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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다석의 한글철학 ㉟)]얼나(靈我), 산알 참꼴

[다석의 한글철학 ㉟)]얼나(靈我), 산알 참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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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眞我)는 제나가 깨진 자리에 훅 솟아난 하느님 씨알이다. 그 씨알은 산알 참꼴(眞身)이다. 텅 텅 비어 빈 빈탕에 하늘 숨 하나로 반짝이는 늘이니 ‘ᄋᆞᆯ’이다. 몸은 땅에 속하고 얼은 하늘에 속할 터. 얼이 산몸에 들었으니, 하늘이 땅에 든 꼴이다. 하늘 아래 땅이 아니고, 땅속 하늘이다. 그러니 땅에 하늘나라다. 이것이 참이다. 오롯한 참(眞)에 올(理)이요, 비어 한꼴로 오르내리는 올에 숨(氣)이요, 드나들며 소용돌이 감아 도는 숨에 감ᄋᆞ(玄)요, 그런 감ᄋᆞᆷ에 야믊(妙)이니, 야믈어 가는 ‘저절로’가 온갖 것들의 오래(門)다. 얼과 몸이 ‘얼몸’으로 하나 한꼴일 때 비로소 ‘얼나’(靈我)다. 그런 얼나는 ‘ᄆᆞᆷ’ 하나로 숨돌린다. 얼은 빛이요 산목숨(生命)이요 또한 참(眞)이니, 얼나는 환빛으로 크게 밝고 맑게 빛난다. 시원시원한 텅 빔 속에 가득 찬 얼목숨으로 ‘때곳’을 뛰넘어 사는 그이가 바로 본디 있는 그대로 ‘나’다. 다석 류영모는 널 위를 살았다. 널을 타고 깨어 일어나 말숨을 텄다. 널에 사는 삶이 늘을 타고 가는 늘살이다. 널을 타고 늘을 타니 그이는 널에 하나요, 늘에 하나다. 그러니 늘이 없다. 이것이 ‘늘없’(無常)이다. 늘살이는 나죽지 않는다. 나죽지 않으니 참숨이 여기(예) 있다. [다석의 한글철학]에 가져다 쓰는 노자 늙은이 풀이는 다석 류영모의 것이다. 있는 그대로 가져왔기에 띄어쓰기, 하늘아(), 이어쓰기를 그대로 두었다. 열쇳말 : 얼나 - 솟나 - 산알 - 말숨 – 빈탕한데 그림1) 심사정의 ‘하마선인도(蝦蟆仙人圖)’이다. 맑고 시원한 ‘빟님’의 얼나는 날뛰는 기쁨”이다. 장자의 ‘소요유’처럼 저절로 말미암아 노니는 모습이다. 세 발 달린 두꺼비와 함께 천진하게 노니는 선인의 모습에서 빈탕한데 맞혀놀이”를 하며 춤추는 얼나의 경지를 꿍꿍할 수 있다. #1. 얼나(靈我): 솟난 산알 오롯이 참나 앞 서른네 번째 글월에서 ‘제나’가 얼마나 끈질긴 밉상인지, 훅 꺼버려야 할 ‘고픔’이요, ‘시픔(싶음)’인지 뼈저리게 알았다. 제나는 때때로 ‘나’를 찌르는 매서운 칼이다. 그런 제나는 서둘러 꺼야 한다. 다 꺼야 한다. 꺼진 뒤에는 덧없을까? 아니다. 다석은 덧없는 빈탕 끝자리에 바라는 바람 횃불을 높이 치켜든다. 사람의 참나는 얼나다!”(다석어록) 제나는 ‘나’를 제 것이라 우기지만 실은 껍데기이다. 몸나는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간다. 흙에 산알(生靈)이 들어 ‘몸’이다. 산알 키우지 못한 몸은 먼지로 흩어진다. 제나는 그런 몸나가 죽어 묻힐 때 흩어지는 허깨비다. 그러나 얼은 꺼지지 않는다. 꺼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묻히지도 않는다. 하늘에서 왔으니 하늘로 돌아가는 늘이요, 늘의 목숨이요, 늘의 바탈이다. 언제나 환히 타오르는 산알 불꽃이다. 제 잇속만 차리는 제나의 껍데기는 벗어야 한다. 나날을 배워 익히는 까닭이 예 있다. ‘얼나’로 깨어나 ‘꽃내’(香氣) 피우며 살아야 하리라. 검얼(神靈) 씨알 ‘얼나’에서 ‘얼’은 무엇일까? 우리말 ‘얼’은 마음 줏대로 선 브들므릇한 ‘고디’(貞:神)다. ‘검얼’의 큰 숨(氣)이며, 뼈대를 이루는 가온(中心)이다. 이 얼은 하느님께 받아 내가 ‘하는님’으로 하시는 바탈(本性)이다. 얼은 본디 없이 솟은 ᄋᆞᆯ”이요, 비어 큰 ᄎᆞᆷ”이다. 얼은 한없고 끝없고 밑없고 가없어서다. 하늘아() 숨자리는 늘 그렇다. 얼굴을 보라. 왜 ‘낯’을 ‘얼굴’이라 부를까? 얼의 골짜기, 곧 ‘굴’(窟)이기 때문이다. 얼이 드나드는 뚫린 길이자, 얼이 머무는 골짜기다. 다석은 얼굴 뒤의 골짜기가 여간 깊은 것이 아니다. 그 깊고 그윽한 곳에 참나인 얼이 계시다.”라고 했다. 그러니 ‘얼빠진 놈’은 죽은 놈이요, ‘얼차린 놈’은 산 놈이다. 우리가 늙은이(老子)와 다석을 익히는 까닭은 써먹는 앎을 위해서가 아니라, 얼굴에 숨어 계신 이 ‘얼’을 깨우기 위함이다. 얼 깨어야 사람이다. 얼 깬 이는 누구나 밝달겨레다. 깨야 솟는다 얼나는 거저 솟아나지 않는다. 반드시 치러야 할 값이 있다. 바로 ‘제나의 묻엄’이다. 제나가 깨져야 마음이 텅 빈다. 그래야 몸도 성하다. 한 번 죽은 마음이 빈탕의 ‘ᄆᆞᆷ’이다. 제나의 껍데기가 한 번 깨지면 다시는 제대로 붙지 못한다. 언제든지 숨을 돌려 얼을 차릴 수 있다. 큰극(太極:ㅁ) 한꼴로 감아 도는(∞) 한 가온데 하늘 숨이 돌아가는 까닭으로. 다석이 늘 널을 타고 ‘오늘살이’한 까닭도 나날로 죽어 살기 위해서다. 가득 차 고인 물그릇에는 새 물을 담을 수 없다. ‘시픔’이 맴도는 마음에는 얼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다시 살았다. 너나도 날마다 제나를 못 박아야 하리라. 제나가 깨지는 그 순간, 놀라운 뒷구름이 일어난다. 텅 빈자리에 불현듯 하느님 산알이 짓고 일어나면서 솟구치기 때문이다. 이것을 한 글씨로 이어 솟-나-얼!”이라 하자. 솟는 자리에 참 ‘나’요, 그런 솟나에 얼이다. 하나 한꼴로 ‘ᄋᆞᆯ’이다. 제나가 깨진 자리에 솟구쳐 오른 얼빛이다. 이것이 거듭남이자 새로 남이다. 둥 뚜렷이 솟는 환빛 소용돌이! 빟님 목숨 얼나로 솟난 사람은 텅 비어 시원하다. 비었으니 걸릴 게 없다. 참으로 깨어 빈탕한데 돌돌돌 돌아가는 맑고 시원한 ‘빟님’의 얼나는 그래서 날뛰는 기쁨이다. ‘빟님’은 비어 계신 님이요, 빈탕한데 계신 님이요, 하나로 계시면서 늘 하시는 ‘하는님’이다. ‘빟님’의 얼나는 몸뚱이 껍질에 갇히지 않는다. 껍질 안팎을 훌훌 드나들며, 저 드넓게 트인 집집 우주의 ‘빈탕한데’를 제 집 삼는다. 그러니 우주가 내 몸이요, ‘하는님’이 내 목숨이니 두려울 게 무어 있으랴. 제나는 저를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지만, 얼나는 늘 저조차 없기에 온 세상을 다 가진다. 막힘없이 뚫린 길처럼, 쉬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저절로 말미암아 노니는 얼의 넋을 보라. 그 ‘얼넋’이 또한 나의 ‘참꼴’(眞身)이다. 늘, 오늘 얼나는 오롯이 언제나 ‘늙’일뿐 늙지 않는다. ‘늘’(常)에 ‘늑’(地天泰)이 붙은 ‘늙’은 수운 최제우가 깨달은 ‘모신 하늘’(侍天主)이요, 다석이 깨달은 ‘가온찌기’(가온을 찍은 뒤에는 늘 ‘지기/찌기’로 산다)요, 노자 늙은이가 남긴 ‘감ᄋᆞ/감ᄒᆞᆫ’(玄)이다. 늘로 숨돌리는 ‘늙’은 때에 갇히지 않는다. 너나는 지나간 날을 뉘우치고 다가올 날을 걱정하지만, 얼나는 오직 지금 여기인 ‘오늘’을 살 뿐이다. 이제 땅하늘 뚫고 솟나는 ‘이제긋’은 한없이 먼 앞부터 여기에 이어져 내려온 한 ‘끝’이다. 지금 여기가 끝이지 않은가! 늘이 이제 여기로 솟는 이 자리에 ‘끝’이다. 나는 늘 끝이다. 그래서 다석은 그 끝을 바로 오! 늘”이라 했다. 지금 숨 쉬고 있는 이 찰나에 나날이 돌아가는 늘이 있다. 얼나로 깨어난 사람은 죽음 따위 두려워 않는다. 몸은 언젠가 벗겠지만, 목숨 알맹이 얼나는 ‘늘길’(常道)로 돌아가는 ‘빈탕’에서 더 큰 산알로 이어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 얼굴 그대로가 참이다. 얼굴 속에는 갓난아기보다 더 브들므릇하고, 별보다 더 초롱초롱 빛나는 ‘그이’가 있다. 없이 있는 그이가 바로 ‘얼나’다. 그러니 산 흙덩이로 싱싱하게 살아야 하리라. 나날 몸성히다. 그런 몸에 산알 숨을 싱싱하게 돌려야 하리라. 나날 맘놓이다. 그런 맘에 불숨을 싱싱하게 태워야 하리라. 나날 뜻태우(바탈태우)다.   그림2) 표암 강세황이 저 스스로를 그린 ‘강세황 초상(肖像)’이다. 다석은 얼굴 뒤의 그윽한 골짜기에 참나인 얼이 계시다”라고 했다. 이 초상화는 인물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그 내면의 정신까지 담아내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극치다. 특히 형형한 눈빛은 제나를 뚫고 나오는 ‘얼나’의 빛을 상징한다. #2. 솟나(蘇): 치솟는 나 ‘나’는 ‘솟나’ 흔히들 사람이 누리에 태어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말 알맞이로 ‘남’의 본뜻을 그저 ‘태어남’으로만 나타내기에는 무언가 뜻이 못 미친다. 오히려 솟아났다”라고 해야 옳다. 솟남”이다. ‘솟’과 ‘남’이 더해진 말. 그런데 왜 ‘솟남’일까? 땅속에 묻힌 씨앗을 보라. 싹이 트려면 무거운 흙더미를 뚫고 치솟아야 한다. 병아리가 나오려면 단단한 알 껍데기를 깨고 밖으로 솟구쳐야 한다. 목숨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목숨은 억누른 힘을 뚫고 솟아오르는 매섭고 세찬 산알 힘이다. 다석은 솟나라!”라고 외쳤다. ‘긋’은 하늘 얼이 땅에 딱 부딪혀 솟은 것이 사람이라는 뜻이다. 얼이 땅에 부딪힐 때 솟는다. 그저 솟지 않는다. 땅을 뚫고 솟는다. 솟은 이는 흙바닥을 기려고 솟지 않았다. 흙에서 솟았으되, 하늘 바라며 브들므릇하니 곧게 솟으려고 온 ‘있’(有:存:在)이다. 이것은 사람이 스스로 이어 잇는 ‘있있’(存在)이요, ‘얼나’의 바탈(本性:天性)이라는 이야기다. 산 흙에 숨이 도니 그 또한 있는 그대로 산알일 터이다. 다석은 그이를 ‘씨알’이라 했다. 씨알 하나가 씨앗이다. 씨앗은 ‘앗숨’을 가졌다. ‘앗숨’이 씨의 껍질을 깨고 싹을 틔운다. ‘앗숨’이 첫비롯의 하늘 숨이다. ‘나남직’, 곧게 솟나다 다석은 1956해 날적이에 나남직한 이승”이라는 읊이(詩)를 썼다 . 여기서 ‘나남직’은 나 나다, 곧게 솟나다”로 풀 수 있다. 내가 참 ‘나’로서 누리에 ‘난다’는 것은, 땅에 엎드려 굽히거나 바닥에 눌리는 게 아니다. 대나무 싹이 땅을 뚫고 치솟아 오르듯 곧이 곧게 솟는 것이다. 산 대나무는 곧아서 굽고 굽어서 곧다. 속에 ‘앗숨’이 들었기 때문이다. 텅 빈 대나무 속은 온통 ‘앗숨’이다. 그것이 숨빛 힘이다. 그 힘으로 쑥쑥 자란다. 그렇지만 죽어 마른 대나무는 잘 휘지 않고 부러진다. 다석은 홀소리 ‘ㅣ’를 사람이라 하였다. 학산 이정호는 ㅣ는 머리를 위에 두고 발을 아래에 두어 직립하여 있는 인간”이라 했고, 하늘을 이고 땅에 서서 위로는 하늘의 중심에 통하고 아래로는 땅의 중심에 사무쳐 솟은 인간”이라 했다. 짐승은 등뼈가 땅처럼 누워(ㅡ) 있다. 오직 사람만이 등뼈를 하늘로 세우고(ㅣ) 섰다. 이것이 ‘솟나’의 몸꼴이다. 얼꼴은 산 대나무처럼 텅 비었으니 곧아서 굽고 굽어서 곧다. ‘앗숨’이 크다. 일으켜 마음을 하늘로 ‘솟겠다’라는 뜻의 나타냄이다. 그러나 더 바라야 할 것은 ‘ᄋᆞᆯ’이다. 뜻조차 없이 저절로 솟아야 ‘비로솟’이 된다. 거듭 솟는 날 죽은 뒤의 다시 삶”을 말한다. 다석에게 새 삶은 늘 ‘지금 여기’의 큰 일이다. 목숨이 다한 뒤의 죽음이 아니다. 나날을 새로 나죽는 깨어남이다. 아침에 깨어나고 저녁에 잠이든다. 나죽는 나날의 삶이다. 그러니 다석에게 새 삶은 목숨이 다한 뒤의 깨어남이 아니다. 하루하루 ‘오늘살이’로 깨어남이다. ‘솟남’은 나날이요, 늘이어야 한다.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날 때 그것은 죽음(잠)에서 목숨(깸)으로 솟는 일이다. 매 순간 제나가 끌어내릴 때마다 다시 얼을 차리고 깨어나야 한다. 어제의 나는 죽고, 오늘의 내가 새로 솟나야 한다. 자꾸자꾸 새로 내고 새로 ‘나’를 낳아야 한다. 바탕의 바탈이 자꾸 굴러서 뒷바탈을 밀고 새로운 ‘나’로 깨어나야 한다. 날마다 새로 솟아나는 것, 이것이 ‘얼나’가 사는 산알의 숨짓이다. 쉬지 않고 솟는 물은 늘 맑고 싱싱하다. 껍질, 깨 솟아나려면 반드시 뚫고 가야 할 ‘오래’(門)가 있다. 바로 ‘깨트림’이다. 마른 씨앗 껍데기를 단박에 깨트리는 것은 물이다. 죽은 듯 잠자는 씨앗을 뒤흔들어 깨우는 힘이 ‘물숨’이다. 물(목숨/참)이 씨앗(나)에게 스며들면, 씨앗은 퉁퉁 불어 터진다. 다석은 므름 브름 프름”이라 했다. 므름(물음)을 오래 브름(불림)으로 두면 어느 순간 탁 프름(풀림)이다. 불어 터져야 껍질이 ‘탁’하고 깨지면서 싹이 솟는다. 껍질 깨는 이것이 솟아남의 아픔이다. 굳게 내세워 버티는 고집, 한쪽으로 치우친 편견, 날마다 하고 싶어하는 욕망, 이 딱딱한 옹고집 제나를 깨트리지 않고서는 얼나로 솟날 수 없다. ‘말숨:물숨’의 물을 들이켜지 않고서는 결코 깰 수 없다. ‘말숨’을 들이켜면 단박에 깨달아 말귀 열려 ‘귀뚫이’로 해맑아진다. 반드시 ‘단박에’다. 그 뒤에 이어지는 ‘서서히’는 제나가 일어나는 꼴을 붙잡는 뱀 다리(蛇足)다. 날벼락 번개가 내리꽂혀 제나를 산산조각 낸 자리는 결코 돌이킬 수 없다. 이것이 솟구치는 불숨(革命)이다. 그러니 너나는 ‘말숨’을 크게 들이켜야 하리라. 그래야 깨진다. 하나 되다 솟나면 어떻게 될까? 다석은 ㅣ(나)는 이 땅 뚫고 하늘 뚫고 나간다. 정신이 위로 올라간다”라고 했다. 우리는 저 낮고 높은 하늘, 즉 ‘빈탕한데’로 휘몰아쳐 돌아간다.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솟구쳐)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듯, 얼나는 낮은 땅을 거슬러 있다시 온”(如來)으로 돌아간다. 내 안에 까마득한 빛하늘이 돌아간다. 솟구침은, 틔어 돋고, 열려 맺히고, 솟아오르고, 터져 깨고, 감아 도는 빛이 어마어마하게 폭발하는 깨어남이요, 거듭남이다. 마치 집집 우주가 헤아릴 수 없이 큰 빛덩이로 터지듯 너나의 목숨이 우주 한복판에서 번쩍번쩍 터지는 그 순간, 너나는 ‘좀나(낱)’를 벗고 우주가 되는 ‘큰나(한아)’를 이룬다. 우리는 땅에 살면서 우주 하늘로 뒤바뀔 ‘있’이다. ‘있’에 ‘없’이 깨어나리라. 속에 속으로 하늘 숨이 느릿느릿 돌아가리라. 그러니 너나는 언제까지나 땅에 붙들려 살 ‘있’이 아니다. 속에 속은 늘 하늘로 솟으려는 거룩한 바탈이 활활 거리지 않는가. 오늘 하루, 삶이 힘들더라도 숨죽이지 말아야 한다. 기어이 ‘솟난 씨알’로 솟구칠 ‘앗숨’을 가졌으니.   그림3)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靑磁 象嵌雲鶴文 梅甁)’의 한 부분이다. 얼나는 솟는 환빛 소용돌이”다. 끝없는 빈탕을 향해 날아오르는 학과 구름 무늬는 껍질 안팎을 훌훌 드나들며, 집집 우주의 빈탕한데를 제 집 삼는” 얼나의 자유로운 비상과 다르지 않다. #3. 산알: 싱싱한 숨 ‘산알’이다 흙에서 나왔으니, 결국 흙으로 돌아갈 ‘있’으로 여긴다. 과연 그럴까? 뵘에 알아차려야 한다. 뵈는 그것을 올바로 뚫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죽은 흙덩이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산알’이다. 산알 숨 쉬는 흙은 그 스스로 ‘얼몸’이다. 이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산알’은 ‘산’이요, ‘알’이다. 죽은 알이나 썩은 알이 아니다. 펄떡이는 숨빛 힘을 품고 사는 ‘ᄋᆞᆯ’이라는 뜻이다. 다석은 이 산알을 살아 있는 생명의 알갱이이자 산숨의 얼이라는 뜻으로 ‘살알’이라고 했다. 세포 하나하나에 산알이 있기 때문이다. 달걀을 보라. 겉보기엔 매끄러운 돌맹이 같지만, 그 속에는 숨 쉬는 산알이 있다. 따뜻하게 품으면 병아리가 나온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겉모습은 나이 드는 몸뚱이일지라도, 그 안에는 하느님의 목숨(얼)을 품은 산알이 있다. 우리는 이 산알로 숨빛 틔우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이다. 숨빛 틔운 산알 몸은 죽어서 아롱아롱한 빛 알갱이를 남긴다. 4백조 살알 풀어 밝힌 ‘목숨갈’(生命學)은 끄덕여 알 만한 것이면서도 잘 알아차리기 어려운 숨은 뜻을 가졌다. 그이는 몸을 이루는 세포 하나하나를 ‘살알’이라 했다. 넷온울(4백조)의 살알이 내 몸을 이루는 산알이니까. 산목숨의 이 작은 알갱이는 멀고 먼 오래오래, 그러니까 ‘첫비롯’(太初)의 한 티끌에서 일어났다. 우리 몸은 4백조 개의 작은 살알들이 모여서 이룬 크고 큰 우주다. 다석은 4백조 살알이 저마다 정신을 차릴 때에 놀라운 전체 정신인 영원한 인격이 구성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라고 했다. 각각의 세포들이 ‘나’라는 의식으로 온통 깨어날 때, 비로소 ‘산알’이라는 거룩한 몸으로 깨어나리라. 그 몸은 바루어진 바룬 몸이요, 올이 바른 올바른 몸이다. 그러니 산알은 그저 몸뚱이 이룬 목숨이 아닐 터. 수도 없이 많은 산알이 하나로 뭉쳐 솟아 오른 ‘얼몸’이지 않은가. 터져야 산알 ‘산알’이 목숨을 내려면 그냥 저절로 되는 게 아니다. ‘씨알’이 터져야 한다. 씨알 터지는 알짬이어야 한다. 알짬(精)은 산알의 속알이다. 씨알은 무언가 일어날 수 있는 낌새를 가졌을 뿐이다. 씨알은 아직 껍질에 싸여 있다. 이 씨알이 땅에 묻혀 썩고 깨지는 아픔을 겪을 때, 그 속에서 ‘알짬’이 솟아 나온다. 이것이 바로 산알이다. 알짬은 쌀을 쓿어 곧은 알맹이만 고른 것이다. 정(精)을 우리말로 푼 것. 거짓과 위선, 하고픔 따위의 껍질을 다 벗겨내고(쓿어내고), 오직 있는 그대로 맑은 산숨의 고갱이, 그 ‘알짬’으로 가득 찬 꼴이 바로 산알이다. 제나는 껍질이요, 산알은 알맹이다. 우주 어머니 알 감아 도는 ‘암ㅎ’(牝), ‘감ᄒᆞᆫ 암ㅎ’(玄牝)은 그러니 산알 틔우는 골짜기요, 산알 입이다. 우주는 크고 큰 ‘ᄋᆞᆷ’(암ㅎ)이다. 텅 빈 우주 빈탕은 죽은 빈터가 아니다. 산알을 품고 기르는 입이다. 우리는 우주라는 끝도 없이 큰 ‘암ㅎ’이 품고 있는 알이다. 하늘이 우리를 이토록 정성껏 품어주는 까닭은, 때가 되면 껍질을 깨고 ‘얼나’로 깨어나라는 뜻이다. 산알의 늘을 깨우쳐야 하리라. 늘은 예로 있어 예에 다다른 ‘한ᄋᆞ’다. 큰 어미다. 산알은 우주 어머니 ‘한ᄋᆞ’로 이어진 숨이다. 썩지 말고 익어라 알이 숨돌려 목숨을 돌리는 ‘돌숨’(運命)은 두 가지다. 썩어 돌아가거나, 아니면 깨어 돌아가거나. 씨알이 눈 크게 떠 맞서야 할 저쪽은 껍데기 ‘말씨’다. 말이 씨가 된다”라고 할 때의 거짓 ‘말씨’. 헛껍데기 말씨에 사로잡히면 설익는다. 하고픔이 내뱉는 썩은 숨이 아니라, ‘하는님’ 얼김이 내뿜는 산숨으로 품어야 알이 익는다. 제나로 품으면 ‘곤계란(썩은 알)’이 되지만, 바탈태우(뜻태우)로 품으면 ‘산알’이 된다. 그런 산알이 곧 하늘이다. 다석은 온 삶을 ‘몸성히, 맘놓이, 뜻태우’하며 자신의 산알을 닦았다. 너나의 가슴에 손을 얹어 보라. 콩닥콩닥 뛰는 심장 소리가 들리는가? 그것은 피를 돌리면서, 우리 안의 ‘산알’이 껍질을 깨고 싶어서 두드리는 소리이기도 하다. 나는 산알이다.” 이 말을 늘 외워야 하리라. 나이 따위는 잊어야 한다. 너나의 있다시 온”(本來面目)은 첫비롯에서 일어났다. 그런 까닭으로 끝끝내 사라지지 않고 이어질, 나죽지 않을 싱싱한 ‘산알’이지 않은가!   그림4) 백제 시대의 ‘산수무늬 벽돌(山水文塼)’이다. 하늘 아래 땅이 아니라, 땅속 하늘이며, 땅에 하늘나라다. 완만한 산세와 구름, 물이 어우러진 백제의 산수무늬 벽돌은 땅의 형상 속에 우주의 평온한 질서를 담고 있어, 땅하늘이 하나 한꼴”인 얼나의 꼴을 잘 보여준다. #4. 말숨(言息): 하늘 숨쉼 얼로 쉰다 사람은 숨 쉰다. 이 숨은 몸뚱이 살리는 ‘목숨’이다. 얼을 살리는 숨은 ‘말숨’이다. 말씀을 쉬는 숨이다. 그러니까 몸이 쉬는 숨은 목숨이요, 말씀으로 쉬는 숨은 말숨이라는 이야기다. 참을 쉬는 숨은 ‘참숨’이요, 그 참숨으로 얼을 깨우쳐 늘 쉬는 숨이 ‘얼숨’이다. 우리는 밥을 먹지 않거나 ‘숨’(空氣:生氣)을 마시지 않으면 목숨이 끊어진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끼니를 챙기고, 움직여 ‘몸성히’를 놀린다. 그런데 ‘얼나’의 목숨인 ‘말숨’이 끊어지는 것은 두려워 않는다. 얼나가 굶어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만 잔뜩 주워 먹는다. 알이 싱싱하게 솟구치려면 반드시 이 ‘말숨’을 제대로 쉬어야 한다. 말씀을 마셔라 ‘말숨’은 책으로만 풀리지 않는다. 또 아무 말이나 ‘주워 먹는다’고 배부른 것도 아니다. 참 말씀을 찾아야 한다. 빛의 말씀이 참 말숨인 까닭이다. 그런 말씀은 성경에 있고, 불경에도 있으며, 도덕경을 비롯해 수많은 ‘씻어난이’(聖人)가 세워놓은 말들에 있다. 세운 말씀이 뵐 때, 그 말씀을 꿰뚫어야 한다. 말씀이 휘몰아쳐 들어와 몸을 텅텅 울려야 한다. 폭포수로 쏟아져야 한다. 씻어나야 한다. 글씨만 훑는 따위로는 피도 살도 아무 것도 안 된다. 글씨 너머에 있는 그이의 뜨거운 입김(말숨), 그 참 숨돌림이 내 안으로 ‘후우~’ 하고 들어와 씻겨야 한다. 이것이 ‘말숨’이다. 늙은이(老子)는 말숨을 내어 글을 지었다. 다석은 한자(漢字)를 푸는 데만 그치지 않고, 이천 오백해 앞에 토해낸 그 싱싱한 숨결을 캐내어 뜻 한글로 심었다. 묻혀있던 옛 글씨는 살아서 펄떡이는 숨빛 힘으로 내 안의 ‘산알’을 깨우리라. 말숨의 신비 그런데 말숨은 채우는 게 아니다. 채워지지도 않는다. 말숨은 텅 비우는 것이다. 말숨이 한껏 들어오면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비워진다. 그 자리에 곧장 ‘ᄆᆞᆷ’이 돌아간다. ‘ᄋᆞᆯ’이 숨 쉰다. 바로 이것이 말숨이 가진 ‘뒷치기’(逆說)다. 누리를 살도록 하는 앎은 머리에 채울수록 무겁고 겹겹이 뒤섞인다. 그러나 참 말숨은 들어올수록 하고픔을 태우고, 굳잡고 놓지 않는 옹고집 따위를 날려버린다. 그래서 마음이 비고 비어서 빈탕으로 맑고 시원해진다. 우주가 한가득이다. 그 말숨을 늘숨으로 쉬는 것을 크게 바랄 일이다. 늘숨으로 쉬지 않으면 어느새 마음이 탁해진다. 그러면 말짱 도루묵이다. 한 번 쉬고 말 것이 아니라, 숨 쉬듯 끊임없이 생각하고 되새겨야 한다. 그래야 늘 마음이 맑은 꼴로 살아갈 수 있다. 다석이 말한 ‘늘살이’의 참뜻이 예 있다. 늘숨은 서서히 쉬어야 하리라. 빟님 듣는 귀뚫이 말숨을 쉬려면 마음 귀가 뚫려야 한다. 누리를 떠도는 잡소리에는 귀 닫고, 땅하늘이 울리는 ‘저절로’의 소리에 귀 여는 ‘귀뚫이’가 되어야 한다. 단박에 으뜸 하나를 깨달아 말씀의 말귀 열려서 ‘귀뚫이’로 해맑아야 한다. 말귀를 알아듣는 것은 단순히 뜻을 알아차리는 ‘사슴뿔’이 아니다. 우주 주파수와 내 영혼의 주파수가 딱 맞아떨어지는 한소리다. 그때 우리는 말숨 트인 입이 열려 알음알이가 알알이 맺히는 말씀, 곧 ‘단이슬’(甘露)이 맺히는 체험을 하게 된다. 다석 강의를 듣던 제자들은 그이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로 ‘귀뚫이’가 되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단비이자 영혼을 적시는 이슬이었다고 고백하는 까닭이다. 터지는 말씀 샘 말숨을 깊이 쉬면, 마침내 안에서도 단이슬 말이 터져 나온다. 앵무새처럼 남의 말을 흉내 내는 게 아니라, 얼나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제소리’다. 알음앓이가 깊어야 나름 제정신으로 제소리 높이 치솟는 ‘알맞이’를 깨우친다. 안팎에 울리는 말숨이 내 안의 산알을 키우고, 그 산알이 자라서 다시 입으로 새 나온다. 슬기로운 말숨이 뿜어져 나온다. 이것이 숨돌리는 ‘온숨’이다. 오늘은 무슨 숨을 쉬고 있는가? 걱정과 한숨만 내쉬지 않는가? 이제 조용히 입 닫고 말씀에 들어야 하리라. 글자를 넘어 그윽하게 풍겨오는 ‘씻어난이’의 숨결을 들이켜야 하리라. 말숨 한 모금이 안의 얼나를 춤추게 하리라.   그림5)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백자 청화 철화 포도문 항아리’이다. 씨알은 터져야 한다. 그래야 그 속에서 알짬이 솟아난다. 항아리의 넉넉한 기질 위에 힘차게 뻗어 나가는 포도 넝쿨과 알알이 맺힌 포도송이는 우주적 생명력인 ‘산알’이 번져나가는 소용돌이를 연상케 한다. #5. 빈탕한데(虛空): 비어 가득 찬 뜰 빈탕한데 제나로 사는 ‘나’는 갑갑하고 답답하다. 고픔의 벽, 시픔의 벽, 미움의 벽에 갇혔으니까. 숨 쉴 틈이 없다. 그렇게 가두어 꽉 막힌 ‘갇집’(監獄)은 부숴야 한다. 부수고 깨고 벗어나야 한다. 벗어나면 어떻게 될까? 바로 빈, 탕, 한, 데다. 빈탕한데. 다석은 허공(虛空)을 우리말로 ‘빈탕’이라고 했고 그 자리를 빈탕한데”라 불렀다. ‘빈’은 비어 있는 뜻이요, ‘탕’은 바탕이자 뜰이다. ‘한’은 크고 가득한 뜻이며, ‘데’는 곳이다. 더하면 텅 비어 가득한 뜰”이라는 뜻. 얼나로 솟는 건 좁은 몸뚱이 ‘좀나’를 깨고 이 드넓은 ‘빈탕한데’로 하나 되는 것이다. 우주가 내 집이요, 빈탕이 내 옷이다. 한없이 깊고 맑은 길, 툭 터져 막힘없이 뚫린 길, 이 빈탕의 시원함에 벌거숭이 몸나가 있다. 빟님, 비어 계신 님 ‘빈탕한데’는 숨빛이 반짝이는 큰 자리다. 다석은 그곳을 ‘빟’라 했고, 그곳에 계신 분을 ‘빟님’이라 불렀다. ‘빟’는 빔이요 빈탕이며 한울이다. ‘빟님’은 여기저기 거기에 늘 없이 계시는 ‘하느님’이다. 사람들은 이 하느님을 어떤 꼴을 가진 ‘있꼴’ 따위로 잠들어 ‘꿈꿍’(夢想)하고 미루어 ‘꿍꿍’(想像)한다. 다석은 하느님을 없이 계신 님”이라 했다. 텅 빈 빈탕 스스로가 반짝이는 하느님의 꼴이다. 비어 있기에 어디에나 계시고, 비어 있기에 온갖 ‘잘몬’(萬物)을 다 품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빈탕한데를 마주하는 것은 텅 빈 푸른 하늘이 아니다. 끝없이 열린 밤하늘을 마주하는 것이다. 그 하늘이 하느님 얼굴이다. 얼나는 이 ‘빟님’의 품에서 비로소 ‘저절로’를 누린다. 저절로에 ‘ᄒᆞᆷ없 ᄒᆞᆷ’(爲無爲)이 돌아간다. 빈탕 가온데 빈탕은 텅 비었으나, 그 안에는 우주를 크게 돌리는 숨빛이 반짝인다. 반짝이는 작은 빛이 온 우주를 낸 힘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빛이 온통이다. 이를 빈탕 한가운데 돌아가는 가온찌기(ᄀᆞᆫ)”라고 한다. 가온찍기란 영원히 가고 가고 영원히 오고 오는 그 한복판을 탁 찍는 것”이다. 찍어야 ‘지기/찌기’로 돈다. 아주 아주 크고 한없이 드넓은, 끝 간 데 없이 너른 빈탕에 내가 서 있는 ‘여기’를 이제로 콕 찍는 것, 이것이 얼나의 숨돌림이다. 굽어 곧은 ‘가온데’(中心) 잡고, 우주 율려(律呂)에 맞춰 돌돌돌 돌아가는 숨! 제나는 가온을 잃고 하고픔에 휘둘리지만, 얼나는 빈탕한데로 ‘가온찍기’하면서 우주 고디로 우뚝 섰다. 그때 마음은 안팎 없는 하나 한울이다. 우주 한울이 나다. 맞혀놀이 빈탕한데, 그 자리에 숨돌리는 얼나는 무엇을 할까? 다석은 빈탕한데 맞혀놀이!”라고 했다. 이는 하느님의 뜻(빈탕)에 내 뜻을 딱 맞추어 노는 것이다. 본디 하나 한꼴이었으니 맞추면 하나이지 않겠는가. 억지로 끼워 맞춰 사는 게 아니다. 오르내리는 물처럼, 오가는 바람처럼, 드나들며 돌리는 숨처럼 스스로 있는 그대로” 노니는 것(妙衍). 제나의 고픔은 힘들지만, 얼나의 빈탕은 ‘놀이’다.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럼이 없기 때문이다. 저절로 ‘없’ 하나인 까닭이다. 비어 맑고 시원한 있 그대로 없”인 ‘있없’ 하나로 얼나는 춤을 춘다. 누리를 살아간다. 이것이 장자가 말한 소요유(逍遙遊)다. 거닐고 거닐며 아득히 돌아가는 놀이다. 다석이 살아간 ‘늘살이’의 기쁨이다.   그림6) 조선 시대 ‘백자 달항아리’이다. 생긴 꼴이 달덩이처럼 둥글고 가득차서 그리 부른다. 오롯하게 둥근 것은 아니나, 브들므릇하니 넉넉한 것이 참 둥근 꼴을 가졌다. 빈탕한데 숨 돌리는 얼나의 숨이 느껴진다. [부록] 다석 류영모의 우리말 알맞이(哲學) 뜻글 풀이 1. 늙은이(老子): 노자(老子)를 우리말로 옮긴 이름이다. 나이 든 노인이 아니라, 익고 영글어 속알(德)이 꽉 찬 ‘어른’이자, 거짓 없는 참나를 깨달은 ‘얼찬 알’을 뜻한다. 2. 말숨: 그저 말(言)이 아니다. ‘말’에 ‘숨’이 깃든 것이다. 입으로 뱉는 소리가 아니라, 얼(靈)이 실려 산알(生靈)을 살리고 깨우는 참된 말씀을 이른다. 3. 씨알(民): 백성(民)이자, 우주가 내고 낳고 이룰 것들의 씨앗이다. 겉껍질에 싸여 있지만 그 속에 하늘의 뜻(바탈:天性)을 품고 있어, 언젠가 싹을 틔우고 우주로 자라날 거룩한 알맹이다. 4. 한아(一): 숫자 1을 넘어선 ‘크고(大) 하나(一)인 나(我)’다. 너와 나로 쪼개지기 앞의 오롯한 온통이자(너나), 우주와 하나 된 참 ‘큰나’(大我)를 말한다. 작은 나는 ‘좀나’다. 5. 길(道): 도(道)의 우리말이다. 머리로 아는 이치가 아니라, 몸으로 걷고 밟아 나가는 삶의 움직임이다. 늘 흐르고 바뀌며 잘몬(萬物)을 내고 낳고 기르는 우주 어머니다. 6. 속알(德): 덕(德)의 우리말이다. 겉치레가 아닌, 마음 깊은 곳에 든든하게 들어찬 알맹이다. 비어 있는 듯하나 참으로 가득 차 있어 목숨을 살리는 힘이다. 7. 없(無): 덧없는 ‘없’이 아니라, 모든 ‘있’이 비롯되는 바탕이다. 텅 비어 있지만(虛), 검얼(神靈)의 숨 돌림으로 가득 찬, 우주의 첫비롯 자리다. 8. 있(有): ‘없’에, 그러니까 ‘없’ 그 자리에 솟아난 ‘난꼴’(現象)이다. ‘없’에 ‘있’이 났다. ‘없있’ 하나 한꼴이다. ‘없’을 바탕으로 잠시 머물다 가는 꼴과 꼴짓(形象)이다. ‘없’과 짝하여 돌아가는 우주의 한꼴이다. 그저 이름을 달리 부를 뿐이다. 9. 늘(常): 끊임없이 바뀌며 흐르는 ‘지금 여기’의 싱싱한 움직임이다. 어제도 오늘이고, 올 날도 오늘이다. 한결같이 흐르는 길의 모습이다. 그 길의 쉬지 않는 ‘짓됨(變化)’이야말로 결코 뒤바뀌지 않는 ‘늘’이다. 10. 가온찍기(中): 하늘(ㄱ)에 땅(ㄴ)이 가고, 땅에 하늘이 오는 가온데, 그 한복판에 ‘나’라는 하늘 숨(ㆍ)을 콕 찍는 것이다. 찰나의 순간에 끊이지 않는 ‘늘’을 타고, 내 맘속에 하늘의 뜻을 바로 세우는 치열한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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