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남 을 다시 민주주의로 초대하려면 [뉴스] 2026년 6월 3일 저녁, 선거가 끝나자 나에게 하나의 숫자가 먼저 도착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20대 남성의 약 75%가 보수 후보를 지지했다는 출구조사 수치였다. 선거는 늘 숫자로 말하지만, 어떤 숫자는 득표율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 숫자는 단순한 후보 지지율이 아니었다. 그것은 성별로 갈라진 세대의 표정이었고, 지방선거라는 생활정치의 장이 중앙정치의 젠더 균열에 의해 다시 포획되는 장면이었다. 숫자는 차갑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뜨겁다. 억울함, 상실감, 조롱, 경쟁 피로, 제도에 대한 냉소가 한데 눌려 있다. 문제는 이 숫자를 곧바로 판결문처럼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신호처럼 읽을 것인가 이다.
그러나 이 숫자는 이대남 극우화”라는 결론으로 너무 빨리 규정하면 안 된다. 75%는 강력한 정치적 신호이지만, 그것이 이십대 남성 전체의 본질은 아니다. 같은 이십대 남성 안에도 계급, 지역, 학력, 군복무 경험, 고용 상태, 주거 조건, 가족 배경, 온라인 체류 경험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선거의 숫자는 집단의 표면을 보여주지만, 삶의 내부를 자동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대남은 보수화되었다”는 문장은 때로는 설명을 중단시키는 이름표가 된다. 민주주의가 사람을 이해하기 전에 분류하기 시작하면, 정치는 설득의 기술을 잃고 낙인의 기술만 남긴다.
‘이대남’이라는 말은 이제 통계적 범주를 넘어 정치적 호명이 되었다. 이 말은 20대 남성을 가리키는 동시에 반페미니즘, 역차별 의식, 온라인 커뮤니티, 공격적 언어, 보수 정당 지지를 한꺼번에 암시한다. 그래서 이 말은 설명어이면서 낙인어이다. 낙인은 편리하다. 상대를 복잡하게 이해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보수 정치는 이 낙인을 동원의 자원으로 사용하고, 진보 정치는 이 낙인을 도덕적 비난의 근거로 사용한다. 양쪽 모두 청년 남성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을 자기 언어 안에 가두는 셈이다. 선거 결과를 분석한다는 것은 그 이름표를 더 선명하게 붙이는 일이 아니라, 이름표 아래 가려진 생애의 조건을 다시 펼쳐 보는 일이어야 한다.
6·3 지방선거는 본래 생활정치의 선거였다. 지방정부는 청년 주거, 대중교통, 일자리, 문화공간, 돌봄, 지역교육, 정신건강, 안전망을 다룬다. 이 문제들은 청년 남성의 삶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선거의 상당 부분은 지역의 삶보다 중앙정치의 진영 감각으로 읽혔다. 지방정치가 청년 남성에게 당신의 생활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지 못할 때, 진영정치는 당신의 분노를 대신 말해주겠다”고 속삭인다. 이 차이가 표심의 방향을 만든다. 75%라는 숫자는 청년 남성 전체의 이름이 아니라, 지방정치가 생활의 언어를 잃었을 때 생애 불안이 어떤 방식으로 정당정치의 언어에 흡수되는지를 보여주는 압축된 장면이다.
김달원 국무조정실 청년정책조정실장이 2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제2차 청년정책 기본계획 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5.12.26 연합뉴스
남성성의 위기는 페미니즘의 그림자가 아니다: 리브스가 던진 불편한 질문
리처드 리브스의 『Of Boys and Men』은 이 지점에서 중요한 우회로를 제공한다. 리브스는 남성과 소년의 어려움을 여성의 진보 때문에 생긴 손해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남성의 문제를 전통적 가부장제 남성성의 부산물로만 보지도 않고, 남성 특권이 약화된 데 대한 반발로만 보지도 않는다. 그의 질문은 보다 구조적이다. 여성의 삶은 교육, 노동, 가족, 시민권의 영역에서 빠르게 변했지만, 남성의 삶을 떠받치던 제도와 태도, 법과 문화는 그 변화에 맞추어 재구성되었는가 질문하는데, 그의 답은 부정적이다. 남성은 더 이상 과거의 방식으로 가족과 사회 안에서 자신의 지배적 위치를 얻기 어렵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인정받는 경로도 충분히 얻지 못했다고 말한다.
한국의 이십대 남성은 이 문제를 더 압축적으로 경험한다. 산업화 시대의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은 더 이상 안정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돌봄, 관계, 진학, 교육, 공공서비스의 새로운 남성 시민성 역시 충분히 제도화되지 않았다. 학교는 성적을 요구했고, 국가는 군복무를 요구했으며, 노동시장은 스펙을 요구했고, 가족은 여전히 안정된 생애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 요구들을 통과한 뒤에 기다리는 다소 특권적 보상은 점점 불확실해졌다. 이때 청년 남성은 자신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말과 자신이 미래를 잃고 있다는 감각 사이에서 갈라진다. 그 균열을 정치가 먼저 발견했고, 교육은 늦게 알아차렸다.
물론 이 관점은 성평등을 후퇴시키자는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성평등을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더 어려운 질문이다. 여성의 구조적 차별은 여전히 현실이다. 여성은 노동시장, 돌봄 부담, 안전, 경력단절, 대표성에서 지속적인 불평등을 경험한다. 동시에 청년 남성 일부는 자신이 제도적으로 여성에 비해 약자이며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이 두 문장은 서로를 취소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어려움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서로 다른 상처가 같은 공간에 있을 때, 정치는 어느 한쪽의 상처만 진짜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좋은 정치는 상처를 경쟁시키지 않고 상처가 서로를 찌르는 칼이 되기 전에, 그것을 제도와 언어와 책임의 문제로 바꾼다.
이러한 맥락에서 리브스가 던지는 불편한 질문은, 남성을 돕는 일은 왜 곧바로 성평등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되는가. 남학생의 학업부진, 남성의 정서적 고립, 낮은 돌봄 참여, 불안정한 노동시장 진입, 남성 교사의 부족, 가족 안에서의 역할 혼란을 말하는 것이 왜 여성의 권리를 약화시키는 일이어야 하는가 이다. 리브스는 책에서 이 질문을 회피하면 남성 위기의 언어는 반페미니즘 정치가 가져간다고 말한다. 특히 진보가 남성의 어려움을 말하지 않을 때, 보수는 그것을 여성혐오의 언어로 번역한다. 그리고 그 번역은 선거에서 표가 된다. 그런데 남성 위기를 말할 언어를 극우에게 빼앗긴 사회는 성평등도 지키기 어렵다고 말한다.
학교에서 시작된 격차: 남학생은 언제 정치적 냉소를 배우는가
학교에서 시작된 격차도 이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다만 이를 남학생의 능력 부족이나 기질의 문제로 말해서는 안 된다. 한국 학생은 국제학업성취도 평가에서 여전히 높은 성취를 보이지만, PISA 2022에서 한국의 남녀 학생은 수학에서는 유사한 성취를 보인 반면 읽기에서는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뚜렷하게 앞섰다. 이 차이는 남학생이 ‘덜 똑똑하다’는 뜻이 아니다. 학교가 요구하는 언어화 능력, 장시간의 자기조절, 과제 지속성, 평가 언어에 대한 적응이 학생들에게 동일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신호이다. 한국 학교는 오랫동안 조용히 앉아 오래 견디고,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정리하며, 성취를 성적으로 증명하는 학생을 표준적 학습자로 삼아왔다. 이 형식에 잘 맞지 않는 일부 남학생은 지식을 배우기 전에 먼저 실패의 감각을 배운다. 문제는 그 실패감이 학습지원의 언어로 포착되지 못할 때, 시간이 지나 냉소와 조롱의 언어로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학교 경험은 입시가속체제 속에서 더욱 압축된다. 고등학교 학업중단율은 최근 몇 년 사이 다시 상승했고, 대학 단계에서도 학업중단율은 낮지 않다. 이는 학교를 떠나는 학생이 단순히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학교와 대학이 제공하는 생애 전망이 더 이상 충분히 설득력 있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신호로 읽어야 한다. 특히 남학생의 학교 부적응은 징계, 무단결석, 낮은 문해력, 게임과 온라인 체류, 진로 무기력, 교사와의 관계 단절 같은 여러 양상으로 드러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양상이 모든 남학생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학교가 성별, 계층, 가족환경, 지역, 정서상태에 따라 다르게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면, 학교는 학생의 실패를 개인의 태도 문제로만 해석하게 된다. 이때 평등은 모두에게 같은 규칙을 적용하는 일이 아니라, 다른 조건의 학생이 배움에 도달할 수 있도록 다른 경로를 여는 일이 되어야 한다.
한국 학교는 이 문제에 직면하는 일을 오래 미루어 왔다. 입시는 남학생과 여학생 모두에게 가혹하지만, 그 안에서 실패를 해석하는 방식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어떤 학생은 낮은 성적을 노력 부족으로 받아들이지만, 어떤 학생은 학교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감각으로 받아들인다. 이 감각이 반복되면 학교는 배움의 장소가 아니라 모멸과 굴욕의 장소가 된다. 그리고 굴욕은 정치적 언어를 찾는다. 나는 노력했지만 인정받지 못했다”는 문장은 쉽게 누군가 부당한 혜택을 가져갔다”는 문장으로 바뀐다. 특히 한국의 공정 담론은 입시, 병역, 취업, 젠더정책이 한꺼번에 얽혀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형성된 실패감이 사회적 분노로 이동하기 쉽다. 학교에서 시작된 실패감이 공정 담론과 결합할 때, 정치적 냉소는 투표소에서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훨씬 이른 시기에 형성된다.
따라서 학생에게 혐오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왜 혐오의 언어가 일부 학생에게 설명력과 소속감을 주는지 묻지 않으면 교육은 깊어지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사회구조 문해력이다. 군복무와 돌봄, 노동시장과 성별임금격차, 주거불평등과 가족 변화, 온라인 알고리즘과 혐오산업, 공정과 평등의 관계를 함께 읽는 교육이어야 한다. 특히 한국 학교의 시민교육은 젠더 갈등을 단순히 ‘서로 존중하자’는 규범으로 처리하는 데서 멈추지 않아야 한다. 학생들은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는 법만이 아니라, 자신이 왜 미워하고 싶어졌는지를 해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기원을 읽는 능력이 민주주의의 기초이다. 학교는 정치적 냉소가 형성된 뒤에 시민교육을 시작할 것이 아니라, 실패감이 냉소가 되기 전에 다른 언어를 제공해야 한다.
행동하는 보통 남자들 소속 활동가들이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우리는 이대남이 아니란 말입니까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2.2.9 연합뉴스
공정이라는 이름의 상실감: 군복무, 일자리, 주거, 결혼시장의 지방정치
이 불확실성은 곧장 보수화로 이어지지 않는다. 사람은 불안하다고 해서 자동으로 보수가 되지 않는다. 불안은 해석을 필요로 하고, 해석은 언어를 필요로 하며, 언어는 정치적 공급자를 필요로 한다. 한국의 청년 남성에게 제공된 가장 강력한 언어 중 하나는 ‘공정’이었다. 공정은 본래 민주주의의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나 공정이 구조적 불평등을 해석하는 언어가 아니라 누가 혜택을 더 가져갔는지를 따지는 계산의 언어로 좁아질 때 문제가 생긴다. 이때 군복무는 빼앗긴 시간으로, 여성정책은 부당한 우대로, 성평등은 남성 배제로, 페미니즘은 특권 요구로 번역된다. 한국의 청년 남성에게 병역은 추상적 의무가 아니라 18개월에서 21개월의 생애시간을 제도적으로 이동시키는 경험이다. 이 시간이 학업, 취업, 관계, 경제적 독립의 일정과 겹칠 때, 공정은 권리의 언어가 아니라 지연된 출발선의 언어로 체감된다.
군복무는 기간이 짧아졌지만 한국 청년 남성의 생애시간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그것은 단지 병역의 문제가 아니라 출발선의 문제로 인식된다. 대학, 취업, 경력, 관계, 경제적 독립의 시간이 늦어진다는 감각은 노동시장 불안과 결합할 때 더 커진다. 2024년 청년고용률은 전년보다 낮아졌고, 20대 후반 고용률은 높아졌지만 청년취업자 수는 줄어드는 흐름이 함께 나타났다. 이는 ‘취업을 한다’는 사실과 ‘안정된 생애전망을 얻는다’는 감각 사이에 간극이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높은 주거비, 결혼 지연, 평균 초혼연령의 상승이 겹친다. 남성은 더 이상 자동적으로 가장의 지위를 얻지 못하지만, 여전히 경제적 능력으로 평가받는 문화 안에 놓여 있다. 이 모순은 조용히 분노를 만든다. 문제는 이 분노가 더 나은 복지국가나 청년정책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조직되지 않고, 종종 여성과 페미니즘을 향한 적대의 형태로 번역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반드시 함께 보아야 할 사실이 있다. 한국 여성은 여전히 노동시장, 임금, 돌봄, 경력단절, 안전의 영역에서 구조적 불평등을 경험한다. OECD 기준으로 보아도 한국의 성별임금격차는 매우 크고, 여성의 저임금 노동과 돌봄 부담은 여전히 중요한 사회문제이다. 따라서 청년 남성의 상실감을 말하는 일은 여성의 불평등을 부정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한국 사회의 문제는 서로 다른 불안이 같은 구조 위에서 충돌하고 있다는 데 있다. 청년 남성은 병역과 취업, 주거와 결혼시장에서 출발선의 지연과 생애전망의 약화를 느낀다. 청년 여성은 노동시장 차별, 안전 불안, 돌봄 부담, 경력단절의 위험을 경험한다. 이 둘을 경쟁시키는 정치는 쉽지만,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좋은 정치는 서로 다른 상처가 서로를 찌르기 전에 그것을 제도와 책임의 언어로 바꾸는 일이다.
지방선거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선거였다. 지방정부는 청년 주거, 대중교통, 지역 일자리, 창업지원, 문화공간, 정신건강, 군복무 이후 복귀 지원, 지역대학과 직업교육의 연결을 설계할 수 있다. 그러나 6·3 지방선거에서 청년 남성의 생애불안은 생활정책의 언어보다 진영정치의 언어로 더 많이 흡수되었다. 지방정치가 청년에게 당신의 하루를 바꾸겠다”고 말하지 못하면, 중앙정치와 온라인 정치는 당신의 억울함을 대신 분노해주겠다”고 말한다. 정책의 방향은 성별 경쟁이 아니라 생애전망의 회복이어야 한다. 군복무 경력 인정, 복무 이후 학습·취업 복귀 지원, 청년 주거 안정, 지역 공공인턴십, 정신건강 서비스, 직업교육의 품격 회복, 돌봄·교육·행정·문해 분야의 남성 진입 확대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이것은 남성 특혜가 아니라 불안정한 청년 생애경로 전체를 공공정책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다.
일베 이후의 알고리즘: 혐오는 어떻게 지역정치의 언어가 되었나
여기에 온라인 알고리즘이 결합한다. 일베는 하나의 역사적 이름이지만, 지금의 문제는 특정 사이트를 넘어선 알고리즘적 남성정치이다. 익명 게시판, 짧은 영상, 밈, 유튜브 정치평론, 커뮤니티 캡처 문화는 청년 남성의 불안을 빠르게 분노의 언어로 바꾼다. 혐오는 논리 이전에 소속감을 제공한다. 누군가를 함께 조롱하는 순간, 외로운 사람은 잠시 공동체에 들어간 듯한 감각을 얻는다. 그래서 혐오를 이기려면 더 정확한 논리만으로는 부족하다. 혐오보다 덜 외로운 소속이 필요하다. 남학생과 청년 남성이 자기 취약성을 말할 수 있는 안전한 관계의 장이 필요하다.
온라인 남성정치는 단순히 정치적 의견을 전달하지 않는다. 그것은 감정을 조직한다. 실패감은 조롱으로, 불안은 음모론으로, 외로움은 집단적 적대로, 성적 좌절은 여성혐오로, 정치적 무력감은 반제도 정서로 번역된다. 알고리즘은 복잡한 삶의 원인을 천천히 묻지 않는다. 빠르게 반응하고, 분노하게 만들고,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을 연결한다. 그 연결은 때로 위로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 위로는 대개 누군가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혐오의 공동체는 내부의 외로움을 덜어주는 대신 외부의 적을 필요로 한다. 그 적은 페미니스트, 여성, 기성세대, 교사, 정치권, 언론, 혹은 이름 없는 ‘그들’이 된다.
지방선거도 이 알고리즘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지역의 버스노선, 청년주택, 도서관, 학교, 돌봄, 공공의료 같은 의제는 느리고 복잡하다. 반면 젠더 논란, 손동작 논란, 성평등 구호, 학생인권과 교권의 대립, 특정 후보의 문화전쟁적 발언은 빠르고 선명하다. 빠른 언어가 느린 정책을 이긴다. 지방선거가 생활정치의 무대가 되지 못하고 정체성 전쟁의 장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역정책이 온라인에서 감정적으로 번역되지 못할 때, 혐오와 조롱은 그 빈 공간을 차지한다. 민주주의의 문제는 시민들이 정보를 몰라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공적 의제가 감정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할 때 생긴다.
2박3일 봉쇄 사태가 발생한 서울 송파구 잠실7동 제2투표소에 대한 개표가 진행 중인 가운데,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시위대가 5일 개표소인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앞에서 개표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2026.6.5 연합뉴스
물론 이십대 남성의 감정을 이해하자는 말이 여성혐오를 용인하자는 뜻일 수는 없다. 온라인 공간에서 확산되는 조롱, 혐오표현,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 여성 시민을 향한 공격성은 민주주의가 방치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혐오를 비판하는 일과 혐오가 자라는 조건을 분석하는 일은 함께 가야 한다. 비판만 있고 분석이 없으면 도덕적 우월감은 생기지만 정책은 생기지 않는다. 분석만 있고 비판이 없으면 구조의 이름으로 폭력을 흐릴 위험이 있다. 필요한 것은 둘 사이의 긴장이다. 혐오는 분명히 거부하되, 혐오가 왜 어떤 청년에게 설명력과 소속감을 제공하는지 물어야 한다. 디지털 시민교육은 팩트체크를 넘어 정서, 관계, 소속, 알고리즘의 작동방식까지 다루어야 한다.
성평등의 다음 언어: 남성을 다시 민주주의 안으로 초대하기
성평등 정책도 여기서 다시 설계되어야 한다. 성평등의 후퇴가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성평등이 지속가능하려면 남성 청년의 불안을 공공정책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여성의 구조적 차별은 여전히 현실이다. 여성은 노동시장, 돌봄 부담, 안전, 경력단절, 대표성에서 지속적인 불평등을 경험한다. 동시에 청년 남성 일부는 자신이 제도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이 두 문장은 서로를 적대하지 않는다. 좋은 정치는 상처를 경쟁시키지 않는다. 좋은 정치는 상처가 서로를 찌르는 칼이 되기 전에, 그것을 제도와 언어와 책임의 문제로 바꾼다.
리브스가 제안하는 방향은 남성을 과거의 가장 모델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다. 남성을 돌봄과 교육, 건강과 문해, 공공서비스와 지역사회 안으로 다시 초대하는 것이다. 남성 교사와 돌봄 인력의 진입을 넓히고, 남학생의 문해력과 정서적 고립을 조기에 지원하며, 군복무 이후 학습과 취업 복귀를 체계적으로 돕고, 청년 주거와 정신건강을 지방정부의 핵심 의제로 삼아야 한다. 이것은 남성 특혜가 아니다. 변화한 사회에서 남성이 타인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시민적 경로를 만드는 일이다. 남성 위기를 말할 언어를 극우에게 빼앗긴 사회는 성평등도 지키기 어렵다.
학교와 지방정부의 역할은 여기에서 만난다. 학교는 남학생에게 실패의 감각이 정치적 냉소로 굳기 전에 다른 언어를 제공해야 한다. 지방정부는 청년 남성의 불안을 혐오와 경쟁의 언어가 아니라 주거, 일자리, 정신건강, 돌봄, 관계, 지역참여의 언어로 바꾸어야 한다. 교육청은 남학생의 문해력과 정서지원, 남성 교사의 다양성, 진로경로의 복수화를 공교육의 정당한 의제로 삼아야 한다. 정당은 남성 청년의 분노를 여성혐오로 동원하지 말아야 하고, 진보는 남성의 어려움을 말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성평등의 다음 언어는 여성과 남성을 경쟁시키는 언어가 아니라, 변화한 사회에서 모두가 새로운 책임과 자유를 배울 수 있도록 하는 언어여야 한다.
75%라는 숫자 앞에서 필요한 첫 번째 태도는 놀람이 아니라 정밀함이다. 이십대 남성의 보수 지지를 극우화로만 부르면 분노의 구조를 놓친다. 반대로 그것을 모두 정당한 항의로만 부르면 혐오의 책임을 놓친다. 숫자는 우리에게 양쪽 모두를 요구한다. 분노의 구조를 읽되, 분노의 방향을 비판해야 한다. 상실감을 인정하되, 상실감이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적대로 조직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불편한 숫자를 없애는 기술이 아니라, 그 숫자가 가리키는 삶의 조건을 끝까지 읽어내는 기술이다. 75%는 청년 남성 전체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정치가 아직 해석하지 못한 생애 불안의 압축된 숫자이다.정용주 천왕초 교장 edcom234@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