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가 살아 있었다면 한국전쟁은 어떻게 됐을까 [뉴스] 김구 일행을 안내하는 김일성. 왼쪽 두번째부터 조소앙, 선우진(김구 비서), 김구, 김일성.
나 김구요.”
일흔둘의 김구가 손을 내밀자 서른일곱의 김일성은 허리부터 굽혔습니다. 김구는 북한이 벽에 김구를 타도하자”고 썼던 페인트를 급하게 지우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김구는 알만한 건 알고 북행한 것입니다. 김일성은 깍듯하게 예의를 갖췄습니다. 제가 김일성입니다. 제가 불민한 탓으로 선생님께서 오시느라 원로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1948년 4월 19일 남북정치협상회의를 위해 방북한 김구가 다음날 아침 김두봉의 안내로 일제강점기 평양부청으로 쓰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2층 김일성 사무실 입구에서 나와 기다리고 있던 김일성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당시 ‘남북조선 제 정당·사회단체 지도자 협의회’(평양 남북회담)을 기록한 3대 문서로 꼽히는 조선일보 최성복 특파원의 「평양남북협상의 인상」(신천지 1948년 4·5월 합본호), 송남헌 회고록 『해방 3년사』(까치출판사 1985), 선우진 회고록 『백범 선생과 함께 한 나날들』(푸른역사 2009)의 관련 내용을 보면 김일성은 김구·김규식을 상당한 수준으로 예우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평양 남북회담은 ▲남한에서 좌우익 56개 사회단체 및 정당 대표들을 포함해 남북 총 695명이 참석한 남북연석회의 ▲15인 남북지도자협의회 ▲남측 김구·김규식, 북측 김일성·김두봉 등 네 사람이 참석한 4김 회담 등 3단계로 진행됐습니다.
연석회의는 4월 19일 예비회담과 21〜23일 4일간의 본회담으로 진행됐습니다. 예비회담은 4월 19일 오전 11시 모란봉극장에서 김두봉의 사회로 열렸습니다. 김구와 김규식이 참석하지 않은 본회담은 북한 대표, 민전 산하 남한 대표, 정당협의회의 중도좌파 대표 등 모두 31명의 대표들이 참석했습니다. 연석회의에서 김일성은 ‘4대원칙’을 제시했습니다. ① 미제의 앞잡이인 유엔조선위원단을 몰아내고 유엔총회 및 소총회의 결의를 무효로 돌릴 것 ② 단정 단선 반대 ③ 소미 양군의 즉시 동시 철퇴 실현 ④ 양군 철퇴 후 조선인민의 자주성 위에서 일반적·평등적·직접적 비밀투표로 통일정부 수립할 것 등입니다. 주석 1)
남북지도자협의회는 남북한 및 좌우익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있어 구성 인원을 놓고 합의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에 김구는 남한 대표 9인을 모두 민족주의계로 하고 남한의 좌익은 배제하거나 북한 대표에 포함하자고 제의했습니다. 논란 끝에 그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북측 대표를 절반(4명)으로 축소하여 15인 지도자협의회를 구성했습니다. 그 결과 남한 민족주의자로 김구, 김규식, 조소앙, 홍명희, 이극로, 김붕준, 조완구, 엄항섭 등 8인, 남한 좌익인사로 허헌, 박헌영, 백남운 등 3인, 북측인사로 김두봉, 김일성, 최용건, 주영하 등 4인이 결정돼 좌우 비율을 맞췄습니다. 15인 남북지도자협의회는 주영하가 마련한 북측 초안을 기초로 토론과 수정을 거쳐 ‘남북통일에 대한 남북지도자의 공동성명’을 마련했습니다. 이 성명서는 4인 회담과 15인 협의회의 승인을 거쳐 각 정당·사회단체 공동명의로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주석 2)
26일과 30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4김 회담에서는 ① 미·소 양군 철수 ② 북한의 남침에 대한 우려 불식 ③ 전국(남북) 총선에 의한 통일국가 수립 ④ 남한의 단선 단정 반대 등 네 개 항에 합의했습니다. 주석 3)
김구 등 남측 민족주의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연석회의. 주석 앞줄 왼쪽부터 홍명희, 김일성, 김두봉, 김구, 조완구(추정). 김규식은 연석회의에는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합의문은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규탄하던 김일성의 안과는 달리 표현을 순화해 ‘미국은 정당한 제의를 수락하라’고 촉구했으며 ▲북한의 남침을 우려해 내전 방지에 관한 확인조항을 마련했고 ▲전국적인 선거에 의한 확인 조항을 마련함으로써 당시 북한이 마련한 통일헌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분명히 했고 ▲당시 남북대표자연석회의에 참여한 남한 정당·사회단체를 ‘천만여 명 이상을 망라’한 것으로 공식 확인한 것입니다. 김구의 꼿꼿함과 김규식의 명민함이 도출해낸 이 합의문에 대해 조선일보 최성복 특파원도 성공적이라고 기사를 썼습니다.
이 합의문은 1948년 4월 30일 ‘남북 조선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란 이름 하에 ‘남북 조선 제 정당·사회단체 공동성명서’로 공식 발표되었습니다. 해방 후 남북지도자의 최초 합의문서입니다. 회담을 마치고 헤어지기 전날인 5월 2일에도 김구·김규식 두 사람은 각각 김일성과 만나 작별의 인사를 나눴습니다.
김구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몸을 두 동강 낼지언정 조국을 갈라 놓아서야 되겠소? 내 눈으로 평양의 군사 퍼레이드를 보았소.(5월 1일에는 5.1절 경축 시민대회가 열려 남북연석회의 참가자들이 인민군 열병식과 30여만명의 시위행진을 관람했다.) 북측의 무력이 대단하더구려. 하지만 부탁하오. 어떤 일이 있어도 동족끼리 총칼을 겨누고 피를 흘리는 동족상잔만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오.”
김일성이 답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우리 군대는 오직 방어용일 뿐입니다. 우리가 먼저 남침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주석 4)
그러나 납북협상에 대해 훗날 남한 일각에서 김구·김규식이 김일성에게 이용당했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주로 냉전기 반공 사관을 가진 측에서 제기된 이 해석은 ▲두 사람이 결과적으로는 김일성 정권의 선전효과에 이용당했다 ▲김구와 나란히 등장하여 김일성이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크게 높이는 데 활용했다 ▲실제 정치적 성과가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학계 다수의 연구자는 이 주장이 지나치게 단순하고 반공 사관에 치우쳐 있다고 봅니다. 즉 ▲두 사람은 평양의 소련군 존재나 공산정권의 성격을 알았고, 당장 성공 가능성을 크지 않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던 만큼 북측에 끌려간 것이 아니다 ▲민족지도자로서 분단이 굳어지기 전에 민족통일의 가능성을 확인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합의서는 훗날 ‘7·4남북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등 한반도에 장기지속의 생명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김구·김규식의 평양회담 시도를 분단의 바람직한 내일이 통일이라면, 분단 전후 민족주의자들의 통일운동은 내일을 여는 역사”라고 평가합니다. 주석 5)
여기서 필연적으로 두 개의 질문이 떠오릅니다. 하나는 북한이 훗날 주장한 대로 김구가 김일성에게 북한에서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느냐 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김구가 살아 있었더라면 한국전쟁에 어떤 영향이 있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순서상 한국전쟁의 영향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가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상당히 중요한 문제임은 분명합니다. 평양회담은 1948년 4월에 있었고, 김구는 다음 해 6월 29일 우익 군인의 총에 사살됐습니다. 국회에서 2년간의 조사 끝에 1995년 12월 채택된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 국회조사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정부가 1949년에 발표했던 ‘한독당 내부 갈등에 따른 안두희의 단독 범행’이라는 결론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보고서는 사전에 준비되고 조직적으로 역할이 분담된 사건”이라며 안두희의 직접 배후로 신성모 국방장관, 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특무대장, 채병덕 총참모장, 전봉덕 헌병부사령관 등 군 내부의 조직적 공작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사전에 암살을 직접 지시했다는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건 이후 안두희 보호와 특혜는 최고 권력자의 묵인 없이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미군정기인 1946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광복 1주년 경축행사. 김구(오른쪽)는 우리 스스로 경축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남이 주관하는 연회에 춤추는 격이니 이 경축은 춤팔이 경축이다”라고 말했다.
김구 서거 꼭 1년 후인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됩니다. 그 당시 만약 김구가 살아 있었더라면 김일성이 쉽게 남침을 결정했을까요? 1948년 4월 남북회담 4개항 합의, 특히 ②항의 내전을 방지하고 무력충돌을 피하기로 합의한 당사자가 살아 있는데 말입니다. 이에 대해 직접적으로 논한 연구자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역사에서 가정은 허무한 것이니까요.
그러나 김구가 생존해 있었다면 김일성의 정치적 계산을 복잡하게 만들었을 것이며, 남침의 구실 찾기와 전후 통일전선 전략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가상의 질문을 두 가지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첫째, 김구가 살아 있었다면 남침 자체가 없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오”일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여러 자료에 의하면 1950년 초 김일성은 ‘남한 정권이 불안정하다’ ‘인민군이 우세하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스탈린의 승인과 마오쩌둥의 동의를 얻어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이 결정은 김구의 생사보다 국제정세, 소련의 승인, 중국 혁명 성공에 더 크게 좌우되었습니다. 따라서 ‘김구가 살아 있었으므로 남침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가설은 설득력이 약합니다.
둘째 질문은 ‘김구가 살아 있었다면 남침의 정치적 구실 찾기는 달라졌을까?’입니다.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김구는 1948년 남북협상의 당사자였습니다. 김일성의 입장에서 보면 김구는 단순한 야당 지도자가 아니라 임시정부 주석, 독립운동의 상징, 자신과 사나이로서의 약속을 한 최대의 민족주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1950년 6월에 김구가 살아 있었다면, 김일성은 전쟁을 ‘북조선 대 대한민국’ 구도로만 설명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남한 내부에 ‘통일을 주장하지만 공산주의자가 아닌 제3의 민족주의 세력’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남침하지 않겠다고 합의한 평양회담에 참여한 남북한 695명의 사회단체·정당 지도자들이 두 눈 뜨고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1948년 평양에서 김일성은 김구를 적극 활용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 후 통일국가를 상상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만약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김구가 살아 있었다면, 김일성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김일성은 북한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도 아니었습니다. 김구는 북한이 남침한다고 도망갈 지도자는 아닙니다.
즉, 김일성 입장에서는 이승만보다 오히려 더 곤란한 경쟁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분야 연구의 권위자인 서중석, 한시준, 도진순 등은 김구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반공주의자였지만 분단을 거부한 민족주의자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들의 연구를 따라가면 ‘김구가 생존했다면 북한의 통일전선 전략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문제 제기는 상당히 가능해 보입니다.
그래서 흥미로운 것은 ‘1948년의 김일성은 김구를 자신의 정통성을 높여줄 인물로 환영했겠지만, 1950년의 김일성에게 김구는 오히려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1948년 평양의 김구는 김일성에게 정통성을 제공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1950년 남침 이후의 한반도에서 김구는 김일성이 통제할 수 없는 ‘제3의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컸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엄항섭 등 남북협상에 참여했던 지도자들이 납북당했습니다. 김구가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북한은 틀림없이 그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김구는 김규식과는 또 다른 존재였습니다. 김일성은 1948년 평양회담에서 김구를 환영했을지라도 1950년의 김구는 결코 다루기 쉬운 인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위의 가정에 대한 답은 1949년 김구의 죽음으로 남한 민족주의 세력의 구심점이 사라졌고, 그 결과 김일성이 전쟁 구실을 찾기도 단순했고, 전쟁 양상도 이승만 대 김일성의 대결 구도로 전개되었다”가 될 것 같습니다.
1948년 평양에서 김일성과 마주 앉았던 김구가 1950년 6월에도 살아 있었다면, 김일성은 과연 남침을 결행할 수 있었을까요? 전쟁은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쟁은 우리가 알고 있는 6·25와는 다른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전쟁 개전 여부는 스탈린이 결정했더라도, 전쟁 후 권력구도는 김일성이 고민해야 할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김일성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는 전쟁 그 자체가 아니라 전쟁 이후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 즉 ‘김구가 김일성에게 북한에서 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북한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어떻게 봐야 하는가’로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회에서 계속하겠습니다.
임순만 언론인(장편소설 『백범 강산에 눕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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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서울대출판부, 1997.
2) 위의 책
3) 합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①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로부터 외국 군대를 동시에 철거하는 것은 우리 조국에 조성된 현 정세하에서 조선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정당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미국은 정당한 제의를 수락하야 자기 군대를 남조선으로부터 철퇴시킴으로써 조선 독립을 실제로 허여하여야 할 것이다. ② 남북 제 정당·사회단체 지도자는 우리 강토에서 외국 군대가 철거한 이후에 내전에 발생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또한 그들은 통일에 대한 조선 인민의 지망(志望)에 배치되는 어떠한 무질서의 발생도 용허하지 않을 것이다. ③ 외국 군대가 철수한 이후에 하기(下記) 제 정당들의 공동명의로 전 조선 정치회의를 소집하야 조선 인민의 각계 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며, 국가의 일체의 정당과 정치·경제·문화·생활의 일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이 정부는 그 과업으로 일반적·직접적·평등적 비밀투표에 의하야 통일적 조선 입법기관 선거를 실시할 것이며, 선거된 입법기관은 조선헙법을 제정하며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④ 천만여 명 이상을 망라한 남조선 제 정당·사회단체들이 남조선 단독선거를 반대하느니만큼 유권자의 절대다수가 반대하는 남조선 단독선거는 설사 실시된다 하여도 절대로 우리 민족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할 것이며 다만 기만에 불과한 선거가 될 뿐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남북요인회담 공동성명서 발표」, 『자료 대한민국사』 1948년 4월 30일.)
4) 위의 「평양남북협상의 인상」, 『해방 3년사』, 『백범 선생과 함께 한 나날들』에서 추림.
5) 도진순 위의 책
임순만 언론인 ysm@mindl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