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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하루 110㎞까지 걸으며 빗물 측정한 존 플레처 밀러

하루 110㎞까지 걸으며 빗물 측정한 존 플레처 밀러
[사람들]
비를 세다가 별을 세다 영국에는 비가 많이 온다. 이것은 영국인들이 가장 즐겨 하는 불평이자, 외국인들이 영국에 대해 가장 먼저 배우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잉글랜드 북서부의 호수지방(레이크 디스트릭트)은 그 영국 안에서도 가장 비가 많이 오는 곳으로 손꼽힌다. 어찌나 많이 오는지, 열대 지방 일부보다 강수량이 높다. 이 놀라운 사실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증명한 인물이 바로 존 플레처 밀러(John Fletcher Miller, 1816~1856)다. 밀러는 1816년 6월 20일 컴브리아주의 항구도시 화이트헤이벤에서 퀘이커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 밀러는 가죽무두질 공장을 운영했다. 그 시절 퀘이커집안이 그랬듯, 집안은 신앙과 실용이 공존했다.  밀러가 다닌 학교는 꽤 유서 깊은 곳이었다. 훗날 원자론으로 근대화학의 문을 연 존 달턴(John Dalton, 1766~1844)이 교사로 재직했던 바로 그 학교다. 달턴도 퀘이커 교도였고, 50년 넘게 날씨를 기록한 기상애호가였다. 밀러는 열다섯 살 때부터 기상관측 기록을 쓰기 시작했으니, 학교 선배를 제대로 따라 한 셈이다. 원래 그는 의사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열여섯 살 때부터 시작된 만성통증이 그 꿈을 가로막았다. 아프면 쉬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빗물을 받고, 바람의 방향을 적었다. 몸이 허약하면 정신으로 세상을 측정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존 플레처 밀러.(John Fletcher Miller: Remembering the rain recorder - BBC News) 스물여섯, 태평양을 건너다 1837년, 스물한 살의 밀러는 영국기상학회 회원이 됐다. 그해 10월, 그는 건강을 회복할 겸 학회를 대표하여 뱃길에 올랐다. 호주 시드니까지 가고, 거기서 다시 칠레의 발파라이소까지 돌아오는 긴 항해였다. 아픈 몸으로 대양을 건너는 일이 건강에 좋을지는 의문이지만, 그는 항해 내내 관측을 멈추지 않았다. 바다 위에서도 온도계를 들고, 강수량을 기록하고, 구름의 형태를 적었다. 요즘 말로 하면 출장 중에도 야근 이었다. 귀국 후 밀러는 더 큰 꿈을 꿨다. 호수지방의 강수량을 고도별로 체계적으로 측정하겠다는 것이었다. 1844년부터 그는 레이크 디스트릭트 여기저기에 빗물 측정통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1846년에는 잉글랜드 최고봉 스카펠 파이크(해발 978미터)를 포함하여 서로 다른 고도에 무려 26개의 측정소 망을 구축했다. 현지의 목동과 일꾼들을 고용하여 수치를 기록하게 했지만, 밀러 본인도 직접 검사를 다녔다. 하루에 무려 110킬로미터를 걸어 다닌 날도 있었다. 만성통증을 안고서. 이쯤 되면 아프다 는 말이 그에게는 핑계의 언어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5년에 걸친 연구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충격적이었다. 호수지방의 강수량은 열대지방 일부를 넘는다. 그리고 강수량은 해발 600미터(약 2000피트)까지는 고도가 높아질수록 늘어나다가 그 이상부터는 줄어든다. 오늘날 우리가 상식으로 여기는 고도와 강수량의 관계 를, 그는 발로 걸어 다니며 측정 통을 들여다보고 최초로 증명해냈다. 1847년 왕립학회가 연구비를 지원했고, 1850년에는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됐다. 1851년 2월에는 논문 「컴벌랜드·웨스트모얼랜드 호수지방의 기상학에 관하여」를 왕립학회에 제출했다. 제목만 봐도 숨이 찬다.   1849년 존 플레처 밀러가 화이트헤이벤에 세운 천문대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John Fletcher Miller: Remembering the rain recorder - BBC News) 무두질 공장 옆에 천문대를 짓다 1849년, 밀러는 아버지의 무두질 공장 바로 옆에 천문대를 세웠다. 지붕이 돌아가는 구조였다. 구경 9.5인치짜리 굴절망원경을 갖추고 엔케 혜성, 토성, 수성, 태양, 유성, 일식을 관측했다. 당시 가장 어렵다는 쌍성(두 별이 서로를 도는 체계) 관측을 위한 가는 철사 마이크로미터도 갖췄다. 낮에는 빗물을 세고, 밤에는 별을 헤아리는 삶. 그는 화이트헤이벤 시민들을 위해 과학강연도 자주 열었다. 망원경 구경도 시켜줬다. 항구도시 노동자들이 퇴근 후 별을 보러 가죽 냄새 풍기는 공장 옆 천문대를 찾았을 광경이 왠지 따뜻하다. 그는 기상, 천문에만 머물지 않았다. 죽기 전까지 호수지방의 지질학, 식물학, 조류학, 곤충학을 아우르는 종합안내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만 사는 식물과 곤충에 특히 집중했다. 박물학자, 기상학자, 천문학자, 강연자, 걷기의 달인까지. 1856년 7월 14일 아버지 집 고스트리트에서 짧은 투병 끝에 사망했다. 40년의 짧은 삶, 너무 많이 걷고, 너무 많이 측정하고, 너무 일찍 떠났다. 퀘이커 묘지에 묻혔으나 기록에는 비회원 으로 적혀 있다. 퀘이커집안에서 태어나 퀘이커 땅에 묻혔지만, 공식 회원명부에는 이름이 없다. 삶의 기록보다 죽음의 기록이 더 정확한 아이러니가 여기서도 반복된다.   존 플레처 밀러가 거주하며 실험 내용을 기록했던 화이트헤이벤 하이 스트리트의 집.(http://www.whitehavenandwesternlakeland.co.uk/) 오늘의 한국에게 묻다 존 플레처 밀러의 삶이 한국과 무슨 관계인가. 얼핏 보면 멀다. 19세기 영국 북부의 퀘이커 청년이 빗물을 재던 이야기가 2024년 계엄과 2026년 늦봄 대한민국에 무슨 말을 건넬 수 있겠는가. 그러나 조금 달리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밀러가 활동하던 19세기 중반 영국은 산업혁명의 한가운데였다. 석탄 연기가  온 도시를 뒤덮고, 자본가는 돈을 쌓고, 노동자는 폐를 망가뜨렸다. 그 시대에 밀러는 빗물의 양과 별의 위치를 기록했다. 아무도 돈이 된다고 여기지 않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 기록들이 쌓여 기후과학의 토대가 됐다. 오늘날 기후위기의 경고가 가능한 것도, 지난 200년 가까운 강수량 자료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지금 무엇을 기록하고 있는가. 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 밤의 기록, 그 이후의 기록, 헌법이 어떻게 작동했고 어떻게 작동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기록. 이 기록들이 지금 어떻게 쌓이고 있는가. 2026년 5월 헌법개정안이 국회에서 부결됐다. 그 부결의 이유와 과정도 기록이다. 밀러는 아팠다. 만성통증으로 의대를 포기했고, 바다를 건너면서도 아팠다. 그러나 그는 관측을 멈추지 않았다. 고통이 관측을 막는 것이 아니라, 관측이 고통을 견디게 했다. 민주주의도 그런 것이 아닐까. 민주주의가 아프다고 해서 관측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관측을 계속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살린다. 밀러는 하루에 110킬로미터를 걸으며 측정통을 들여다봤다. 누가 시킨 일이 아니었다. 돈이 되는 일도 아니었다. 다만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신념 하나였다. 진실이 권력보다 오래간다는, 퀘이커전통이 그에게 심어준 그 단순한 확신이었다. 한국의 언론이, 시민이, 기록자들이 지금 그 측정통을 들고 걸어가고 있기를 바란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때로는 40세에 쓰러지더라도. 비는 재야 한다. 정확하게.   컴브리아주의 항구도시 화이트헤이벤에 있는 존 플레처 밀러 기념 명판(김성수 시민기자)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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