹음됨)
1973년 1월 11~30일 백악관 보좌관 2명 등 7명 유죄 판결
6월 25~28일 존 딘 법률고문이 상원 청문회서 백악관의 모든 대화 도청된 듯 증언
7월 14~16일 버터필드가 상원 청문회서 백악관 도청장치 증언
7월 24일 대법원, 닉슨 대통령에게 녹음 테이프와 서류 제출하라고 판결
10월 20일 닉슨 지시로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 해임
1974년 7월 27~30일 하원 사법위원회, 대통령 탄핵 결의안 가결
8월 9일 닉슨 하야 발표
당시 백악관 부비서실장이었던 버터필드는 닉슨의 비밀 녹음 시스템에 관한 충격적인 증언으로 워터게이트 수사에 결정적 방아쇠가 됐다. 그는 1973년 7월 13일 상원 워터게이트 위원회 직원들 앞에 소환돼 닉슨 대통령이 도청 시도를 했는지, 이를 은폐하려 했는지 질문을 받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고 운을 뗐고, 사흘 뒤 충격적인 내용을 털어놓았다.
1972년 6월 17일 닉슨 재선 캠프 요원들이 워싱턴 DC의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DNC를 도청하려던 시도가 사건의 본질이 아니라 대통령이 자신의 사무실 대화를 비밀리에 도청하게 했는데 거기에 사건을 은폐하라는 지시가 담겨 있음이 핵심임을 증언했다. 닉슨 대통령이 이 사건 은폐를 위해 미 연방수사국(FBI)의 수사를 방해하라고 중앙정보국(CIA)에 지시하는 대화 내용이 기록된 테이프가 존재한다고 폭로했다.
당시 연방항공국(FAA) 국장이었던 버터필드는 대통령에 대한 충성을 주장하면서도 거짓 증언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닉슨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1971년 2월부터 1973년 7월까지 백악관과 옛 행정부 청사(Executive Office Building) 등 여러 장소에 음성 인식 녹음 시스템을 설치하는 일을 감독했다고 털어놓았다.
버터필드는 수백만 미국인들이 텔레비전 생중계로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털어놓았다. 상원 위원회 소수당(민주당) 법률고문이자 테네시 출신으로 나중에 공화당 상원의원이 되는 프레드 톰슨은 대통령 오벌 오피스에 도청 장치가 설치된 사실을 알고 있느냐 고 물었다. 증인 버터필드는 머뭇거리다 네. 도청 장치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라고 진술했다.
워터게이트 수사에서 버터필드만큼 중요한 인물은 드물었는데, 그가 백악관 녹음 테이프를 폭로한 것은 자신의 무죄 증명(exculpation)을 위하거나 고위 행정부 관리들에게 죄를 씌우기(incrimination) 위해서였는데, 결국 1974년 8월 9일 닉슨 사임으로 귀결했다.
40년 뒤 버터필드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처음 대중에게 폭로한 우드워드 기자에게 닉슨 대통령 임기에 있었던 부정한 행위들에 대해 훨씬 많은 폭로를 했다. 이 사건은 백악관에서 가져온 문서들로 공개된 적이 없다가 정보 공개로 많은 것을 알려줬다. 문서들 중 일부는 기밀이었고, 버터필드가 더러운 물 웅덩이 (cesspool)라고 표현한 행정부에 대한 회고는 우드워드의 저서 대통령의 마지막 사람들 (2015)의 주제가 됐다.
우드워드는 여러 문서 중 닉슨 대통령이 라오스와 북베트남에서 몇 년 간 공습을 해도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 (zilch, 제로 )고 인정하며 휘갈긴 손글씨 메모를 보도했다. 이는 닉슨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발언과 달리 이들 공습을 지시했음을 드러냈다.
닉슨 대통령 첫 임기 동안 버터필드는 행정 업무를 다재다능하게 관리하며 대통령의 일정을 관리하고, 오벌 오피스로 서류를 전달하며, 국빈 만찬을 기획하고 내각 비서관으로도 활동했다. WP는 한 때 닉슨의 시종 말고 버터필드가 대체로 대통령이 아침에 가장 먼저 보는 사람이자 종종 밤에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 이라고 보도했다. 닉슨의 문고리 권력 이었던 셈이다.
우드워드의 책 인터뷰를 통해 버터필드는 닉슨을 거북하며 쉽게 화를 내고 편집증적이었다고 회상했다. 한 번은 일부 직원들이 행정부 청사에 존 F. 케네디의 사진을 전시한 것을 보고 닉슨이 버터필드에게 다른 통수권자들 사진을 치우라고 명령했다. 버터필드는 그렇게 했고, EOB의 정화 라는 제목의 메모를 제출했다.
또 다른 사례에서 닉슨이 버터필드에게 지시했고, 버터필드도 동의했는데, 로버트 F. 케네디의 동생이자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인 에드워드 M. 케네디 상원의원(민주)이 배정한 비밀경호국(SS) 요원들 가운데 스파이를 심으라고 했다. 케네디는 잠재적인 대통령 후보였다.버터필드는 2015년 WP 인터뷰를 통해 나는 이제 학대하는 정부의 공범이 됐다 고 생각했던 것을 회상했다. 또한 녹음 시스템 설치를 감독하는 백악관 내부 보안도 담당했다.
알렉산더 버터필드가 미 연방항공국(FAA) 국장으로 일하던 모습. 날짜 미상 AP 자료사진 연합뉴스
1972년 닉슨이 재선된 후, 버터필드는 FAA 국장이 됐다. 이 직책은 그가 공군에서 20년 복무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제공된 것이기도 했다. 성실하고 유능하다고 널리 평가받았던 그는 워터게이트 수사관들이 백악관 녹음 시스템 가능성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대체로 주목받지 못했다.
버터필드는 녹음 장치에 대해 알고 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그는 조사관들이 간접적이거나 모호한 질문 을 했다면, 간접적이고 모호한 답변을 해도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고 말했다. 하지만 6만 4000 달러(침입자들의 보석금과 법률 비용을 대신 지불한 것)에 대한 의문, 명확하고 직접적으로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비슷한 방식으로 답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고 덧붙였다.
그는 우드워드와 번스타인: 워터게이트 그림자 속의 삶 의 저자 알리시아 C. 셰퍼드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면서 나는 거짓말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닉슨에게 얼마나 큰 비밀인지 알고 있었다 고 말했다.
버터필드는 상원 위원회에서 증언하며 닉슨이 후세를 위해, 닉슨 도서관이 기록하기 위해 이 시스템을 설치했다고 말했다. 그 뒤 하원 법사위원회에서 버터필드는 닉슨의 주장과 달리 대통령이 1972년 재선 캠페인에 깊이 관여했으며, 그 캠페인은 이른바 더러운 술수 로 얼마간 막혔다고 말했다.
몇 달 동안 닉슨은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를 포함한 수사관들과 대립했으며, 콕스는 테이프 공개를 요구했다. 1973년 10월, 엘리엇 L. 리처드슨 법무장관과 윌리엄 D. 러켈하우스 부법무장관은 콕스의 해임 요구를 따르지 않고 퇴임했다. 로버트 H. 보크 법무차관이 결국 굴복해 콕스를 해임하는 토요일 밤의 학살 로 알려진 사건이 일어났고, 닉슨 탄핵에 동의하는 여론이 높아져 의회는 닉슨 탄핵으로 똘똘 뭉치게 됐다.
1974년 여름, 대법원이 닉슨의 행정특권 주장을 기각하고 소환된 녹음본을 제출하라고 만장일치로 명령하면서 그도 결국 마음을 돌렸다. 이때 그 유명한 법언, 대통령도 법 위에 있지 않다 가 나왔다. 문제의 녹음 테이프에는 닉슨과 그의 비서실장이자 버터필드의 전 상사인 해롤드 로빈스 밥 홀더먼이 CIA를 이용해 워터게이트 침입 사건 수사를 돌리려는 계획을 논의한 결정적 증거 로 알려진 대화가 포함돼 있었다.
이 은폐에 대한 명백한 공모 증거로 닉슨은 며칠 뒤에 임기를 그만 뒀다. 백악관 밖에서는 일부 인사들이 버터필드를 영웅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행정부 내부 성소 (the inner sanctum)는 그가 잘못된 일을 했다 고 판단했다고 그는 NYT에 털어놓았다.
1975년 3월, 제럴드 포드 대통령 시절 버터필드는 FAA 국장에서 물러났다 . 곧이어 피플 매거진이 해고됐는지 묻자, 그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고 답했다.
잡지는 또 버터필드가 닉슨 사임 후 연락을 받았는지 물었다. 그의 답이다. 아니다. 그가 나를 누구보다 미워하는 게 확실하다.
알렉산더 버터필드가 2003년 2월 16일(현지시간) 보스턴의 존 F. 케네디 도서관 겸 박물관에서 대통령 테이프 컨퍼런스 도중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2003. 2. 16 AP 자료사진 연합뉴스
알렉산더 포터 버터필드는 1926년 4월 6일 플로리다주 펜사콜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해군 조종사로 그곳에 파견된 상태였다. 버터필드는 1948년 공군에 입대해 1956년 메릴랜드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1967년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베트남 전쟁 동안 그는 동남아시아에서 정찰 작전을 지휘했으며, 존슨 행정부에서 로버트 S. 맥나마라 국방장관의 보좌관으로 일했다. 그는 공로 훈장과 공로 비행 십자훈장 등을 받았고, 대령으로 승진했다. 1968년 닉슨 대통령 당선 후 오랜 지인인 홀더먼이 그를 백악관에 불러 들였다. 홀더먼은 워터게이트 관련해 형사 처벌을 받은 반면, 버터필드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버터필드는 닉슨 행정부 시절 이후 민간 부문에서 승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그는 1982년 WP에 어떤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내가 너무 논란이 많은 것 같다 면서 게다가 회사는 경영진이 뉴스에 나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건 예의에 어긋난 일 이라고 털어놓았다. 버터필드는 1990년대 중반 은퇴하기 전까지 항공, 금융, 컨설팅 회사의 임원으로 근무했다.
그는 샬롯 메리 매과이어와 처음 결혼했으나 1985년 이혼했다. 오랜 기간 그는 동화 작가 테오도어 수스 가이젤의 미망인 오드리 가이젤과 교제했다. 2021년에 결혼한 부인 킴, 두 딸 수잔 카터 홀콤과 엘리자베스 고든 부홀츠, 여덟 손주, 13명의 증손주를 유족으로 남겼다. 그의 아들 알렉산더 주니어는 지난해 먼저 세상을 등졌고, 다른 딸 레슬리는 1950년 유아일 때 숨졌다.
닉슨의 백악관 녹음 테이프는 지금까지 수천 시간 분량이 공개돼 역사가들과 대중을 매료시켜왔다. 버터필드는 1995년 영화 닉슨 을 연출한 올리버 스톤 감독에게 조언했으며, 백악관 직원 역으로 카메오 출연했다. 배우 앤서니 홉킨스가 고통에 힘겨워하는 닉슨 역을 맡았다.
그는 테이프의 존재를 폭로한 사람 으로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며, 대통령을 존중하고 싶다는 마음과 수사관들에게 솔직해야 할 필요성 사이에서 갈등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또한 내 뇌 깊은 곳에서 말하고 싶어 했다 고 털어놓았다.
닉슨 사임 당일, 버터필드는 우드워드 기자에게 백악관 이스트 룸에서 사람들이 우울해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다. 그 방에서 사람들이 울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슬펐다. 맞다. 하지만 정의는 승리했다. 속으로는 환호하고 있었다. 그게 내가 하던 일이다. 나는 환호하고 있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종 보도한 워싱턴 포스트 편집 간부들. 왼쪽부터 캐서린 그레이엄 발행인, 칼 번스타인과 밥 우드워드 기자, 하워드 사이먼스 편집국장, 벤 브래들리 편집인이 1973년 4월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WP 자료사진
여기서 잠깐,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이 흔들릴 때마다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익명의 남자 딥 스로트 (Deep Throat)의 정체는 30년 넘게 철저히 비밀에 붙여졌다. 그러다 사건 당시 FBI 부국장이었던 마크 펠트가 세상을 뜨기 3년 전인 2005년에 아들의 추궁을 받고 실토하며 정체가 드러났다.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이 맞다고 확인해 줬다.
재미있는 것은 사건 당시 우드워드로부터 그 존재에 대해 듣게 된 하워드 사이먼스 WP 편집국장이 당시 유행하던 포르노 영화 제목을 따와 코드네임으로 붙였다는 사실이다. 펠트도 꽤나 황당해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