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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공감하라… 슬픈 사월, 다시 인간다움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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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철 사월은 언제나 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어떤 사월은 꽃보다 먼저 눈물을 피운다. 바람은 따뜻해지고 햇살은 부드러워지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차가운 바닷물이 흐른다. 열두 번째 사월을 맞이한 지금, 시간은 분명 흘렀지만 고통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12년이라는 시간은 사람을 무디게 만든다. 처음에는 또렷했던 장면들이 점점 흐릿해지고, 절박했던 감정은 일상의 분주함에 밀려난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가, 아니면 기억하고 있다고 믿고 있을 뿐인가. 성서의 언어는 단호하다. 기억하라.” 히브리어 ‘자카르(zakar)’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그것은 삶 전체로 붙드는 기억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이 명령은 과거를 떠올리라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 현재를 살고 미래를 선택하라는 요청이었다. 고통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 고통에 머물기 위함이 아니라,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집트의 종살이와 광야의 방황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얼마나 쉽게 억압당하고, 또 얼마나 쉽게 잊힐 수 있는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증언이었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건져 올려진 기억은 이후의 삶을 지탱하는 윤리가 되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사월도 다르지 않다. 2014년 4월 16일, 그날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현재이며,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이다. 우리는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단지 슬픈 사건으로 남겨두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사회를 성찰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는가. 기억은 저절로 지속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붙들어야 하는 선택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기억은 윤리이며 동시에 책임이다. 우리가 잊지 않기로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그 기억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된다. 12년 전 우리는 약속했다. 잊지 않겠다”고. 그 약속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다짐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삶은 그 약속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가. 기억은 말로만 유지되지 않는다. 우리의 일상과 선택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 우리는 그날을 기억해야 한다. 구조되지 못한 시간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흘러간 시간들, 기다림과 절망이 교차하던 순간들을. 그 기억은 고통스럽지만, 바로 그 고통이 우리를 깨어 있게 한다. 망각은 편안하다. 잊으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러나 그 가벼움은 대가를 요구한다. 고통을 잊는 사회는 같은 고통을 반복할 준비를 마친 사회다. 그래서 기억은 저항이다. 시간의 흐름에, 무감각에, 반복되는 비극에 맞서는 행위다. 기억은 또한 관계다. 그날을 기억하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그 안에 있었던 사람들을 기억하는 일이다. 이름을 기억하고, 얼굴을 떠올리며, 그들의 삶을 상상하는 일. 그것이 기억의 본질이다. 숫자는 쉽게 잊히지만, 이름은 오래 남는다. 우리는 숫자가 아니라 이름으로, 사건이 아니라 삶으로, 기록이 아니라 마음으로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기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삶을 바꾸지 않는 기억은 결국 과거에 머무른다. 그래서 기억은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타인을 대하는 태도,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때 비로소 기억은 현재가 된다. 12년이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바꾸었는가. 얼마나 달라졌는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바꿀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쉽게 답할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 침묵이 우리를 다시 기억으로 이끈다. 답할 수 없기에 우리는 더 깊이 기억해야 한다.   사진=박철 사월의 꽃은 여전히 피고 진다. 그러나 인간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그날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이 고통스럽고 불편하더라도. 기억은 인간다움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앞에 서 있다. 기억이 과거를 붙드는 일이라면, 공감은 현재를 살아내는 방식이다. 기억이 머리에서 시작된다면, 공감은 몸에서 시작된다. 이 둘이 만날 때 비로소 인간은 타인의 고통 앞에서 멈출 수 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나 동시에 이해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도 있다. 공감은 능력이 아니라 선택이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한다. 다가갈 것인가, 물러설 것인가. 성서 속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는 이 선택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길 위에 쓰러진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도움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그 곁을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보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저 사람을 돕다가 위험해지면 어떻게 하지?” 이해할 수는 있지만 정당화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들은 위험을 피했지만 인간다움을 잃었다. 반면 사마리아인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내가 저 사람을 돕지 않으면, 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이 단순한 질문이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12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여전히 안전을 먼저 생각하며 타인의 고통을 뒤로 미루고 있지는 않은가. 공감은 안전한 거리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위험을 감수하고 타인의 고통 속으로 한 걸음 들어가는 일이다. 그리고 그 고통이 자신의 삶을 흔들도록 허용하는 일이다. 나의 스승 예수의 삶은 그 공감의 깊이를 보여준다. 성서가 말하는 불쌍히 여겼다”는 표현은 단순한 연민이 아니라,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다. 타인의 아픔이 존재 깊숙이 파고드는 경험이다. 예수는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 공감의 끝이 십자가였다. 십자가는 고통의 관람자가 아니라 참여자로 살아간 삶의 결과였다. 우리는 그 길 앞에 서 있다. 관람자로 남을 것인가, 참여자로 살아갈 것인가.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이 질문을 던졌고,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그 고통을 얼마나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 아픔 앞에서 얼마나 멈추어 서고 있는가. 공감 없는 기억은 굳어져 감정 없는 기록이 되고, 결국 잊힌다. 반대로 기억 없는 공감은 순간의 눈물로 끝난다. 그래서 우리는 둘을 함께 붙들어야 한다. 기억하고, 공감해야 한다. 머리와 몸이 함께 움직일 때, 인간은 타인의 고통 앞에서 책임 있는 존재가 된다. 사월은 우리를 시험한다. 우리는 여전히 아파할 수 있는가. 타인의 고통 앞에서 멈출 수 있는가. 질문을 바꿀 수 있는가. 내가 위험해지면 어떻게 하지?”에서 내가 외면하면 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로. 이 질문의 전환이 사회를 바꾸는 시작이다. 우리는 완전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방향은 선택할 수 있다. 고통을 외면하는 대신 그 곁에 서는 방향을, 침묵 대신 말하는 방향을, 망각 대신 기억하는 방향을. 12년의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그러나 고통 앞에서는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다시 기억하고, 다시 공감해야 한다. 사월의 바람이 다시 분다. 꽃은 여전히 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이 계절이 단순한 봄이 아니라는 것을. 이 사월은 우리에게 요구한다. 기억하라고. 그리고 공감하라고. 그것이 우리가 인간으로 남기 위한 마지막 조건이기 때문이다.     [추도시] 꺼지지 않는 꽃들을 기억하며 -----세월호 참사 12주기에 부쳐 / 박철   바다가 삼켜버린 이름들을 부르다가 나는 자꾸 목이 잠긴다 노란 빛으로 흔들리던 그 봄날이 아직 끝나지 않은 채 우리 가슴 어딘가에 걸려 있다 벗들아, 이 검은 물결 속에서도 과연 하나의 숨이 끝내 꺼지지 않고 남아 있을까 거짓과 망각의 손길에도 끝내 꺾이지 않을 작은 빛 하나 있을까 차디찬 물 아래에서 그들이 붙잡았을 마지막 손처럼 우리는 서로를 놓지 말아야 한다 부서진 시간의 파편 위에서도 다시 이어 붙일 수 있는 하나의 약속처럼 눈부신 침묵 아래 묻힌 목소리들이 밤마다 우리를 두드린다 잊지 말라고, 포기하지 말라고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고 그래서 묻는다 이 절망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다시 피어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끝내 외면하지 않는 마음, 끝내 등을 돌리지 않는 기억 끝내 서로를 부르는 이름일 것이다 그 이름들이 모여 언젠가 다시 바다 위에 길을 만들고 그 길 위에 아이들이 웃으며 돌아오는 날이 정말로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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