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에바 칸시온, 노래여 분노하라··· 발언하라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1970년대 초 한국 사회가 군사정권에 의해 ‘파시즘’으로 속절없이 퇴행할 때, 서구와 남미에서는 청년 학생의 변혁 운동이 세계사적 거대한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68 학생혁명과 함께 반권위주의 투쟁이 이어지고 있었고, 미국에선 베트남 전쟁이 촉발한 반전 평화 운동이 사회를 휩쓸고 있었다.
오랫동안 친미 독재 세력의 착취와 억압에서 시달리던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청년 학생과 농민 중심의 민중운동이 대륙의 친미 기득권 체제를 흔들고 있었다. 특히 칠레에서는 선거 혁명으로 민주 정부가 들어섰고, 혁명의 물결은 이웃 나라로 확산하고 있었다. 지구적 차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이런 반전 평화 민주화 운동을 추동하는 강력한 에너지 가운데 하나가 노래였다. 칠레의 ‘누에바 칸시온(새 노래)’은 대표적이었다.
제1회 누에바 칸시온 페스티벌에서 우승한 빅토르 하라의 생전 모습. 그는 누에바 칸시온 운동의 기수였다. 그러나 피노체트 정권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됐다. 사진: 위키백과
박정희 정권은 긴장했다. 한국 청년의 폭발력은 이미 4·19 민주혁명과 6·3 항쟁을 통해 확인됐다. 때문에 경찰은 물론 군까지 동원한 강력한 물리력과 각종 간첩단 조작 및 용공 조작 사건으로 억누르긴 했지만, 지구촌 변혁의 물결이 언제 한반도에 상륙할지 몰랐다.
청년운동에서 그들이 우려했던 것 가운데 하나가 노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그들이 해외 반전, 평화, 민중가요의 상륙을 원천 봉쇄한 건 그 때문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연예인협회를 앞세워 자율심의 형태로 지구촌 최고의 인기 팝이었던 밥 딜런이나 조안 바에즈, 존 레논 등의 반전 혹은 평화운동 노래들을 금지곡으로 묶어 버렸다. 앨범 수입은 물론 방송, 공연을 금지하고, 비공식적인 유통까지도 색출하려 했다.
조안 바에즈(왼쪽)와 밥 달런이 반전 가요를 함께 부르고 있다. 박정희 정권은 반전,평화운동을 하던 이들의 노래마저 한국 상륙을 봉쇄했다. 사진: 유튜브영상 갈무리
1970년 미국 플로리다주립대에서 학생들이 반전 평화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출처:위키백과
그러나 노래란 톡톡 튀어 다니는 메뚜기와 같아, 금지곡으로 지정할 수는 있지만 잡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바람처럼 날아다니고, 숨처럼 들고 나는 노래를 어떻게 잡아가둘 것인가. 대학가에선 이미 유학생, 선교사, 여행객을 통해 들어온 이들 노래가 애창되고 또 널리 퍼지고 있었다. 그건 김지하의 담시 ‘비어(蜚語, 메뚜기처럼 톡톡 튀어 다니는 말)’와 다르지 않았다.
공안 당국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숨어서 한둘이 부르는 거야 묵인할 수밖에 없지만, 떼로 모여 공공연하게 부르고, 이것이 나아가 하나의 운동으로 발전하는 것까지 좌시할 순 없었다.
권력이 속을 끓이고 있을 때, 명동 한복판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떼로 모여 저마다의 감정과 느낌과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었다. 게다가 다른 나라의 노래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의 이야기와 정서를 담은 노래를 짓고 또 공연하고 있었다.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명동에서 이런 장면이 벌어지자, 남산의 ‘중정’(중앙정보부)은 기가 막혔다. 중정은 ‘누에바 칸시온’이 칠레의 권위주의 정권을 몰아내는 결정적인 무기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싹이 커지기 전에 잘라 버려야 했다.
YWCA 청개구리홀은 젊은이들의 해방구였으나 박정희 정권의 알 수 없는 압력에 의해 1년여만에 문을 닫았다. 사진 왼쪽은 1971년 청개구리홀 무대에서 김민기와 방의경(완쪽)이 노래를 하는 모습.사진:학전제공 . 오른쪽 사진은 방의경과 양희은이 청개구리 홀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 사진출처: 한겨레신문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서울YWCA로서는 달리 선택할 게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떤 압력이 들어갔는지, 1971년 7월 말 서울YWCA는 청개구리 홀을 폐관했다. 개관한 지 불과 1년 여 만이었다. 비용을 따진다면 싼 입장료(99원)로는 운영이 힘들었지만, 청년 문화공간으로서 장안의 명소가 되어버린 청개구리 홀은 당시 서울YWCA가 한 사업 가운데 최고의 성공작이었다. 청년 운동단체로서 폐쇄가 아니라 유지하고 확장할 이유가 더 많았다.
그러면 한국판 ‘새 노래 운동’은 청개구리 홀 폐쇄와 함께 사라졌던 것일까?
‘누에바 칸시온’은 1950년대 아르헨티나의 아타우알파 유판키와 칠레의 비올레타 파라 등의 민요 운동에서 시작했다. 원주민 ‘인디오’의 민요를 수집하고 그 리듬을 살린 창작곡을 지어 보급해, 남미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또 살리자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1960년대 중반부터 당대의 이야기를 민요의 음악적 요소와 서양 음악 요소를 결합한 새로운 형식의 노래로 짓고 부르는 노래 운동으로 발전했다. 칠레에서는 1969년 ‘제1회 누에바 칸시온 페스티벌’이 열렸다.
칠레의 작가, 음악인, 사회 운동가들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했다. 당시 칠레는 미국의 자원 약탈과 매판 자본의 노동력 착취, 친미 정권의 노동자와 농민 탄압, 그로 말미암은 극단적인 양극화, 민중의 빈곤 등 사회적 모순이 극도로 악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맹률이 70%에 이르는 탓에, 문자만으로는 이런 모순을 알리고 공감대를 넓히는 데 한계가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라틴아메리카인들에게 노래와 춤은 ‘밥’만큼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이들은 노래와 춤으로 하루의 고단함을 풀고, 절망적인 내일을 잊었다. 노래가 없는 삶은 밥이 없는 삶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노래는 이용하기에 따라서는 교육수단이 될 수 있고, 사회 변화의 지렛대가 될 수 있었다. 당시 칠레의 형편에서 사회적 모순을 확산하고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하나의 전망 아래 사람들의 마음을 응집하는 데 노래만큼 유용한 수단은 없었다.
‘누에바 칸시온’은 곧 변혁 운동의 무기가 되었다. ‘누에바 칸시온’의 대표적인 기치 가운데 하나가 ‘나의 기타는 총, 나의 노래는 총알’이었던 건 이 때문이었다. 실제로 선거 혁명으로 집권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노래가 없었다면 혁명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칠레에서의 성공으로 이 운동은 남미 전역으로 퍼졌다.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정치 지형은 친미 권위주의 정권 일색이었고, 미국 정부와 자본의 자원 수탈, 농민 노동자 착취, 권위주의 정권 지원이라는 굴레를 공유하고 있었다. 1959년 쿠바에서 혁명이 성공해 중남미 정권들의 극우화 파고에 균열을 내긴 했지만, 쿠바는 카리브해의 한 섬나라에 불과했다. 미국은 쿠바 혁명 이후 자신의 안마당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고강도(군사적 조처) 개입을 주저하지 않았다.
칠레의 새 정권은 미국으로 헐값에 실려 나가던 구리 등 천연자원과 주요 산업을 국유화했다. 미국 정부의 간섭을 거부했으며, 미국의 자본을 철수시켰다. 미국으로서는 눈썹에 불이 붙은 꼴이었다. 안면 전체로 이런 불길이 확산하는 건 불 보듯 했다.
이에 따라 우선 칠레에 대한 경제적 봉쇄로 목줄을 조였다. 자본가들을 조종해 파업과 태업을 유도했다. 다른 나라와의 교역도 막았다. 칠레 경제가 추락해 민생이 파탄 날 때쯤 피노체트가 이끄는 호전적인 군부를 지원해 군사 쿠데타를 유도했다. 결국 아옌데 정부는 군부의 쿠데타로 3년 만에 전복됐다.
이후 남미 전역에는 군사 쿠데타가 열병처럼 퍼졌다. 니카라과, 브라질, 우루과이, 볼리비아, 과테말라, 파라과이,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파나마, 아이티, 멕시코 등에도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이 가운데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비델라 정권, 파라과이의 스트로에스네르 정권 그리고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의 군사정권은 히틀러의 파시즘 이상으로 인권 유린과 정치적 학살로 악명을 떨쳤다.
쿠데타에 성공한 칠레 군부가 가정 먼저 단행한 조처 가운데 하나는 ‘누에바 칸시온’의 금지였다. 관련 음악인들은 체포해 투옥하거나 해외로 추방했다. 킬라파윤 등 누에바 칸시온의 기수들은 대부분, 피노체트 정권이 종식을 고하기까지 15년여 동안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해외를 떠돌아야 했다.
칠에 누에바 칸시온의 기수 칼라파윤의 앨범 사진. 단결된 민중은 결코 패하지 않는다는 노랫말이 선명하다.
쿠데타 군부에 의해 그야말로 난자당한 누에바 칸시온의 기수 빅토르 하라는 희생의 상징이었다. 그는 체포돼 체육관에 감금된 상황에서도 기타 치며 인민의 노래 ‘벤세라모스(우리 승리하리라)’를 수천 명의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불렀다. 격앙한 쿠데타군은 기타를 치던 그의 손을 군홧발로 짓밟았고, 노래하던 그의 입을 짓이겼으며, 끝내 기관총을 난사해 죽였다. 하라의 몸에는 총탄 40여 발이 관통하거나 박혔다고 한다.
빅토르 하라는 희생의 상징이었다. 민중의 선두에는 언제나 기타를 든 그가 있었다. 사진출처: 나무위키
하라는 바로 그 ‘제1회 누에바 칸시온 페스티벌’ 우승자였다. 이를 계기로 아옌데가 이끄는 ‘인민 행동 전선’에 합류해 변혁의 기수로 나섰다. 노래 ‘마니페스토(선언)’ 등을 통해 혁명의 정신을 확산하고, 그 열기를 고취하였다. 민중의 선두에는 언제나 기타를 든 그가 있었다.
아르헨티나 누에바 칸시온의 기수 메르세데스 소사 . 사진 출처: 네이버블로그, 시가 된 노래. 노래가 된 시
누에바 칸시온의 억압은 이웃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칠레 쿠데타로부터 3년 뒤 역시 미국의 지원을 받아 아르헨티나에서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군사정권은 즉각 세계적인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에 대한 영구 추방을 시작으로 누에바 칸시온을 청소했다. 소사는 1982년 군사정권의 온갖 협박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귀국을 강행했으며, 그가 귀국한 이듬해 치러진 선거 혁명을 통해 민주 정부가 탄생했다.
그리스 작곡가 미키스 데오도라키스 .시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유럽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1967년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그리스 군사정권은 우선 군 법령으로 저항 음악을 금지했다. 그리스 ‘민중의 심장을 울리던’ 작곡가 미키스 데오도라키스는 군부 독재에 저항하다가 투옥과 고문을 당했고, 1970년 결국 추방됐다. 국민 가수 마리아 파란두리도 저항-투옥-추방의 길을 걸어야 했다. 두 사람은 1974년 군부 독재가 종식되고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데오도라키스는 이렇게 말했다.
음악은 탱크보다 강하다. 독재에 대한 투쟁으로 음악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음악은 사람들을 더욱 아름답고 따듯하게 만든다. 탱크는 시간이 흐르면 녹슨다. 그러나 음악은 남는다.”
박정희 정권의 통제가 아무리 심해도 이런 이야기들이 한국 땅에 전해지지 않을 리 없었다. 시차는 있었지만, 해외 유학생을 통해, 선교사를 통해, 종교 조직을 통해 대학가나 지식인 사회에 속속 전해져왔다. 1970년대 초, 미국 흑인 인권운동 속에서 탄생한 ‘우리 승리하리라’ 등의 노래가 이미 대학가나 기독교 청년단체에서 널리 불렸다. 하라가 부른 ‘벤세라모스’와는 이란성 쌍둥이 노래다.
누에바 칸시온과 더불어 독재에 저항하는 민중과 함께했던 남미 가톨릭의 해방신학도 마찬가지였다. 한때 해방신학은 ‘공산주의의 선전 선동’으로 매도돼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했지만, 1970년대에는 이미 신학의 세계적 조류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었다. 1968년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열린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는 2차 바티칸 공의회 문서에 근거해 해방신학의 관점을 공식적으로 수용했다. 우리나라에선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안병무 목사(한국신학대 교수) 등이 해방신학의 관점을 ‘민중 신학’으로 발전시켜 토착화에 앞장서고 있었다.
김민기가 이런 세계적인 흐름을 얼마나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1971년 발매한 1집에는 정보기관이 불온시한 ‘꽃 피우는 아이’ ‘종이연’은 물론 ‘아하 누가 그렇게’ ‘잘 가오’ 등 논쟁적인 작품들이 대거 수록됐다. 이 가운데 ‘종이연’은 특기할 만했다. ‘예윤’의 강압으로 제목이 바뀐 이 노래의 원제 ‘혼혈아’는 당시 미국에 대한 예속과 미군에 대한 굴종을 상징하는 낱말이었다. 미국에 맹종해야 했던 정권으로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노래였다.
하지만 정권의 억압이 아무리 무지막지해도, 청개구리 홀에서 새로운 문화를 맛본 청년들의 감수성과 정서 그리고 꿈마저 없앨 수는 없었다. 청개구리 홀은 폐관했지만, 그 정신을 이으려는 공간과 활동은 여기저기로 퍼져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발매한 앨범 는 새로운 포크를 꿈꾸던 신예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자극제였으며, 나아갈 길을 가리키는 별이 되었다.
처음 깃발을 든 사람은 방의경이었다. 그는 1970년 늦가을 충무로1가 대연각호텔 옆에 음악 공간 ‘내쉬빌’을 차렸다. 당시 최고의 음향 시설을 자랑하던 이곳은 청개구리 홀에서처럼 상업적인 가수들을 배제하고, 창작곡 위주로 활동하는 젊은 포크 가수들에게 우선 무대를 제공했다. ‘쎄시봉’의 일원으로 번안 포크의 스타였던 조영남이 ‘내쉬빌’의 문을 두드렸으나, 보기 좋게 거절당한 일화는 이 공간이 추구하는 가치를 상징한다.
청개구리 홀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방의경.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이지만 수모가 예상되자 미국으로 떠났다. 사진: 한겨레신문
방의경은 자타가 공인하는 내쉬빌의 두목이었다. 그는 이백천이 운영하던 인근의 상업적인 음악감상실 ‘르 시랑스’에서 개런티를 받고 노래했는데, 그건 내쉬빌의 배고픈 후배들의 ‘밥’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이화여대 미대 재학 중이던 방의경은 당시 가수 정미조와 함께 이대를 대표하는 음악인이었다.
방의경은 2옥타브를 넘나드는 빼어난 가창력과 서정적인 미성, 수준급의 기타 연주 실력, 자신의 감성을 시적 언어로 풀어내는 언어 감각, 그리고 이것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작곡 능력 등 싱어송라이터로서 갖춰야 할 것은 모두 갖추고 있었다. 양희은의 대표곡 가운데 하나인 ‘아름다운 것들’은 조안 바에즈의 노래 ‘매리 해밀턴’의 가사를 방의경이 번안한 것으로, 그의 서정적 언어 감각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그런 방의경이 자신의 이야기, 감성, 발언을 담은 노래를 짓고 부르게 된 배경에도 김민기가 있었다. 그는 청개구리 홀에서 김민기가 처음 발표한 노래 ‘귀하에게’(노래 ‘검은 지프차’의 다른 명칭, 권력층의 부패를 풍자한 노래)를 듣고 충격을 받아, ‘새로운 노래’를 본격적으로 고민했다고 한다. 그 결과가 1970년 말 탄생한 자작곡 ‘겨울’이었다.
김민기의 노래들이 성찰적이고, 고백적이었다면 방의경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시대의 아픔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방의경은 추진력과 리더십에서도 두목다웠다. 1974년 발표해 대학가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던 그의 ‘하양나비’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무더기로 끌려가 사형 혹은 무기징역을 선고당한 젊은이들을 보며 만든 것이었다. 그러했으니, 정권의 압박은 피할 수 없었다. 김민기는 의도하지 않고 억압을 당했다면, 그는 억압을 불렀고, 억압에 저항했다.
1972년 발매된 방의경 1집앨범(사진 왼쪽) 과 2016년 발매된 방의경 1.2집 앨범 사진. 1집 앨범이 일주일만에 발매 금지를 당한 것은 불나무가 사전에 없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두번째 앨범 표지가 불나무를 연상시키고 있어 독재정권에 한방 먹인 것 같은 쾌감을 주고 있다.
1971년 9월 양희은이 1집을 발매하고, 김민기가 그해 11월 를 발매했다. 방의경과 ‘내쉬빌’의 3인방(이수일, 김무영, 김유복)은 창작곡을 모아 음반 제작을 추진했고, 이듬해 봄 유니버샬레코드에서 이라는 타이틀의 한정 컴필레이션 음반을 냈다. 방의경의 불우한 명곡 ‘불나무’가 처음 담긴 앨범이었다. 그해 1972년 6월에는 성음사 나현구 사장의 제안으로 자신의 노래 11곡과 서유석의 ‘친구야’를 수록한 첫 독집 을 발매했다.
당시는 음반 타이틀에 ‘고운’ 혹은 ‘아름다운’ 혹은 ‘밝은’이라는 문구가 꼭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양희은의 1970년대 앨범 타이틀에도 빠지지 않고 들어갔다. 그러나 방의경은 이 터무니없이 강요된 정치적 수사를 걷어차 버렸다. 그 결과 그의 첫 음반은 발매되자마자 불과 일주일 만에 판매 금지 처분을 당했다. 배포된 것은 모두 회수돼 폐기됐다. 대중가요 사전심의를 맡았던 ‘예륜(예술문화윤리위원회)’이 이같은 조처를 한 궁색한 이유는 앨범의 타이틀곡 ‘불나무’가 사전에 없는 단어”라는 것이었다. 방의경은 이듬해 기독교방송 청소년 인기 프로그램 ‘세븐틴’의 디제이로 발탁됐지만, 역시 넉 달 만에 하차해야 했다.
그런 방의경이 주도하는 내쉬빌이었으니, 이 공간도 장수할 수 없었다. 내쉬빌은 문을 연 지 1년 만인 1972년 여름 문을 닫았다. 방의경은 1974년 2집을 발매하기 위해 음원까지 제작했지만, 1집과 같은 수모가 예상되자 발매를 포기하고 1976년 미국으로 떠나 버렸다. 친구에게 맡겨둔 음원마저 실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