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기록 사유하는 권력이 되고 싶었던 김건희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미셸 푸코는 아카이브를 단순한 기록의 저장소로 보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권력이 시간을 점유하는 방식으로 읽었다. 누가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봉인하는가. 그 질문 속에 권력이 작동한다. 권력은 늘 현재를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과거를 재구성함으로써 현재를 정당화한다. 따라서 금지된 기록의 문을 여는 행위는, 단지 과거를 엿보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구조를 다시 짜는 행위다. 김건희의 침전 진입은 바로 그런 ‘기억의 무단 개입’이다.
시차를 두고 벌어진 김건희의 국가유산 침입 사건으로 그의 만행이 다시 한번 드러났다. 종묘 영녕전 신실 개방과 차담회, 경복궁 민비 처소이자 시해지였던 곤녕합 출입, 경회루 관람, 근정전 용상 착석,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 비공개 방문 등의 근저에는 어떤 심리가 작동했을까?
움베르토 에코의 ‘프라하의 묘지’(이세욱 옮김, 열린책들)에는 역사를 조작하는 인물 시모니니가 등장한다. 그는 문서를 위조하고, 허구의 음모를 만들어내며, 그 허구 속에서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에코가 그려낸 이 인물은 단순한 사기꾼이 아니다. 그는 기록을 통해 신의 자리를 대리하려는 인간의 욕망”의 화신이다. 역사는 기록된 순간부터 허구의 성격을 띠며, 그 허구 위에 권력이 세워진다. 결국 ‘시온장로 의정서’라는 위서를 만들어 유대인들을 비극적 궁지에 몰아 넣는다.
김건희 씨가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채 경복궁 경회루 2층에 올라가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옆에 분홍색 옷을 입은 이는 공직 임명을 대가로 금품을 건넸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이배용 전 국가교육위원장. 유튜브 방송 ‘주기자 라이브’ 캡처.
‘김건희의 문화 유산 침입’은 바로 그 허구의 층위에 스스로를 삽입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금기의 공간에 들어가고, 용상에 앉음으로써 ‘현재의 권력’을 과거의 상징과 접목시키려는 욕망이 드러난다. 그것은 한 장의 사진으로 남는 순간, 새로운 이야기의 출발점이 된다.
보르헤스의 미로는 텍스트로 이루어져 있다. 그에게 세상은 거대한 도서관이며, 인간은 그 도서관 속에서 길을 잃은 독서자다(‘바벨의 도서관’, 보르헤스의 ‘픽션들’에 나오는 단편 중 하나이지만 ‘바벨의 도서관’은 보르헤스를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픽션들’은 송병선이 옮겼고 민음사에서 출판되었다). 모든 책은 이미 존재하지만, 진리를 가리키는 책은 없다. 인간은 무한한 기록 속에서 단 하나의 ‘원본’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그 원본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탐색은 집착으로 바뀌고, 집착은 광기로 변한다. 김건희가 들어간 침전과 수장고, 그리고 어좌는 그런 미로의 일부다. 원본을 찾겠다는 명목으로 문을 여는 순간, 사실은 복제된 기억 속에서 길을 잃는다. 권력의 아카이브는 그렇게 자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 채 열망의 동굴 속으로 내려간다. 김건희의 일련의 행위는 단순한 호기심의 결과라기보다, 기억과 권력이 교차하는 어떤 ‘아카이브의 장면’처럼 보인다.
푸코의 고고학적 사유와 보르헤스의 미로적 시간은, 에코의 조작된 기록 세계 안에서 맞물린다. 푸코가 ‘담론의 지층’이라 불렀던 것은 곧 보르헤스가 말한 ‘무한한 텍스트의 복제’이기도 하다. 그 사이에서 에코는 그 복제의 욕망을 ‘정치적 환상’으로 드러낸다. 이들이 말하는 것은 기억이 권력을 낳고, 권력이 기억을 다시 쓰는 순환 구조에 있다. 김건희의 행위는 그 순환의 또 하나의 에피소드로 읽힌다.
비블리오매니아, 즉 희귀 문서 수집광의 심리는 여기에 접힌다. 수집가에게 문서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죽은 시간의 증거’이며, 손에 넣음으로써만 생생해지는 권력의 파편이다. 김건희가 왕비의 침전이나 용상 같은 장소를 ‘방문’한 것이 아니라 ‘점유’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공간은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2023년 당시) 권력이 작동하는 기억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 공간을 허락 없이 점유하는 순간, 역사의 서사는 사유화된다. 마치 비블리오매니아가 책을 읽지 않고 ‘소유’함으로써 안심하듯이, 권력은 공간을 통과함으로써 과거를 흡수한다.
결국 이 사건의 본질은 ‘궁궐 내부 무단 진입’이 아니다. 그것은 기록된 죽음을 다시 호출하려는 욕망의 표출이다. 명성황후의 죽음은 근대 한국의 출발점이자 트라우마다. 그의 침전은 왕비의 시해 장소인 동시에, 국가의 기억이 봉인된 무덤이다. 그 무덤의 문을 열고 들어간 자는 단순한 방문객이 아니라, 죽은 기록을 소유하려는 존재가 된다. 그 행위는 푸코가 말한 ‘아카이브의 폭력’이며, 에코가 경고한 ‘역사 조작의 유혹’이고, 보르헤스가 예감한 ‘무한한 반복의 미로’다.
아카이브는 늘 두 얼굴을 지닌다. 그것은 보존의 이름으로 죽음을 붙잡고, 동시에 죽음을 은폐한다. 권력은 그 아카이브를 관리함으로써 자신이 시간의 주인임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 문을 강제로 여는 자는 자신도 모르게 그 시간의 포로가 된다. 김건희의 용상 착좌 의혹은 그래서 일종의 상징적 전복처럼 보인다. 과거 왕권의 상징 위에 현재 권력이 앉음으로써, 시간은 뒤섞이고 기록은 혼탁해진다.
그러나 그 혼탁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사실상 기억에 대한 공포다. 권력은 기록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기록을 열고, 덮고, 다시 열며, 그 모든 과정을 연출한다. 침전의 문을 열고 들어간 행위는 그래서 ‘권력의 연극’이 된다. 푸코가 말한 ‘감시와 처벌’의 장치는 이제 감시가 아니라 기억의 통제로 바뀐다.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보지 못하게 할 것인가. 권력은 그것을 통해 자신을 신화화한다.
그런 점에서 김건희의 경복궁 방문은 단지 한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기억을 사유화하려는 권력의 욕망이 드러난 사건이다. 그녀가 앉았던 자리는 한때 한 제국의 중심이었고, 지금은 박물관의 유리관 속에 갇힌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 상징 위에 앉는 순간, 역사는 다시 움직인다. 권력은 기록의 방식을 통해 자신을 새로 쓰고 싶었던 것이다.
명성황후의 침전을 비추는 플래시의 빛은 순간의 기록이지만, 동시에 또 하나의 은폐다. 그것은 기록의 표면만 남기고, 깊이를 지운다. 그러나 그 삭제의 자리에서 새로운 권력이 자란다. 사진을 가십성 소재로만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민비 시해 장소, 용상, 수장고를 무단 점유한 건 과거를 사유화해 현재 권력을 정당화하려는 욕망이다. 푸코·에코·보르헤스가 경고한 대로, 기록과 공간을 장악하며 역사를 다시 쓰려고 했다. 지금도 ‘암약’하고 있는 이들 세력들을 발본색원해야 한다.
아~ 김건희가 푸코·에코·보르헤스를 알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분석된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이 칼럼은 미국 동포 언론인 에도 동시 게재됩니다.