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란희의 TalkTalk】ESG 낭만주의의 종말...최고 해석자의 시대가 온다 [칼럼] 7월 1일, 뉴미디어 혁신포럼 발족식에 다녀왔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유튜브 채널 중 한 곳의 부사장이 무대에 올라와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AI 때문에 촬영기자도, 편집기자도 언젠가는 모두 필요 없어질 것 같다고 했습니다. 텍스트만 넣으면 인터뷰 현장 영상까지 만들어지는 시대가 됐는데, 메이저 방송사들이 그 무거운 인력 구조와 제작 시스템을 앞으로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차마 회사 안에서 AI를 전면 도입하자”고 말하기 어렵다고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며 이상하게 마음이 서늘해졌습니다. 제2, 제3의 JTBC 사태를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미디어 기업들이 겪는 위기는 늘 기술 변화보다 늦게 드러납니다. 종이신문에서 인터넷으로, 인터넷에서 소셜미디어로, 그리고 이제 AI 미디어로 넘어가는 동안 조직은 늘 조금씩 늦었습니다. 기술은 이미 바뀌었는데, 조직은 아직 예전의 비용 구조와 직무 체계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이제 미디어 혹은 기자 직무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한 획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자료가 주어지는 1에서부터 무한확장하는 걸 AI한테 이길 수는 없으니, 제로(0)에서 1을 생각해서 AI한테 던지는 그것. 해석력 혹은 통찰 일 겁니다. 이 칼럼 또한 AI한테 제 생각을 강요해서 끌어냈지만, 글 자체는 AI가 써준 것이니까요.
무너지는 엄브렐라, Actuals, not estimates 의 시대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ESG와 직무 이야기 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예전부터 저는 여건이 되면 ESG와 직무 를 연재형 인터뷰든, 칼럼이든, 뭐든 하고 싶었습니다. 한국에서 ESG 직무는 대부분의 조직에서 난생 처음 맞이하는 신생 직무 입니다. 임팩트온 DB를 정리하느라 5000명 넘는 이들을 쭉 스크리닝해보니, 정말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분들이 이 생태계에 존재합니다. 이제 곧 의무화되는 KSSB 공시를 앞두고, 조직은 또 다들 어떻게 개편될까요.
글로벌에서도 비슷한가 봅니다. 최근 파이낸셜타임즈에 나온 기사의 제목은 The reinvention of the chief sustainability officer(CSO 직무 재설계) 입니다. CSO의 역할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는 겁니다. 새로운 CSO의 모델로 제시된 인물은 SAP의 소피아 멘델슨(Sophia Mendelsohn)입니다. 그는 지속가능성을 환경 캠페인이 아니라 비즈니스 전략, 제품 데이터, 고객 가치, 탄소가격과 연결하는 인물로 소개됩니다.
과거의 CSO는 기업의 ESG 비전을 만들고, 이사회와 투자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지속가능보고서를 통해 기업 이미지와 평판을 관리하는 역할이 컸습니다. 하지만 이제 달라지고 있습니다. FT는 이 변화를 관통하는 문장을 제시했습니다. actuals, not estimates . 추정치가 아닌 실제 데이터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CSO는 기업의 제품과 서비스가 어떻게 성장하고, 어떤 자원을 쓰며, 어떤 비용과 리스크를 만드는지를 숫자로 설명해야 합니다.
ESG 낭만주의의 종말을 당긴 3가지 트리거
3년 전, 공급망실사지침(CSDDD)의 오랜 노하우를 지닌 영국 NGO 옥스팜(Oxfam)을 찾았을 때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옥스팜은 20년 가까이 유니레버와 긴밀하게 협업해 온 가장 가까운 파트너입니다. 당시 그들이 전한 유니레버의 내부는 놀라웠습니다.
80명이 넘던 본사 직속 지속가능성팀이 해체되다시피 하여, 각 사업 부서와 개별 운영 조직으로 흩어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사내에 홀로 떠 있는 ‘엄브렐라(Umbrella) 조직’만으로는 지속가능성 목표를 실제 비즈니스 안에서 실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겁니다.
지난해 미디어에서 나왔듯이, 글로벌 조직은 CSO 직책을 축소하거나 리스크·재무 부서로 통합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니레버의 지속가능성 책임자 레베카 마못(Rebecca Marmot)은 대규모 구조조정 과정에서 회사를 떠났고, 웰스파고, 스탠다드차타드 등 금융권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등장합니다.
실제 데이터에서도 이런 흐름이 보입니다. 지속가능미디어 트렐리스 조사 결과, 매출 10억달러(약 1조5000억원) 이상의 글로벌 기업에서 일하는 지속가능성 전문가 가운데 63%가 대외 지속가능성 커뮤니케이션을 축소하거나 전면 재검토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기업들이 기후 대응을 포기한 것일까요. 트렐리스는 자발적인 약속, 야심찬 목표, 홍보 전략에만 의존하던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어려운 인프라 구축, 실질적인 운영을 하는 방향으로 지속가능성 직무가 재편되고 있다 고 밝혔습니다.
이 변화의 트리거는 3가지라고 합니다. AI, 에너지 수요, 순환경제 규제입니다. AI 붐은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를 폭발적으로 키우고 있으며, 기후목표와 전력조달이라는 양대 과제를 달성하는 것이 중요한 경쟁력이 되고 있습니다. 순환경제도 비슷합니다. 미국 콜로라도, 메인, 오리건 등 일부 주에서는 포장 규정 위반 시 하루 최대 2만5000달러(약 3750만원)의 벌금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포장재 감축은 이제 비용과 직결된 생존 문제입니다.
차가운 데이터에 숨결을 불어넣는 ‘전략적 스토리텔러’
그렇다면, CSO 직무는 내부통제, 데이터 관리, 운영 전략만 잘하면 되는 것일까요?
최근 글로벌 AI 기업 앤스로픽(Anthropic)이 연봉 5억원을 내걸고 카피 리드(Copy Lead)와 콘텐츠 리드 직무를 채용한 흐름을 한번 보십시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링크트인(LinkedIn) 데이터를 인용해 기업 내 스토리텔러 직무가 급증하고 있다고 보도한 맥락도 같습니다. 구글이 구글 클라우드 스토리텔링 팀을 운영하고, 노션(Notion)이 커뮤니케이션과 소셜미디어를 결합한 스토리텔링 조직을 고도화하는 이유도 명확합니다. 아무리 AI가 정교한 숫자를 뽑아내도, 그 숫자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해 신뢰를 자아내는 역할은 자동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CSO 직무 또한 스토리텔러 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과거에는 증거와 실행이 결여된 ‘낭만적인 스토리텔러’였다면, 앞으로는 철저한 데이터와 운영 성과가 뒷받침된 ‘전략적 스토리텔러’가 되어야 합니다.
이미 지난 2021년, 딜로이트(Deloitte)는 CSO의 역할을 ‘Chief Sense-Maker’, 즉 ‘조직 내의 최고 해석자’로 정의한 바 있습니다. 복잡한 글로벌 규제와 파편화된 데이터, 숨겨진 비용과 리스크를 하나의 일관된 경영 언어로 번역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둔한 조직의 소멸, ‘으뜸헤엄이’들의 연대
예쁜 보고서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그러나 지속가능성의 시대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본질은 더 깊어졌습니다. 앞으로 ESG 조직의 역할은 계속 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억울해하지 마세요. 어쩌면 AI 시대, 가장 늦게 생긴 조직이기에 더 변화에 유리할 수도 있으니까요.
오래 전, 아이와 제가 둘 다 좋아했던 동화책이 있었습니다. 레오 리오니(Leo Lionni)의 으뜸헤엄이(Swimmy) 입니다. 작은 물고기들이 큰 물고기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모두 모여 하나의 커다란 물고기 모양을 만들고, 검은 물고기 으뜸헤엄이가 눈이 되어 함께 움직이는 장면입니다.
레오 리오니(Leo Lionni)의 으뜸헤엄이(Swimmy) .
예전에는 그저 약한 존재들의 아름다운 협동으로만 읽혔던 이 장면이, 지금은 AI 시대를 살아갈 우리의 생존 방정식으로 읽힙니다. AI 시대 조직은 아예 크거나, 아예 작아야 유리합니다. 압도적인 자본과 인프라를 가진 초대형 플랫폼이 되거나, 작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1인 기업·소규모 조직이 되어야 합니다. 가장 위험한 곳은 중간입니다. 몸집은 큰데 자본은 충분하지 않고, 인력은 많은데 의사결정은 느리고, 조직은 무거운데 기술 전환은 더딘 곳입니다.
매번 바뀌는 규제를 끝없이 학습하느라 피곤하고 때론 억울하겠지만, 어쩌면 진짜 억울한 것은 둔한 조직 안에 갇혀 관성적으로 일하다가 함께 소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ESG 생태계의 동료 여러분. 너무 외로워하거나 괴로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박란희 대표 & 편집장
박란희 대표는 조선일보 기자 및 공익섹션(더나은미래) 편집장을 거친 후 2020년부터 임팩트온을 창업해 지속가능성(ESG), 글로벌 에너지전환 등 다양한 이슈를 다루고 있다. 한양대 ESG MBA(겸임교수), 전 대통령직속 탄소중립위원회 산업전환분과 전문위원회 위원 등을 맡아왔다. 2012년 이후 국내 다수의 대기업 사회공헌(CSR) 컨설팅 및 실행, ESG 사내교육 및 내부 포럼을 진행해왔으며, SK 사회적가치연구원과 협업해 등을 발간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