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변호한 인물이 재소자 1800명 총살 승인 [뉴스] 그의 생애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굴절 그 자체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3권을 펼쳤다. 이우익(李愚益, 1890~1982) 항목의 한 문장에 손이 멈췄다.
이우익은 이육사가 관련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투척사건 등을 위한 항일변호를 맡기도 했으며,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을 거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이런 문장이 기다리고 있다.
이우익은 법무부장관으로서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예비검속자들을 군에 인계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결정에 이의 제기 없이 동의하고 실행했다.
그 결과 1950년 여름, 대전형무소에서만 1700~1800명이 총살됐다.
창씨개명을 거부한 사람이 1800명의 총살을 승인했다. 독립운동가를 변호한 사람이 재소자 학살의 법무부 책임자가 됐다. 이 거리가 얼마나 먼 것인지, 아니면 얼마나 가까운 것인지가 이 글의 핵심이다.
이우익(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1890년 경북 칠곡 출생, 판사 전형시험에 합격한 첫 세대
이우익은 1890년 4월 15일 경상북도 칠곡에서 태어났다. 1912년 2월 경성전수학교(경성법학전문학교의 전신)를 졸업하고 1912~1913년 재판소 서기로 일했다. 1913년 판사전형시험에 합격해 1914년 1월 조선총독부 밀양지원 판사로 임용됐다. 그리고 1914년 4월 검사로 전직해 1927년까지 14년 동안 조선총독부 소속 검사와 판사로 근무했다.
1927년 퇴임 후 대구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이때가 그의 이력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다. 이육사(1904~1944)가 연루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투척사건의 변호를 맡았다. 심산 김창숙의 항일 변호도 맡았다.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그의 아들 이원조(1909~1955)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KAPF) 소속 문학평론가로 사회주의 성향의 문인이었다. 이 집안은 항일의 공기 속에서 살았다.
이육사(위키백과)
세계사 속의 동류, 선의의 부역자 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역설의 인물이 떠오른다. 프랑스 비시 정권(1940~1944년)에서 일부 법률가들은 처음에 더 나쁜 결과를 막기 위해 체제 안에서 일한다고 자신을 정당화했다. 1944년 해방 후 이들 일부는 전쟁 중 유대인 추방에 서명한 공문서 앞에 서야 했다. 그 결정이 더 많은 사람을 살렸다 는 그들의 변명은 법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우익의 경우도 비슷한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최고 권력자의 결정에 맞서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를 변호한 사람이, 법무부장관이 된 뒤에는 재소자 학살을 승인했다. 그 두 장면 사이에 무엇이 있었는가.
이우익(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1950년 6월, 대전형무소 학살의 법무부 책임자
이우익의 반헌법 행위의 핵심은 1950년 6월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사흘 만에 서울을 버린 이승만(1875~1965)을 따라 이우익은 대전으로 내려갔다. 6월 27~28일, 이우익이 내린 결정이 있었다.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예비검속자를 군에 인계하라는 것이었다.
대전형무소에는 당시 정치·사상범을 포함해 수천 명이 수감돼 있었다. 군에 인계 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실제는 총살이었다. 대전 충남도경과 CIC(방첩대)가 대전형무소 재소자 1700~1800명을 학살했다. 그 현장을 AP통신 기자 프랭크 팔로가 목격하고 촬영했다. 사진이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국제적 파문이 일었다.
법무부 장관으로서 이우익은 형무소의 주무장관이었다. 재소자를 군에 인계하는 결정에 이의 제기 없이 동의하고 실행 했다. 직접 명령을 내렸는지는 기록이 불분명하지만, 주무장관으로서 법적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 『반헌법행위자열전』의 판단이다.
대전형무소 소장 서리는 피난길에 오른 법무부장관을 찾아 대전역으로 달려갔다. 이우익 장관은 군이 재소자들을 달라고 하면 줄 수 밖에 없다 면서 후일 문제가 생기거든 나를 만났다는 얘기를 하지 말라 고 사정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대전광역시 월간일류도시대전
대전 이후, 도망치듯 내려가면서도 부역자 처벌을 명령했다
아이러니는 더 있다. 이승만과 함께 서울을 버리고 달아나던 정부가 서울 수복 후 부역자 처벌 을 강행했다. 서울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시민들이 부역자로 몰려 처벌받았다. 도망친 정부가 남은 자들을 처벌한 것이다. 이 부역자 처벌에서도 법무부장관 이우익이 관여했다.
이 이중성이 이우익이라는 인물을 단순히 학살자 로 규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는 체제의 명령을 따랐다. 그러나 그 체제의 명령이 1800명을 죽였다. 창씨개명을 거부한 사람이 그 명령을 막지 않았다.
학살 당하기 직전의 사람들(대전광역시 월간일류도시대전)
이승만이 대법원장 추천했으나 법관회의가 거부한 사연
전쟁이 끝난 뒤 이우익은 더 높은 자리를 원했다. 이승만은 그를 대법원장으로 추천했다. 그런데 1958년 1월, 법관회의가 이 추천을 거부했다. 법관들이 집단으로 대통령의 인사에 반대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왜 거부했는지 공식 기록은 없다. 다만 판사전형시험 출신으로 일제 시대 판검사 경력과 한국전쟁 시기 재소자 학살 관여 사실이 법관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법관들의 거부가 작은 저항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이승만(나무위키)
자유당 경북도당 위원장과 3·15부정선거
대법원장 좌절 후 이우익은 자유당으로 갔다. 1958년 7월 자유당 경북도당 위원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1960년 3·15부정선거에서 자유당의 도당 위원장으로서 선거개입에 관여했다.
『반헌법행위자열전』은 이 사실을 간략하게 기록하지만, 그 의미는 간략하지 않다. 독립운동가를 변호했던 사람이, 이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부정선거의 도당 위원장이 됐다.
4·19 혁명 이후 이우익은 1960년 참의원의원 입후보를 냈다가 중도 사퇴했다. 1966년에는 자유당 고문이 됐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까지 대구·경북지역 사회단체 활동을 이어갔다. 1982년 3월 16일, 91세로 사망했다.
[KBS 역사저널 그날] 그날 비화, 1960년 3.15 부정선거ㅣ KBS 2020.4.14 방송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비시 정권에 부역한 프랑스 법률가들의 이야기는 영국 역사교과서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 는 변명이 대규모 인권침해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이우익은 독립운동가를 변호했고, 창씨개명을 거부했고, 그리고 1800명의 총살을 못 본 척 승인했다. 이 세 가지 사실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한다. 그것이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복잡성이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 )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이우익의 두 얼굴을 떠올렸다. 권력 앞에서 원칙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그 원칙을 잃었을 때 얼마나 큰 비극이 오는지를. 창씨개명을 거부한 용기가, 법무부 장관의 자리에서는 작동하지 않았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